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민길 Day 1: 난 시작부터 촌스러웠다
아빠는 우리보다 몇 달 먼저 미리 영국에 가있는 상태였다. 김포 공항에서 영국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매 순간을 카운트다운 하며 아빠 볼 순간만 기다렸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빠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어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난 몇 달간 잘 기다려왔으면서도 '영국 도착하면'이라는 확실한 데드라인이 생겼더니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날 놀리기라도 하듯.
아빠를 채용한 영국 회사의 빵빵한 지원 덕분에 엄마와 동생과 난 생전 처음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보게 됐다. 덕분에 10시간이 넘는 영국행 비행기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넓은 좌석에 편하게 앉아 있으니 예쁜 스튜어디어스 언니들이 비행기 통로를 왔다 갔다 하며 따듯한 물수건과 간식류를 전해주는 것 자체가 12살 된 초등학생에겐 너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겐 비행기라곤 서울에서 부산 갈 때 한 시간 걸리는 비행기를 딱 한번 타 본 게 전부였다. 12년 평생(?) 장거리 여행을 해본 건 매년 명절마다 분당에서 할머니가 계신 부산까지 무궁화행 기차를 타고 간 게 전부였다. 바글바글한 기차 안에 앉아 있다가 기차가 역에 서는 중간 타임을 이용해 엄마가 후딱 바깥에서 오뎅을 사 오면 같이 맛있게 먹던 경험이 전부였다.
그런 수수한 여행 경험만 한 12살짜리 초등학생에겐, 좌석에 있는 콜버튼만 누르기만 하면 곱게 화장을 한 상냥한 언니들이 다가와 내가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준다는 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도 하늘 위에서 말이다!
나와 두 살 어린 동생은 대한항공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우와! 우와!'를 연발해 대며 이것저것 만져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기내식 메뉴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좌석을 뒤로 젖혔다 올렸다를 반복하며 부산을 떨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스튜어디어스 언니 한 명이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곤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짓는 모습을 눈 한켠으로 보았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1998년 도라 아직 비행기엔 마음대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는 개인 스크린이 없었고 대신 책을 요청해 빌려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책을 좋아해 스튜어디어스 언니를 따라 뒤쪽에 구비된 책을 보러 갔는데, 구비된 책은 10권 정도밖에 되지 않아 조금 실망했었다. 총 구비된 책이 10권이고, 그중 어린아이가 볼 수 있는 책은 1-2권이 다였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너무나 쾌적했고, 모든 순간이 새로웠다. 스튜어디스 언니가 선택 가능한 음료를 나열할 때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었다. '애플', '오렌지', '토마토'까지는 알겠는데 '과봐 주스'에서 자꾸 걸렸다.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이라 잘 못 들은 줄 알고 몇 번이나 '네? 네?'를 반복했다. 아무리 다시 말해달라고 요청해도 돌아오는 단어는 '과봐'였다. 이름도 괴상한 '과봐'. 애플이나 오렌지 주스처럼 노란색이라 예상했는데, 컵에 담겨 돌아온 주스는 핑크색이라 순간 당황했었다.
간식으로 나온 베이비벨 치즈는 겉을 감싸고 있는 왁스 코팅을 벗긴 후 먹어야 하는 걸 모르고 왁스채 베어 물었다가 텁텁한 양초 맛에 다시 뱉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본 스튜어디어스 언니는 내게로 와 왁스 벗기는 법을 알려주었다. 조그마한 간식을 입에 넣는 것도 제대로 못했다는 게 부끄러워 얼굴이 닳아 올랐다.
이렇게 나의 영국 이민길은 처음부터 매우 촌스러웠다. 영국 슈퍼에 가면 왁스에 싸인 베이벨 치즈를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볼 때마다 1998년 2월 영국길에 오르던 어릴 때 나의 모습이 생각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