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랑 몸을 섞어 달라는 말은 아니야. 뭐···, 당신이 원한다면 그래도 좋아. 나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니깐. 하지만 당신, 그쪽으로 능숙해 보이지는 않는걸. -쿡쿡”
캐서린은 몹시 실례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 내고 있다. ···능숙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핑계를 대자면, 부엌 식탁에 앉아 벽을 바라보며 식빵을 씹느라 연애 경험이 별로 없다. 첫사랑이 내 마지막 사랑이었다.
며칠간 캐서린을 만나며 느껴지는 게 있다. 이 사람은 상당히 불안정하다. 나와 대화하는 수 시간 아니, 수십 분의 대화에서 지나치게 밝아졌다가 침울해졌다가를 반복한다. 지금 그녀에게 ‘중간’이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마음속 중력이 고장 나서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하늘 위로 끌어올려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나는 이런 부분의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는 캐서린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혼자 있으면 안 된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아마 그녀도 그것을 알고 나를 이방으로 데려온 곳이 아닐까. 그녀의 생각은 파악하기 어렵다.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서 도와 달라는 신호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사실, 야오린 씨와 라이언 씨의 일로 더는 복잡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도 환자니깐. 하지만 눈앞에 일을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캐서린과 함께하다 보면 야오린 씨의 일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캐서린과 이곳에서 (달 대신 태양이 떠 있는) 밤을 함께한다. 물론, 몸을 섞는다든가 그러진 않을 것이다. 그런 고결한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다.
나는 캐서린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같다? 모르겠다. 다만, 그녀는 이성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매력을 가진 사람임은 분명하다. 아름답고, 불안정하며, ‘장미’ 향기가 나는 사람이다.
생각의 정리를 끝내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눈을 돌리는 순간, 날카로운 갈색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또 뭘 그렇게 생각해? 정말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야. -큭큭, 내 말에 쉽게 진지해지고, 깊이 고민을 해.”
캐서린은 오른손을 입가에 가져가 -쿡쿡거리며 웃고 있다.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했지? 싫으면 거절해도 좋아···.”
나는 이곳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천 쪼가리 덕분에 어둑해서 잠도 잘 올 것 같다는 것을 굳이 덧붙였다.
캐서린은 정말 기쁜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밤은 길다.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것도 슬슬 지겹다. 이참에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우선, 방안에 이 천 쪼가리들이다. 간호사가 이걸 봤으면 당장 치웠을 텐데 어떻게 할 수 있었냐고 물었다.
“초반에는 내가 식사를 하고 오면 죄다 치워져 있었어.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다시 붙였지. 가끔 나를 타이르러 간호사가 오면, 소리를 질렀어. 지금은 환자이지만 나는 의사라고 빽빽 소리를 질러 댔어. 내가 당신보다 정신병에 대해 훨씬 잘 안다고 말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내버려 두라고 매일매일 소리를 질렀어.
그 간호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몇 달씩 이어지는 내 행동에 질려 버렸는지 더는 찾아오지 않더라고. 원래라면 열차 내에서 소란을 피운 나는 보호실에 감금되어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래도 의사라고 배려를 해 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방에 나를 방치해 두고 그들이 편해지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내 멋대로 생활하고 있지.”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캐서린은 내 얼굴을 보고서 빙긋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알아. 내가 간호사에게 큰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귀찮게 할 게 분명하잖아?”
문득, 내 상담을 진득하게 들어준 야오린 씨가 떠올라서 ‘의료진들은 당신을 귀찮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며 신경을 써준 것’이라고 왠지 간호사를 하듯이 캐서린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이곳에 가둬진 거야. 그건 그렇고···”
방금 내 말은 캐서린이 듣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던 듯이 황급히 말을 돌려 버리는 그녀였다.
“보통,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말하잖아? 내가 간호사에게 소리칠 때, 그 말이 정말 알맞은 말이라고 온몸으로 느꼈어. 내가 소리를 지른 이유는 의료진이 나를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기에 그랬어. 그래서 당연히 간호사에게 악의는 없었고, ‘얼른 내게 질려 버려라’ 이러면서 소리만 빽빽 질렀지. 그리고 방금 말했듯이 나는 간호사에게 악의가 전혀 없고,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미안해서 처음엔 목소리도 잘 안 나왔어.”
캐서린은 오른 다리를 왼편에 꼬듯 올리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그것도 처음뿐이야. 매일 간호사에게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다 보면 그것 또한 익숙해지더라고. 나중엔 간호사가 올 시간만 기다려지는 거 있지? 소리를 지르면 마음이 시원해지거든. 그리고 어느새 내 목소리에는 간호사를 향한 악의가 채워지기 시작했어. 내 몸은 그녀를 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녀가 이 방문을 노크하면 내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하지. 즐거움과 두려움으로.”
캐서린의 스트레스는 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이런 식의 방식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고 괴롭게 만든다. 결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방법은 아니다.
“그래. 맞아. 이럴 때일수록 사람과 대화하려고 노력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가 필요하지. 과거, 나를 찾아왔던 많은 환자를 그렇게 치료했어. 약물과 함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서 환자의 잘못된 사고 패턴을 정상화하는 거지. 근데 이게 문제야. 이 ‘지속적인 상담’이라는 게 인지행동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자존심 센 정신과 의사가 누구에게 상담을 받겠어?”
선배 의사에게 받으면 되지 않나?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어. 그딴 쓰레기 같은 녀석들한테 내 약점을 공개했다면, 그 치욕스러움 때문에 이미 고층 빌딩 옥상에서 몸을 던졌을 거야!”
캐서린은 화가 치밀어 목소리를 떨기 시작했다.
“뭐···, 결국엔 다른 계기로 걸려서 이곳에 갇혀 버리긴 했지만. -큭큭. 애초에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든 조울증이든 간에 그것으로 다른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 자체가 난센스야. 그리고 보통, 자신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본인은 잘 모르는 법이야. 내 마음이 좀먹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어. 그냥, 누구나 직장생활을 하며 발생하는 스트레스,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어.”
어쩌면 좋을까?
“그러게. 내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도해 봤는데···, 쉽지 않네.”
캐서린은 나를 보고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 말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마땅히 해 줄 말을 고르지 못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천장의 옷가지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내 왼팔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캐서린이 몸을 내 쪽으로 당겨 그녀의 오른편을 내게 밀착시킨 것이었다. 나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도 수개월만이라서 그런지 답답한 게 좀 가시는 기분이야. 더 궁금한 거 없어? 뭐든 좋으니까 물어봐 줘.”
나는 더욱 진해진 장미 향기에 취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적당한 질문거리를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나는 캐서린에게 어쩌다 이 광합성 열차에 오르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캐서린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내 시야에는 그저 그녀의 붉은빛 갈색 머리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모습만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말이야, 의사가 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는 대학병원의 막내로 들어와서 내 위 사람들이 겪었던 것들을 재차 겪을 뿐이야. 그들이 겪었던 부조리를 나도 겪어야 한다는 거야. 내 선택이라는 것은 없어. 누군가의 길을 따라 걸을 뿐. 길을 벗어나려고 하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와 나를 번쩍 들어서 다시 그 길로 돌려놓지. 그럴 때마다 내 발에 족쇄를 하나씩 걸어가며 말이야. 지금은 족쇄가 너무 많이 채워져서 너무 무거워. 벗어나는 것은커녕, 만들어진 그 길조차 따라갈 수가 없어. 부정(不正)의 고리를 벗어나려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어. 그리고 데굴데굴 굴러서 어디 냉장고 밑이나 세면대 배수구 밑으로 들어가 버렸어.
나에게 찝쩍대는 대가리만 의사인 정신과 과장이 있었는데, 그 자식은 나만 보면 허구한 날
좋은 향기가 난다면서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짝을 찾는 개 마냥 킁킁거렸지.
그리고 더러운 변태 새끼 같은 눈으로 나를 훑으며 “캐서린은 언제나! 항상! 좋은 향기가 나. 누구에게 맡게 해 주려고 이렇게 관리하는 거야?”라며 성희롱을 일삼았어.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역겨웠지만, 의사가 되려고 치열하게 살았던 것들을 되새기며 꿋꿋이 버텨 냈지. 하지만 이런 내 애매한 대처가 결국, 큰 문제를 야기했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비가 지독히 오던 밤이었어. 저녁에 병동을 돌며 회진을 마치고 그 자식의 연구실에 가서 보고를 했어. 그리고 보고를 마치고 뒤를 도는 순간···]
캐서린이 말을 하다 말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살폈다. 그녀의 매력적인 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그 다이아몬드 같은 눈물이었다.
캐서린은 -크흠 하고 목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큼직한 손으로 내 가슴과 엉덩이, 내 모든 부분을 더듬으며 내 목덜미에 축축한 숨을 불어넣었어.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해서 옆에 있던 난초 화분을 들어 그 자식의 얼굴을 후려쳤지. 근데,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짐승 같은 놈의 표정이었어. 자기가 왜 난초 화분을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정말로 당황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자식은 피가 철철 흐르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내게 말했어.
“캐서린···, 왜 그러는 거야? 네가 원하던 게 이거였잖아.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싶었어. 어쨌든, 나는 경찰에 신고하려고 그곳에서 나오는데 그 자식은 계속해서 소리쳤어.
“네가 지친 것 같아서, 네가 뜸 들이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는데!”라며 말이야.
그 소리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지.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싫어한다. 역겨워했다고 말이야.
그가 되묻길, “그럼 내가 네 향기를 맡아도 거부하지 않았던 건 뭐였어? 내가 관심을 보여 주니 좋아한 거 아니었어?”라며 정신 나간 소리를 계속했어.
나는 거기에 더러워서 참았다고 대답했지.
갑자기 그 자식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끄덕이더니, “아! 내 돈을 노리고 이런 거지? 맞지? 더러운 년. 하하하! 진짜 걸레 같은 년이구먼!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돈 한 푼 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게 이런 짓을 했으니 가볍게 넘어갈 생각하지 마. 내 모든 걸 걸고, 네 인생을 짓밟아 버릴 테니깐!”이라며 욕설을 퍼붓더라고.
피해망상에 찌든 인간이었어. 자기 혼자 사랑하고, 자기 혼자 의심하고 미친 사람이었지. 세상에서 제일 역겨운 자식에게 ‘걸레 같은 년’이라고 듣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그건···그러네.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표현이 된다 한들, 공감하긴 어려울 거야. 굳이 표현해 보자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거야. 그래서 거울을 보고 얼굴을 확인해 보니 그 오른쪽 눈엔 구더기가 한가득 서로 엉켜 있고, 그것들이 반쯤 문드러진 내 눈알을 먹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만큼의 혐오감이랄까? 겪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과 비슷할 거야.]
나는 캐서린이 말한 대로 떠올려 봤다. ···정말 역겹고, 암담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일말의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 이후, 병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그 자식은 바로 해고됐어. 그 정도 소란이었으니 당연해.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 자식과 법적 싸움을 했어. 그 싸움은 꽤 길어졌지. 사실, 나는 이쯤에서 모든 게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어. 내게 성희롱을 한 사람은 병원에서 쫓겨났고, 더는 성희롱을 할 사람도 없었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좋지 않은 일은 연속으로 발생했어.
나는 그 사건 이후, 한 달간 휴식을 갖고 다시 병원에 출근했어. 그런데 동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야. 무엇을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는 법이 없고, 병동에서 회진을 돌고 있으면 의사와 간호사, 보호사, 상담치료사 등 너나 할 것 없이 보호 유리로 둘러싸인 의료실 모여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지. 화가 나서 그들에게 다가가 직접 물어보려고 하면, 공원에 모인 비둘기에 돌을 던진 거처럼 후다닥 흩어져 버렸지. 그날 저녁, 나는 가깝게 지내던 후배를 찾아가 물었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후배는 말하길 주저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지. 우리 병원에는 내가 ‘꽃뱀’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대.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일까? 이대로 함구증(구. 무언증)이 걸려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충격적이었지. 그 소문을 자세히 들어 보니, 나와 그 과장이 시내의 모텔이나, 과장의 차, 과장의 아파트에서 나온 걸 본 사람이 있다는 거였어. 그리고 그 사람 좋았던 과장이 내게 잘못 걸려서 병원에서 해고된 것이라고. 물론 그 소문은 거짓이야. 그 역겨운 자식이랑 같은 병원에 다니는 것도 참기 어려웠는데, 내가 굳이 그를 만날 이유가 없어.
후배에게 알려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나오는데, 후배가 “선배님, 정말 아니시죠?” 이런 개 같은 말을 하는 거야. 개한테 미안할 정도야.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후배인데 나를 의심하고 있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서 구토를 했어. 수십 분 동안 계속했어. 계속하고 계속하면서 모든 걸 쏟아 냈고, 슬슬 내 장기가 딸려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때 구토가 멈췄어. 어떻게 정규 교육도 받고, 대학도 나오고, 사회생활도 해본 사람들이 그 출처도 불분명한 소문 하나에 현혹되어 그리 쉽게 믿어 버릴 수 있을까?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캐서린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지 주먹을 쥐고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쳤다. 나는 찰싹거리는 소리를 좇았고,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는 약간에 시간은 두고 불그스름해졌다.
캐서린은 말을 계속했다.
[최초로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 사실, 그 ‘꽃뱀’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바로 떠올랐거든. 그녀의 이름은 ‘엠마(Emma)’, 30대 후반의 성격 나쁜 우리 병동 간호사야. 그녀는 그 돈 많고 짐승 같은 과장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서 항상 다리를 벌리고 기회를 엿보는 여잔데, 나 때문에 과장이 병원에서 해고되어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기회를 잃어버려서 화가 난 그녀가 나를 꽃뱀이라고 소문낸 게 틀림없었어. 그 변태 과장이 항상 내게 관심이 쏠려 있어서 내게 큰 질투를 했거든. 엠마가 아무리 발정 난 고양이 마냥 과장에게 비벼 대도, 과장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거든. 그 여자는 허영심만 가득할 뿐이지, 이성으로서 매력은 전혀 없었으니깐.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 하하하!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웃겨! 세상에서 제일 역겨운 사내마저도 거절한 여자라니. -쿡쿡쿡]
캐서린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폭소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는데, 그들은 같은 그룹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러면 도대체 어떤 그룹이 그들과 어울리는 것일까.
[나는 엠마를 찾아가서 따졌지. 왜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는지, 그리고 당장 소문을 수습하지 않으면 고소할 거라고 겁을 줬어. 하지만 그 독한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는 그런 소문을 퍼트린 적 없어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역으로 고소하기 전에. 평소에 행실이 깨끗하셨으면 이딴 소문 퍼질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 사람들이 믿는 것이겠죠. 어쨌든, 저랑은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세요.”라며 당당하게 대답하더라고. 너무 당당해서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
나는 그냥 포기했어. 증거도 없고, 증거를 찾더라도 이미 그 변태 자식이랑 법정 싸움을 하고 있어서 그 어떠한 여유도 없었거든. 더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 여기서 조금 억울한 부분은, 나는 일을 만든 적이 없다는 거야. 일은 주변 사람들이 벌려 놨는데, 왜 내가 이 더러운 것들을 치워야 하는지··· 정말 불공평하지 않아? 나는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하···]
캐서린은 정말 수개월 만에 긴 대화를 하는 게 맞는지, 대화 호흡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언제 쉬어 주어야 하고, 언제 말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져 버렸네 하하. 미안해. 그니깐···, 뭐였지···, 그··· 내가 이 열차에 오르게 된 것은 여전히 차가운 병원 사람들의 태도 속에서 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말이야, 음, 그 변태 과장의 선고가 나왔는데, 나는 그 자식을 어떻게든 감옥에 처넣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그 과장은 유명한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해서 내게 맞섰고, 마지막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았어. 돈이면 다 된다는 게 사실이었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부정하고 있었어.
그날, 그 선고가 내려져 내게 결과 통보가 온 그날, 일단 선고에 관한 건 잊어버리고 외래진료에 집중했고, 마지막 환자가 들어왔는데 하필이면 그 마지막이 하나코(花子) 할머니였어. 내 환자 중에 가장 까다로운 노인이었지. 하나코 할머니는 내가 전문의가 돼서부터 맡아온 우울증 환자인데, 남편이 나를 무시하네 마네, 아들딸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동네 노인들이 자신을 피한다, 뭐 이런 불만을 수년 동안 계속해서 뱉어 내기만 하는 노인이야.
항우울제를 복용해 가며 병동에서 인지행동치료도 해 보고, 사람들과 어울리게도 해 봤고, 광합성 열차에도 보내 봤지만, 모든 치료에 비협조적이고, 개선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지. 이런 인간은 생명체이긴 한데, 매주 정해진 시간에 병원에 와서 똑같은 불만만 뱉어 내는 기계에 지나지 않아. 병원비를 바닥에 뿌리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 뿐이야.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가족의 도움을 받는 거야. 자식과 배우자가 환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표현하는 것, 그게 제일 좋아. 자꾸 사랑을 표현하다 보면 적어도, 치료에 대한 의지가 생기긴 하거든. 그러면 의사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기 편하지. 하지만 이놈의 가족들도 정말 비협조적이었어. 하나코 할머니가 말한 대로, 가족 어느 누구도 그녀를 마주하기 싫어했지.
그녀는 별로 좋은 어머니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인과응보지. 그녀가 진작에 가족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다면 불만 반복 매크로(macro)가 되진 않았겠지.
아무튼, 그날 하나코 할머니는 또 수십 분간 언젠가 들었던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자, 저렇게 생각해 보자며 그녀를 달래고 또 달랬지. 데자뷰인 줄 알았잖아. 하하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말만 지겹게 할 뿐이야.
그걸 계속 듣다 보니,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더라고. 내가 의사인지, 고해성사 들어 주는 종교인인지, 아니면 그냥 멍청이인지 모르게 됐어. 그리고 엠마라던가, 변태 과장, 어이없는 집행유예 선고 등이 머릿속에 들어와서 다 같이 즐겁게 왈츠를 추기 시작했지.
그리고 소리를 질렀어.
“나보고 어쩌라고요 할머니! 할머니도 제 말을 귓등으로도 쳐 듣지 않잖아요! 좀! 좀! 제 말을 들어 주세요!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해 주시라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사실 거예요? 치료를 받고 싶으면 저희 말을 따라 주시고, 그게 싫으시면 내일부터 병원에 오지 마세요!”
이렇게 소리를 질러 대니깐 간호사실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와 나를 말리기 시작했고, 간호사가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면서 상황은 마무리됐어. 그리고 진료실에서 한숨 돌리고 있으니, 후배가 와서 과장님이 부른다고 해서 따라가니깐 과장이, ‘요즘 소문도 그렇고, 오늘 일도 그렇고 좋지 않은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인다. 내가 진료를 해 준 걸로 해 둘 테니깐 광합성 열차에서 좀 쉬다가 와라, 기간은 조만간 징계위원회가 소집될 때 결정되는 걸로 하자, 그때까지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소리를 하더라고.
정확히 3주 뒤에 징계위원회가 소집되고 난 그곳에 불려 갔어. 나는 3주 동안 내 미래를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 이건··· 나중에 말해 줄게. 다행히 해고는 아니었고, 6개월 정직, 그리고 그동안 광합성 열차에서 치료받기. 이게 위원회의 결정이야. 그리고 3개월쯤 전에 이곳에 왔어. 여차여차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국, 이런 스트레스를 핑계로 환자에게 짜증 냈다가 벌 받으러 온 거야.]
핑계라니. 그녀는 당치도 않은 일들을 겪었다. 내가 캐서린이었다면 과연 견뎌 낼 수 있었을까? 적어도, 부엌의 벽을 바라보며 고무 같은 식빵을 씹는 것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이후, 우리는 시시한 잡담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내 첫사랑 이야기라든지, 내 직업에 대한 것(재밌는 일인지 그런 걸 물어봤다), 어떤 나라의 도시에 사는지, 학창 시절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이었는지 등 시시한 이야기들의 연속이었다.
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재판’ 이후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성추행 과장은 지방 어디에 개인병원을 개원하여 잘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