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가는 길, 행담도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주차장에서 강아지 우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숨넘어갈 듯한 울음소리는 비명같이 들렸다. 막내 딸아이가 우는 소리를 따라 강아지를 찾아 나섰다. 잠시 후 돌아온 아이는 "저기 저 트럭 짐칸에 강아지가 갇혀있어요."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같이 가 보았다. 이삿짐센터에서 쓰는 노란 플라스틱 통 2개를 아래위로 포개어 밧줄로 묶어놓았는데 강아지가 그 속에서 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구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는지 울음을 그쳤다. 두 발로 서서 낑낑대고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강아지는 누렁이 종류인데 아직 어리다. 딸아이는 플라스틱 통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고 들여다본다.
"엄마, 강아지 눈이 너무 슬퍼 보여요."
"그냥 가자."
나는 딸의 손을 끌고 차로 다시 돌아왔다.
개장수는 밥 먹으러 갔는지 한참동안 처절한 울음소리는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외가에서 복날에 집에서 키우던 개를 먹은 이야기를 종종하셨다. 충정도 산골이 고향인 어머니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던 그 시절 단백질 보충은 복날 개를 잡아 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는 개를 먹는 것은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했다.
하양이(몰티즈 종)가 우리 집에 왔다. 막내딸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조르는 것을 대학 4학년 졸업 전에 소원을 들어 주었다. 졸업 전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강아지가 곁에 있으면 불면증이 치료 될까 해서였다. 동물에 대해 애정도, 관심도 별로 없던 나는 이 조그만 것이 나의 생각을 바꾸어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려서부터 나는 벌레는 물론 고양이, 개 모두 멀리했다. 그런데 동물도 겁이 많고, 사람과 같이 애정을 갈구하고, 감정이 있고, 고통에 약하다는 것을 하양이를 키우며 알게 되었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차츰 생기며 TV프로그램도 동물이 나오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서점에 가면 《코끼리는 아프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이런 제목의 책에 더 눈길이 갔다.
우리 집은 아파트지만 1층이라 조그마한 마당이 딸려있다. 길고양이들이 마당에 들어와 나무 밑에서 쉬고 있거나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의자위에서 졸고 있으면 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예 우리 집 마당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해 그것들을 쫒아내곤 했다. 보통은 인기척을 내면 도망가 버리지만 그렇지 않은 고양이도 있어 긴 막대기를 들고 기어이 쫒아버리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겨울 눈이 오거나 너무 추워 세상이 꽁꽁 얼어버린 그런 날이면 '고양이들이 먹을 게 없겠네'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양이는 이 세상은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는 진리를 나에게 가르쳐 준 고마운 존재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귀히 여겼던 두 사람이 생각난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한 이상적인 인간형을 그리고 있다.
“하루는 한 마리의 개미를 밟지 않으려다가 발을 삔 일도 있었다.”
미리엘 주교 이야기다. 또 한사람, 슈바이처가 한 말이다.
“인간이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을 돕기 위해 그에게 가해지는 제한을 받아들일 때, 살아있는 어떤 것을 해치지 않기 위해 길을 돌아 갈 때 그 인간은 참으로 윤리적이다. …나무로부터 잎사귀를 훑지 않으며, 꽃을 꺾지 않으며, 걸을 때 벌레를 밟을까봐 조심한다.”
먼 아프리카 땅, 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을만한 귀를 가진 사람답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보았던 강아지는 안면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는 잊어 버렸다. 딸이 보았던 그 슬픈 눈을 나는 보지 않았기에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비명소리가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울고 있었는데 정말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까?'
외면하거나, 행동하거나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절규하는 생명을 보고도 외면했던 일은 슈바이처의 말을 빌리면 참으로 비윤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