“저기요.”
공원에는 나와 ‘그녀’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갈색 머리의 그녀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섭게 찢어진 눈에는 아직도 다이아몬드 같은 눈물이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부른 사람이 내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네, 당신이요. 매일 저를 훔쳐보는 남자.”
나는 그건 오해라고, ‘우연’이 자꾸 겹친 것뿐이라고 변명하려 했으나 그녀는 나의 말을 막았다.
“그건 됐고요. 혹시, 담배 있어요?”
없다고 했다. 나는 흡연을 하지 않는다.
“···정말 쓸모없는 남자네.”
그녀는 내가 들리게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담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적당한 존대에서 반말로 돌아선 그녀의 언행에 나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내게는 그녀에게 잡혀 있는 약점이 너무 많았다. 그녀를 무시하고 그냥 가던 길을 가려고 하자, 다시 그녀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기에 좀 앉아요.”
그녀는 다시, 적당한 존대의 말을 한다. 부탁할 때는 존대를, 얻은 게 없다면 반말을 하는 게 그녀의 화법인 듯하다. 사실, 명령에 가까운 것이긴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느다란 왼손으로 쓸며 가리켰다. 무슨 속셈일까. 조심하는 게 좋겠다.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서 담뱃불을 붙이고 있다. 지금 그녀는 몹시 불안한지, 손을 심하게 떨고 있다. 그런데 담뱃갑의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네모난 플라스틱 홀더에서 담배 개비를 꺼냈다. 나는 흡연을 하지는 않지만,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나 편의점에 진열된 담뱃갑들을 많이 봐 와서 일반적인 디자인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담배 개비도 어딘가 엉성하게 말려 있다. 나는 그걸 보고도 불만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 왜 매번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지?”
다시 꾸밈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아까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나. 그게 어떻든간에 나는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설명했다. 나쁜 생각은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꾸 눈이 마주쳤을 뿐이다, 전부 우연이다, 대충 이런 느낌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화려한 미인’이라서 쳐다본 것은 말하지 않았다.
“흐음. 그래?”
그녀는 내 대답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듯, 적당한 말을 뱉으며 담배를 맛있게 빨고 있었다. 하얀 연기를 내뱉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녀의 손 떨림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한다. 눈물 때문에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아까보단 훨씬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담배의 금단증상이 이렇게나 심한 것이었나?
“수영장에서도 그런 거야? 환자용 객실에서 수영장까지는 꽤 거리가 되잖아. 듣자 하니 당신, H칸 환자 같은데, 그곳에서라면 G칸 너머에 있는 수영장이 더 가깝지 않아?”
G칸 너머에 수영장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번 오후에 간 수영장도, 저번에 간호사실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그쪽에 수영장이 있는지 몰랐다고? 하하하! 그냥 내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게 편하지 않아? 거짓말 지어내기 어렵잖아.”
그녀는 말끝을 굴려 대며,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호탕하게 웃기도 한다. 좀 전에 울고 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격양된 모습이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스토커처럼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그나저나 당신 이름이 뭐야? 나이는?”
내 이름과 나이를 들으며 다시 담배 연기를 머금는다.
“나보다 연상으로 보였는데, 동생이었어. 하하하!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다니깐.”
옛날부터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기에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내 말에 집중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물어봤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캐서린(Catherine)’, 이게 내 이름이야. 나이는 비밀. 당신보단 누나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잖아?”
불공평한 정보 교환이 있고 나서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처음 만난 사이라서 별로 할 말이 없다. 그렇게 계속 있기도 그렇고, 슬슬 피곤함이 몰려온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녀가 내 오른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 혈액이 제대로 흐르지 않다는 게 느껴질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
“저기··· 잠깐만!”
목소리 조절이 안 되는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 또 무슨 일일까.
“내일도···, 이 시간에 이곳으로 와줘.”
나는 난감했다. 더 이상 곤란한 일들은 사양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간도 아니고, 복잡한 일들과는 그만 얽히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의 시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새벽이다. 원래라면 의식의 저편으로 가 있을 시간이다. 단지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산책을 나온 것일 뿐이다. 내일도 피곤함을 참아가며 굳이 나올 이유가 없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말하며 곤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지금 캐서린은 신경의 제동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목소리도, 날 붙잡은 손아귀의 힘도, 그녀의 떨림도 모두 제멋대로다.
“부탁이야···.”
그녀는 고개를 푹 숙여, 고운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녀의 정수리 부분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시 거절하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든다. 승낙해도 좋지 않을 것이다. 차선(次善)이 없을 때는 차악(次惡)을 선택하는 게 좋으리라.
나는 ‘내일도 이 시간에 이곳으로’ 오겠다고 약속했다.
캐서린은 날 잡은 손을 놓았다.
“그래. 내일 봐···.”
그러고는 다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새로운 담배 개비를 꺼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간다. -찌릿한 감각에 오른 손목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캐서린의 손자국이, 아주 빨갛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다음날, 빛나는 무언가가 파닥거리며 내 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는 파란 하늘을 제외하고 다른 무언가는 없었다. 분명 안대를 하고 잤는데 말이다. 어제의 스트레스가 내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몸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만큼 어제는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잠을 자는 사이에 기억의 정리가 이루어졌는지 지금은 그저 멍한 상태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규칙적인 생활은 언제부턴가 깨져 있었다. 어제와 달리, 몸은 무겁기만 하고, 의욕이 사라진 상태였다. 대뇌가 기억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의욕도 같이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시간만에 의욕이 사라질 리가 없으니깐.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까끌까끌한 녀석들이 그새 올라왔다. 면도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내 얼굴이 맞는지 더듬어 봤을 뿐이다.
카림은 방에 없었다. 방에 그의 짐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하차한 것은 아니다. 요즘 들어서 그가 방에 없는 시간이 늘고 있다. 그래서 그와 대면하는 빈도는 차츰 줄고 있다. 서로 자고 있거나 아니면 방에 없어서 그렇다. 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눈을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 정도는 하고 했었는데···.
식욕은 없다. 다만, 이 기분 나쁜 무거움을 털어 내고 싶다. 커피나 한 잔 해야겠다. 카페인이 좀 들어가면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식당 입구의 회전문에 바짝 붙어서 푸드코트에 라이언 씨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오늘도 그의 제자가 식당을 지키고 있다. 라이언 씨가 있으면 커피를 포기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내 생활 패턴이 꼬이면서 그가 깨어 있는 시간을 비껴가고 있는 것 같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그가 식당에 있기를 바랐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내 성격대로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예전에 나카무라 씨와 커피를 구매했던 트레인 카페에서 하와이안 코나 블렌드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추출 기계에서 고소한 향기가 올라온다. 산미(山味)를 즐기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서, 하와이안 코나는 최적의 원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가지고 푸드코트의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봤다.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뻔했는데, 나는 찹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라이언 씨에게 야오린 씨와 상담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방아쇠가 되어 다른 사람의 감정이 물밀듯이 내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 복잡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광합성 공원에서 산책 시간을 가졌는데 이상한 여자 ‘캐서린’을 만났다. 그리고 더더욱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와 버렸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이상한 열차에서 내릴 사람이다. 하지만 자의 건 타의 건 그들의 이야기에 올라타 버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야기가 꽤 진행되어 버려서 끝을 내지 못한 채 열차에서 내리기에는 굉장히 찝찝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야기가 언제면 끝날지 모르겠다. 과연, 끝나기는 할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면 좋을까.
그리고 나는 다가오는 새벽에 캐서린을 다시 만나야 한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그녀는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오히려, 내 우울감만 더욱 심해져서 렉사프로나 졸로푸트를 먹게 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잠을 자면서 기껏 진정된 어제의 기분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고소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이유 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식장 중앙에는 오늘도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저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식당에 왔을 때는 그들이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팔다리가 달린 식물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그들의 숫자가 훨씬 늘어 있었다. 어림짐작으로 봐도 20명은 넘어 보인다. 체세포 분열이라도 해서 개체 수를 늘리고 있는 것일까.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그들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그 무리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 고개를 내리자 주위의 사람들도 고개를 내렸고, 다들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이비 종교임이 틀림없다. 하나의 집단이 별다른 이유 없이 웃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특징이다. 그들이 텔레파시로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주고받은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날한시에 미소를 지을 수 있겠는가. 설령, 텔레파시가 가능하다 한들, 저 많은 사람이 같은 주파수 채널을 사용할 수 있을까. 텔레파시 능력에도 개인차가 있을 텐데 말이다.
그들은 리더로 보이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속닥거리며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 남성이 다가와 그들에게 뭔가를 나눠 준다. 그리고 일동 고개를 끄덕이고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 명씩 짝을 짓고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역시나 한 쌍의 그룹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들의 시선은 확실히 내게 고정되어 있다. 어째서 일말의 평화도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적당히 대꾸해서 돌려보내든지 해야겠다. 지금 자리를 뜨기에는 맛있는 커피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대뜸 말을 걸어왔다. 나는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뻔뻔하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의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아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이윽고 그들은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희는 광합성 열차에서의 시간을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열차의 커리큘럼도 훌륭하지만, 효과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저희는 그것들을 보완하고 환자들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환자가 아닌 것처럼 말했다. 나는 불쾌함을 드러내며 당신들도 환자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들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환자’이기 때문에 우울증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고, 잘 대처할 수 있죠. 의료진들은 환자의 기분 같은 건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환자들끼리 뭉쳐서 정보를 공유하고 치료에 힘을 써야 하는 거죠.”
남자 쪽이 나름 그럴듯하게 말한다. 하지만 고려하지 못하는 건 그들이다. 당장 야오린 씨만 해도 환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의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에 더하여 의료 지식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잘난 듯이 계속 떠들어 댔다.
“저희는 며칠간 선생님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가장 최고조에 다다르셨죠. 아닌가요?”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진 않았다. 사이비들의 권유 방식이야 비슷한 법이니깐. 그나저나, 나를 며칠 동안이나 관찰하고 있었다고···?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저희의 생각이 맞나 보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쇠약해진 심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거친 많은 사람이 건강해져서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왜 정작 본인은 열차에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괜히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리라.
광합성 열차 같은 국제 시설조차 종교의 손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이렇게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하도록 놔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말했다.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일이고, 당신들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정말 나를 위해 준다면, 나를 혼자 있도록 내버려 달라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나 괴로운 모습의 인간을 봐 버렸는데, 인간의 도리로서 어찌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당신은 ‘혼자’입니다. 인간은 혼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균형이 깨져 버립니다. 그러니깐 우선, 저희가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 따라 해 보시고, 매일 저희 쪽 사람들과 함께해 보세요.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 봐라. 어차피 시간은 많다.
“자, 방법을 알려드리기 전에, 먼저 빛에 대해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저희의 치료법도 빛을 활용하고 있어서 이 광합성 열차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특히 이 식당 칸은 햇볕을 수직으로 쬐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죠.”
그래서 그들이 수영장도, 공원도 아닌 이곳에서만 아프리카 초원의 미어캣(meerkat)처럼 무리 지어 서 있는 거였다.
“빛은 우리 몸에 필요한 비타민D를 합성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광합성 열차의 창문은 피부암을 일으키는 자외선 UVA(Ultraviolet A)를 완전히 차단하고, 비타민D 합성이 필요한 자외선 UVB(Ultraviolet B)만을 투과시키고 있죠. 하지만 광합성 열차는 비타민D를 합성하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빛은 영양학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빛 그 자체가 우리의 오감(五感, five senses)을 자극하여 심신을 안정시키기 때문에 24시간 내내 빛을 쬐며 치료를 받으라고 광합성 열차가 디자인되었죠.”
종교집단인 줄 알았는데 과학을 기반으로 한 지식을 사용하며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중요합니다. 세계의 의료진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빛의 ‘속성’입니다.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확실히, 들어 본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물리 시간에도 대충 들었었고, 인터넷 과학 칼럼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이 말은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인 동시적인 개념을 갖는 속성임이 아니라, 입자성을 확인하는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자로서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고, 파동성을 확인하는 실험을 해 보니깐 마찬가지로 파동으로써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니깐, 빛이라는 것이 어떤 실험에서는,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쇠나 모래와 같은 입자이며, 또 다른 실험에서는, 우리가 속이 비어 있는 와인 잔을 두드렸을 때 발생하는 소리가 와인 잔을 울리는 것과 같은 파동이라는 말인 걸까.
“네! 그렇습니다! 잘 이해하셨군요.”
그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지어, 설명하지 않는 신도 쪽은 소리가 나지 않는 작은 박수를 내게 보여 주었다. 은근히 거부감이 드는 과한 반응이었다. 이쪽 사람들은 항상 이렇다니깐.
신도는 설명을 계속한다.
“의료진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광합성 열차에서 이루어지는 치료가 대부분 빛의 파동을 이용한 치료라는 것입니다. 빛의 입자 즉, 광자(光子, photon)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햇볕을 쬐는 것도, 비타민D를 합성하는 것도, 모두 자외선이라는 파동을 몸으로 흡수하는 것이고, 따뜻한 빛을 바라보는 것도 빛의 연속적인 파동을 시각적으로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입자가 피부에 작용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빛을 100%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이제 슬슬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걸 꺼낼 것이다. 사기꾼들은 먼저 어렵고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상대방의 경계를 풀게 만든 뒤 본론을 꺼낸다.
“하지만 저희는 다릅니다. 저희는 빛을 ‘먹고’ 있거든요.”
···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그들이 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그건 빛을 먹고 있는 행위였다.
그들은 아까 손에 들고 온 책자를 펼쳐 내게 보여 주었다.
“이건 빛을 먹는 게 우리 몸에 얼마나 이로운지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빛은 입자로써 입을 통해 위(胃, stomach)로 들어가서, 공기 중에 있는 세균을 한 번 살균시키고 소장(小腸, small intestine)에서 소화가 돼요.
이 실험 내용을 살펴보시죠. 이는 재작년에 진행한 실험인데, A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온몸에 모든 자외선을 차단하는 필름을 감았고, 오로지 빛을 향해 입만 벌리게 했어요. 그리고 비교군인 B그룹의 사람들에게는 평소처럼 입을 벌리지 않고 피부로만 빛을 쬐게 하여 진행되었어요. 자, 이 그래프를 보세요. 빛을 먹은 사람이, 먹지 않은 사람보다 체내 비타민D의 농도가 훨씬 높죠? 그리고 이 그래프는 빛을 먹은 그룹과 먹지 않은 그룹의 우울감 정도를 비교한 것이에요. 빛을 먹은 쪽이 먹지 않은 쪽보다 더 우울하다는 걸 보여 주죠.”
여러 색깔을 넣은 그래프들이 보였다. 확실히, 여러 그래프는 모든 면에서 빛을 먹은 그룹이 좋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실험을 진행한 기관이 눈에 거슬린다. ‘비영리사단법인 <빛과 인간>’······, 뭐 하는 곳이지?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도 아니고 이름 모를 법인을 내세우며 실험 결과를 강조하고 있다.
“빛은 너무 가볍기 때문에 호흡만으로는 충분히 섭취할 수 없어요. 주변의 작은 바람에 의해서 날아가 버리거든요. 그래서 빛을 최대한 수직으로 마주하고 입을 벌려서 광자가 위 속으로 들어오게끔 해 주어야 해요. 자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의 옆 사람이 시범을 보여 준다. 고개를 창문을 향해 치켜든다. 그리고 입을 쫙 벌리고 목젖을 움직인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입을 벌리고 목을 활짝 열어 주어야 해요. 혀와 입천장을 멀리 떨어트려 주세요. 위벽에 햇볕을 들인다는 감각으로 해 보시면 돼요. 간단하죠?”
보통, 사람들이 ‘위벽에 햇볕을 받아들인다’라는 감각을 알 리가 없기에 간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이게 효과가 있다 한들 목과 턱관절이 박살 날 것이 분명한 자세였다.
“저희가 길게 설명했지만, 말씀드리고 드리고 싶은 부분은 이 치료법은 저희가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 것이고, 많은 환자가 이 방법을 통해 병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창피했다. 멀리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이들과 섞여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나중에 해 보겠다고 했다. 충분히 설명을 들었으니 이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아-.”
괜찮습니다. 이따가 해 보겠다고요.
“자 따라 해 보세요. 한 번만 해 보세요. 저희가 잘못된 자세만 교정해 드리고 바로 비켜 드리겠습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렸다.
아-
“좋아요. 좋습니다. 그대로 잠시만 계세요. 입속을 확인해 볼게요.”
맞은편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입속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 내 혀와 입천장이 적당하게 벌어져 있는지, 목구멍을 활짝 열어서 위 속에 광자가 도달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런 수치심은 느껴 본 적이 없다. 평소에 보여 주지 않는 내 모습을, 이 미친 사람들이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뚫어지게 보고 있다.
야오린 씨···. 이것도 당신이 말한 ‘평소에 하지 않는 것’에 포함되는 건가요? 이 기괴한 행위 또한 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훌륭합니다! 광자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자세입니다. 이걸 하루에 한 시간씩 반복해 주세요. 단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어떠한 약이나 영양제도 필요 없어요. 그저 광자를 충분히 섭취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선생님께 약을 팔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신도들을 모으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이익은 저희와 같은 사람에게 중요치 않습니다. 인간이 더욱 건강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인류를 위해 활동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안내 책자들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만 드리고 물러나겠습니다. 선생님···, 이곳의 의료진들을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당신과 같은 처지의 환자들과 그런 환자들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는 저희를 믿으세요. 광합성 열차는 햇볕을 24시간 쬘 수 있다는 특수한 점만 이용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그들이 이번에야말로 나를 놓아주었다. 혹여나 다시 그들이 내게 돌아올까 봐 그들의 뒷모습을 주의 깊게 보고 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커피는 식어 있었다. 그들이 내 시간을 뺏어 갔다. 그리고 나도 자리를 떠나야 한다. 저기 멀리서 금발의 까까머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교대할 시간인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식당을 벗어났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은 새벽 2시 50분이다.
일찍이 식당을 벗어난 이후에는 방에서 시간을 죽였다. 프로그램도 참가하지 않았고, 상담도 받지 않았다. 수영장도 가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 그저, 저번에 읽다 만 소설을 마저 보다가, 지루해지면 이따금 졸며 시간을 보냈다. 그걸 반복하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제와 같이 공원은 조용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한 분이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려나.
어제 새벽 3시쯤 공원에 왔으니깐, 그녀가 곧 모습을 보일 것이다. 나는 흡연 공간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캐서린에 대해 생각을 했다.
‘매서운 눈을 가진 화려한 미인’, 그녀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저렇다. 말투만 상냥했다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조금 아쉽다. 그리고 그녀의 ‘오열’을 기억해 냈다. 연고를 바를 수 없는 부분이 아픈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울음이었다. 울음을 쥐어짜 낸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오늘은 그녀와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불편한 침묵은 피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누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캐서린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한테는 은은한 장미 향을 풍기고 있었다. 그 향기는 기억에도 없을 향수(鄕愁, nostalgia)를 불러일으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말을 걸어도 반응을 하지 않더라고.”
그녀와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나는 다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솔직히,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그녀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정말 오지 않을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뭐랄까,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그런 표정이다.
조금 전에는 부끄러워서 몰랐지만, 그녀의 눈은 촉촉하고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눈 주위를 비볐는지 발갛게 올라와 있다.
“담배 좀 피워도 괜찮지?”
웬일로 내 의사를 물어본다. 하지 말라고 해도 피울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무언가를 잡고서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어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우리가 편의점에서 흔히 접하는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세련되게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아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깊게 뱉어 냈다. 마치, 전신을 소독하고 싶다는 듯이 숨의 끝까지 빨고 뱉어 내기를 반복했다. 괜히 내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어색한 적막을 깬 것은 캐서린이었다.
“뭔가 말이라도 해봐.”
말을 해 보라고 한들, 할 말이 없었다. 서로 알 만한 주제는 우울증 이야기밖에 더 있는가.
“뭐든 괜찮아. 오늘 있었던 일이라도 이야기해 줘.”
오늘 있었던 일이라···.
나는 캐서린에게 오후에 만났던 ‘빛을 먹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캐서린도 그들을 자주 보았다고 했다. 광합성 식당에서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다가, 그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이유는 사실, 광자를 먹기 위한 것이라는 대목에서 캐서린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말도 안 돼! 큭큭···, 그러니까 입자 형태의 빛을 먹기 위해 한 시간 동안이나 가만히 서 있는 거라고?”
더욱이, <빛과 인간>이라는 비영리법인 단체에서의 실험에서, 우울증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는 결과를 발표한 것도 말해 주었다.
“큭큭큭···, 이렇게 웃긴 이야기는 정말 오랜만이야!”
그녀는 한참을 웃다가 숨쉬기 괴로운지 억지로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웃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오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선, 그녀는 이 정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계속 웃음이 나오는지 엷은 미소를 띠며 캐서린이 말했다.
“빛을 먹는 것도 ···풉!, 크흠, 실험도 황당하긴 하지만, 은근히 신뢰가 되는 정보인걸? 누가 빛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겠어. 정말 신선해. 그리고 초반부까지는 상당 부분 의학적으로 맞는 말이야.”
캐서린은 잠깐 진지한 얼굴을 하고 담배를 머금었다.
“-음, 그 사람들은 이 열차가 어떤 목적으로 디자인되었는지 잘 알고 있어. 빛이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여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그 증거야. 뇌 과학적으로 접근해 보면 실제로, 밝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몸소 느낄 때, 인간의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량이 늘고, 세로토닌이 다시 신체에 흡수되는 시간을 늦춰서 기분을 안정되게 해 주거든.”
밝고 아름다운 것이라. 순간적으로 해바라기가 떠올랐다. 그 ‘세로토닌’이라는 녀석은 도파민의 친척 같은 것인가.
“그래. 비슷한 녀석이야. 근데 뭐야, 당신도 항우울제를 먹고 있다면 알고 있을 거 아냐. ‘SSRI’ 계열의 약을 먹고 있지 않아?”
나는 항우울제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SSRI···, 분명 나카무라 씨와의 첫 만남에서 그런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의외네. 계절성 우울증 정도인가? 겉보기에는 과하게 데쳐진 콩나물처럼 축 처진 모양새길래 우울증이 심할 줄 알았지.”
도대체 나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떠한 모습을 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의외인 것은 오히려 캐서린 쪽이다. 나는 단지 대화를 이어 나갈 목적으로 가볍게 의견을 물어봤을 뿐인데, 꽤 괜찮은 대답을 얻었다. 나는 어찌 이런 쪽에 대해 잘 아냐고 물어보면서도, 이쯤 되니깐 대충 알 것 같았다. 제약회사 직원 나카무라 씨도 그렇고 도파민에 너무 잘 알고 있는 야오린 씨, 그리고 캐서린까지 모두 뇌라든지, 정신의학 같은 분야의 지식이 해박하다. 이곳은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는 곳이니깐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다만, 나는 증상이 경미하기에 우울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알아볼 시간도 없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원래 이렇게 자주 멍청히 있는 타입이야?”
캐서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폭소하던 그녀의 모습과는 달랐다. 진심이 담겨있는 웃음이랄까. 예쁜 미소였다. 맞아. 이 사람, 예쁜 사람이었지.
“나··· 의사야. 그것도 정신과 전문의.”
···?
정신과 의사가 왜 환자복을 입고 광합성 열차를···
“정신과 의사가 왜 환자복을 입고 광합성 열차를 탔는지 의아하지?”
그녀는 내 마음이 보이는 것일까.
“웃기면 마음껏 웃어도 좋아! 나도 내 상황이 너무 웃기거든. 하하하!”
나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캐서린은 급하게 웃음기를 지우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결심이 섰는지 갑자기 일어났다.
“장소를 옮기자. 따라와.”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떤 객실이었다. 객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H 칸과는 다르게, 이곳의 객실은 옆 객실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열차 속 외딴섬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내 방이야!”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조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옳지 못하다. 열차 내에서는 철저히 남녀 객실이 구분되어 있고, 이성의 방에 들어가면 페널티가 있을 수 있다. 그 페널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양팔이 등을 향한 채 꽉 묶여 있는 구속복을 입고 방안에 침대 하나 덩그러니 놓인 곳에서 CCTV의 감시를 받으며 며칠간 감금시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길할 예감은 비교적 잘 맞는 법이다. 아직 우리 인간의 몸속에 남아 있는 동물적 DNA가 보내는 신호일 것이다. 감금당하고 싶지 않다.
“왜 또 멍청히 서 있어? 들어와. 아마 당신의 객실보단 훨씬 넓고 쾌적할 거야.”
나는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아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 혹시나, 문제가 되어도 내가 무리하게 데려왔다고 하면 되는 거야. 지금은 환자이긴 하지만, 어쨌든 난 의사니깐,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내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방으로 끌어들였다.
끌려들어 간 이 방의 첫인상은 ‘어둡다’였다. 어둡다?
투명한 천장과 벽에는 옷가지나 수건과 같은 천 쪼가리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두꺼운 테이프가 옷과 천위에 붙어서 벽과 고정되어 있다. 완전히 촘촘하게 가릴 수는 없었는지 천 쪼가리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폭풍우가 거친 바다의 하늘과 같아서 방안의 이곳저곳을 찌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무언가를 찾는 감시탑의 헤드라이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외로 담배 냄새가 나지 않았다. 객실 안은 금연구역이지만, 그녀라면 그딴 제약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뻑뻑 담배를 피워 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안은 장미 향기로 가득했다.
“어때 넓지?”
그녀는 오른손으로 방 한가운데 있는 소파로 나를 안내했다. 침대처럼 사용해도 좋을 커다란 소파였다. 소파에는 쿠션 대신, 커다란 생선 인형이 있었다.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 생선 인형을 그녀의 하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는다.
“귀엽지 않아? 멍청한 눈알이 아주 매력적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곡선, 흔한 곰 인형 같은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포인트지. 이게 잠잘 때 안고 자면 몸에 착 감겨서 기분이 좋아.”
나는 이게 무슨 생선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고등어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등이 푸르고, 특유의 무늬가 잘 표현된 것을 보아 싱싱한 고등어 그 자체였다.
나는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실루엣에 사방에서 찌르는 빛을 부분부분 받고 있다. 붉은빛의 갈색 머리가 반짝이고, 핏줄이 보일 만큼 새하얀 팔뚝, 매끈한 다리가 빛에 의해 강조된다. 그리고 식물원에선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숨소리가 더해져 내 신경을 자극한다. 수영장에서 봤을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나는 슬슬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당신, 오늘 이곳에서 자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