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악인의 형통이다. 왜 착하고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하는데 악한 자가 형통한 지 알 수가 없다.
욥기는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악인이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며,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굳게 서고, 그들의 집이 평안하고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위에 임하지 않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고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며 즐기며"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은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 욥뿐 아니라 예레미야도 하나님께 질문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예레미야 12장 1절)
예언자 하박국 역시 악인의 형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놀라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예언자인데 한때는 다음과 같은 호소를 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장 13절)
악인과 그의 후손이 잘되고 쾌락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쾌락이 진정한 참 기쁨인지, 평안이 참 평안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욥기를 잘 읽어보면 욥은 고난을 당하고 있으나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악인의 결국을 알기에 결코 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잠언에서도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언 24장 1-2절) 결국은 심판이 있고 악인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또 의인에게 고난이 왜 오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욥은 엄청난 고통에 지금 처해 있다. 그는 말한다. "내가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 고난당할 때 우리는 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고 잠잠히 계시나? 이렇게 찾는데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또 욥은 말한다. 성경 말씀 중에서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장10절)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이다. 고난을 통해 성숙해지고 거룩해지길 원하시는 거다. 하나님이 쓰실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시는 복은 영생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에릭 프롬이 말한 소유형의 인간이 되지 않고 존재형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을 잘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to be)에 가치를 둔다. 진정 잘 사는 것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악인은 패망하고, 의인이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