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스를 마주하다.
그렇게 촬영을 접고 나서 마음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숨어버렸다는 패배감과 실패했다는 좌절감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스스로 위안을 삼고 무대에서 바쁘게 연기를 했지만 그저 도피처일 뿐이라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TV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말의 대부분이
이겨내라 할 수 있다. 힘든 게 정상이다. 도전을 멈추지 마라
하지만 그런 말들은 오히려 나를 더 구석으로 몰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다가 무대에서조차 불안감이 나올 때쯤에 우연히 연극인복지재단에서 지원해 준다는 연극인 심리치료 공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알아보니 연초에 이미 사업이 마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만 이런 걸로 힘든 게 아니구나 많은 배우들이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늘 나를 우선적으로 캐스팅해주었던 디렉터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30~40년 활동한 연극배우 선생님들도 촬영할 때 긴 대사가 부담 돼서 거절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때는 안 들렸던 말이 10년 정도 지난 뒤 들리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만큼 나와 같은 이유로 힘들어하는 배우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9개월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서 연초가 되어 공고문이 올라오자마자 신청했다.
특히 작년보다 좋아진 점이 있었다.
작년엔 지원해 주는 센터가 다 서울에 있었는데 이번엔 내가 사는 원주에서도 2~3군데 정도가 있었다.
12회를 지원해 주는 것이기에 매번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 부담되었었는데 너무 다행이었다.
심리치료라기보다 상담에 가까웠는데 처음 방문한 날 2시간의 대화를 통해 나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굳이 진단명을 내린다고 하면 입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골프에서 생겨난 용어라고 하는데 내용을 이렇다.
평생 골프만 쳐온 프로선수들이 시합에 나가서 공을 치려는 순간순간 문득 공을 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빗맞거나 엉뚱하게 스윙할 거 같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면 그 순간부터 그 선수는 공을 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입스라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나서 맞아 내가 겪은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대사가 생각 안 나면 어쩌지? 그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결과부터 말하자면 세상에 검증된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그건 부딪히는 거라고.. 부딪히다 보면 자연스레 극복이 된다고..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방법이었지만 두려움에 감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던 날들이었다.
하지만 치료도 받고 시간도 지나니 차차 해볼 만한 용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몇몇 촬영을 하기도 했고 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또 그러면 어쩌나 하는 걱정들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는듯싶지만 그래도 한걸음 내디뎠다는 것에 대해 고무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스스로 교훈을 얻었고 나름 극복하려는 방법도 생겼다.
그 방법들을 열심히 써먹으면서 몇 걸음 더 나아가려 한다.
배우를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나아가야 하니까..
아직 난 배우가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