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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에서, 다시 걸어가는 이야기

제가 24살이라구요? 저는 아직 17살이에요 응애

by 선옥

1995년생인 나는 학창 시절 겉보기엔 모범생 같은 아이였다.
조용하고, 선생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존재감도 희미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수업 시간 동안 칠판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일삼았고,
선생님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숙제와 준비물은 늘 깜빡했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지 못해서인지 친구들과의 관계도 서툴렀고

여러 명의 친구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느렸고, 눈치도 없었으며
공부도, 체육도, 예능도, 잘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항상 의기소침했고, 스스로를 무쓸모라 여겼다.
만약 어린 시절 나 자신에게 점수를 준다면,
100점 만점에 10점을 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했던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나는 백혈병에 걸렸다.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병원이라는 세계


백혈병에 걸린 뒤,
나는 학업과 진학을 고민하던 평범한 삶을 떠나
매일 새벽 피검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을 살게 됐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내 삶이 끝나 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진심으로 바랐다.

창문 너머의 세상은 내게 너무 멀었다.
햇살, 거리, 사람들 그 모든 것은 내게 갈망이자 소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터널의 끝은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마침내 바깥세상으로 나왔고

손에 꽂힌 주삿바늘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항암제와 수술은 더 이상 없었다.
세상을 향한 갈망이 쌓인 탓일까 나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병원밖의 세계


24살의 나에게 세상은
온통 호기심과 신기함으로 가득했다.

버스를 타는 것조차 신이 났고,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친구였고 스승이었다.

나이는 24살이었지만,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보다 더 순수하고 어리숙했다.

사람을 만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안도감을 주었기에 사람을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보통의 사회생활을 겪지 못해 인간관계의 흐름에 미숙한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툴고 잘 헤쳐나가지 못했다.
안 그래도 느린데, 바깥세상에서 나는 더 느렸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분들의 배려와

가르침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고 조금씩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수함과 어리숙함은 이용당하기 좋은 모습이기도 했다.

내 20대의 많은 시간을 보냈던 헬스클럽.
그곳에서 나는 트레이너로 일하며
노동자로서도 사람으로서도 혹사당했다.

근로시간은 길었고,
급여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고마워했다.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부당한 상황에서도 항상 욕을 먹으며

욕을 먹는 상황도 상황을 만든 것도 온전히 내 탓이라고 믿었다.
헬스장에서 먹고 자며,
몸과 시간을 모두 바쳐 일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옭아매고 옥죄어오던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ADHD 진단.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산만함, 느림, 복잡함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ADHD를 진단받은 후로는 오히려 더 홀가분했다.

나의 이런 모습들은 원인이 있었고 단순히 내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진단받은 이후로 나는 주기적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그 덕분에 더 많은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었고

머릿속을 스치는 잡다한 생각들과
순간의 감정, 일상의 소소한 깨달음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완벽하진 않지만,
나를 나로 바라보는 힘으로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경험을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나는 17살에 죽음과 마주했지만,
삶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는 ADHD를 안고 있지만,
나에게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다.

흩어진 생각 속에서도
아직 서툰 어른이지만,
나는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나는 기쁨에 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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