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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의 시선이 낳은 훈훈함

가르치는 입장과 배우는 입장을 동시에 경험하다.

by 글쓰는 스칼렛


오늘 나름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잠이 안 와서 큰일이다. 지금은 자정을 넘겼고 첫째의 현장학습으로 김밥을 싸야 해서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날 예정인데 몸도, 정신도 말똥 하다. 좋아진 체력을 탓해야 하는 웃픈 상황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비상약으로 받아놓은 항불안제 약을 수면제 대용으로 먹어야 하나 갈등도 된다.


딱 후딱 글만 쓰고 자려고 한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오전에 강사로 일하는 학교에서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리코더 수업을 하는데 발표용으로 반주가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여러 군데를 검색해 봐도 속도나 길이, 곡목에서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다운을 받기 위해 내키지 않는 선곡으로 곡명을 바꿔야 하는지, 아예 내가 반주를 해서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다가 후자로 선택했다. 다른 악기 선생님들은 전자 반주를 다운로드하여 쓸 텐데 직접 녹음한 피아노 반주가 어색하게 들릴지, 이질감을 가질지 학생들과 담임 선생님들의 표정을 관찰해야 했다.

그런데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아이들도 내가 직접 녹음한 거라 하니 얼굴 표정이 달라졌고, 담임 선생님들께서도 색다른 녹음과 아이들의 연주를 돋보이게 하는 반주에 흡족한 감정을 드러내셨다. 별거 아닌데 성취감이 들고 기뻤다.


'그래, 원래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생각은 확장을 더해 뻗어갔다. 잘하는 아이들이 많이 포진된 B반에서는 난이도 높은 곡을 시도하고 싶어졌다. 퀄리티 높은 도전을 해서 잊지 못할 경험을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난 고무되었고 흥분은 오전 내내 들뜨게 만들었다.

오전 학교수업을 마친 뒤, 오후에는 학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다시 대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이제 슬슬 중간고사를 대비해서 수업 내용은 냉랭해졌다. 웃으며 화기애애했던 오리엔테이션 분위기가 아니라' 내 수업을 들었으면 이 정도는 알고 가야지' 하는 교수님들의 저마다의 자존심과 긍지가 난해한 용어와 흐름의 설명,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실려졌다. 처음 이 과정을 들으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 만만하게 봤었다. 하지만 전혀 색다른 용어와 가속도가 붙는 전개에 매 순간 당혹스러움이 나를 툭툭 건드리고, 쏘고, 꿀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기출문제집과 기본서를 사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배우는 과목들이 실제 시험에서는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였다. 현실에서는 이미 발을 들여놓은 세상인데 나는 관찰적 제 3자가 되어 남의 집 앞마당 구경하듯이 슬쩍슬쩍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알아야 하고 공부할 게 많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전혀 다른 의구심도 들었다.


'과연 이렇게 광범위하고 가르칠 게 많은 영역을 교수님들은 짧은 시간에 어떻게 가르치실까?'

'요약을 하는 것도 문제고,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고 있는 학생들을 이해시키고 필요한 것을 숙지하게 하는 것도 일이겠다.'


난 정말 궁금했었다. 그러니 오늘 열변을 토하시는 교수님이 조금은 더 이해되고 고맙게 생각되었다. 결국은 이 과정을 수료하는 학생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고 제대로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셨을 것이다. 합격자가 배출되고 사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니셨을까?

아. 나도 꼭 그랬으면 좋겠다. 자리를 잡고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었을 때 정말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상태 말이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면, 반대의 상황에 놓여보면, 수용할 수 있는 내면의 아량은 훨씬 넓어진다. 해야 하는 임무와 과제의 압박감도 있지만 신경 써주시는 마음에 감사함이 샘물이 되어 흘러들어온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 삶에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참 많다. 그분들과의 추억, 감사함, 행복들...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따뜻이 데워진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하는 일들도, 헤쳐나가야 할 난관도, 그분들 앞에서 더 나은 나로 설 수 있기 위해 맞설 용기가 솟아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또 청개구리가 되어 있다. 복습하며 공부하지 않고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 후딱 김밥을 싸고 오전에는 꼭 공부를 하리라고 다짐해 본다. 똘망한 눈으로 수업을 듣고 사회에서 자리 잘 잡은 학생이 아니라 유일하게 제때 수료하지 못한 과락자로 날 기억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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