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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은 잘만 보면서

책은 또 못 넘겨요.

by 선옥

약을 처음 처방받았을 무렵,
나는 편입을 준비하기 위해 일하던 헬스장을 그만둘 계획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약이 학업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함을 넘어 꽤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처방받은 약을 먹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리’와 ‘책 읽기’였다.

두 가지 모두 내가 정말 잘하고 싶었지만
늘 어려움을 겪었던 것들이었다.


정리라고 하면 단순히 방 청소 그 이상의 일이었다.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둬야 할지,
정리 도중 남게 되는 애매한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매번 난감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남들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고,
결국엔 지쳐버리기 일쑤였다.


책은 다행히 좋아하는 편으로 종종 읽었지만 집중이 쉽지 않았다.
분명 읽었는데도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같은 페이지를 여러 번 읽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 1시간 걸릴 분량을 읽는 데
3시간 이상 걸리는 건 기본이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생각이 너무 쉽게 다른 데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다 보면 옷장이 눈에 들어오고,
옷장을 정리하다 보면 계절 지난 옷들이 보여
세탁기로 옮기기까지 해야 직성이 풀렸다.


책을 읽을 때도 비슷했다.
책에 나온 지역명이 궁금해져 검색을 시작하면,
그 지역의 역사, 문화, 사람들까지
파고들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했다.


가지처럼 계속 뻗어나가는 생각들.
그 흐름을 끊을 수 없었고,
무엇이던 끝맺기를 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두렵고 귀찮게 느껴지는 건
그 매듭짓지 못한 끈들이 내 삶에 너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내가 약을 먹고 책을 읽으니
처음으로 책장을 되돌리지 않고 쭉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았고,
오직 책의 내용만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체력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책 한 권을 끝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신기했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다니.


‘완전 대박이다. 이건 내가 못한 게 아니라,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던 거구나!’


기분이 좋아져 컴퓨터 속 파일 정리에도 도전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수년간 쌓인 방대한 자료,

그리고 정리에 익숙하지 않은 몸과 습관은 단번에 바뀌지 않았다


ADHD 약물은 영화「리미트리스」에 나오는 약물처럼
두뇌 능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려주는 마법의 약은 아니다.


분명 내 눈앞에 짙게 깔린 안개를 걷어내주는 효과는 있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눈앞은 환하게 보였고

내가 나가야 할 방향과 목표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시야가 밝아진 것만으로도 상당히 큰 변화지만

그 길을 자동으로 걸어가게 되는 건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결국 내 몫인 것이다.


처음 약을 처방받았을 때,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께
“이 약을 먹다 보면 내성이 생기진 않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초기에 나타나는 효과를 극적으로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 상태가 익숙해져서
‘원래 이 정도는 되는 사람인가?’라고 생각이 들어

효과가 미미하다고 느낄 수 있는 거지,
약 자체에 내성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약은 꾸준히 드시면서 송수영 씨의 체중과 효과, 부작용, 상황을

봐가면서 용량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효과를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내게는 ‘골든타임’ 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던’ 일들, 이 기회에 다시 하나씩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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