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에 미친 남자, 장편소설, 돈
강혜영은 ㈜동인건설 명함을 주었다. 미희도 ㈜선우 명함을 주었다. 건설사와 부동산회사는 한솥밥 먹는 관계라면서 신입생 환영회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직장인 야간대학 경영학과에서 만난 둘은 자매처럼 스스럼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여자는 몸이 경쟁력이거든, 언니. 언니도 몸 관리 좀 해, 나이 먹을수록 더 신경 써야 해”
“나도 너처럼 해볼까? 가슴도 키우고, 얼굴도 손대고? 그런데 난 무서워”
혜영이는 인천이 고향이다. 전문대 졸업하고 백화점에서 판매사원으로 근무하다가, 독립하고 싶어 이천에 있는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했었다. 골프장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지냈다. 골프장에 오는 사람 중에 소위 ‘돈 있는 사람’들, 별난 사람들이 아닌데 부자로 사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몸이 재산이라는 말을 들었어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캐디 생활하면서 그 말이 주는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돈이 모이면 압구정동 피부과를 찾았다. 말하는 법, 몸짓, 옷 입는 법, 화장 기술을 익혔다. 골프도 틈틈이 배웠다. 남자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수록 청순하고 수줍어하는 여자의 향기를 호리낭창한 몸에 가득 담았다. 돈 있는 남자들이 발정 난 개처럼 구애하기 시작하였다. 쩔쩔매며 안달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보았다. 남자들이 자기 목에 자기 손으로 목줄을 걸었다. 절절히 애처로워 보이는 여자 손에 줄 끝을 건네준다. 여자 손에 형형색색 크고 작은 공깃돌이 놓였다. 여자는 공기놀이하듯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내는 세상을 배웠다. 보여지는 세상은 사랑이었지만, 의지를 갖고 보는 세상이 다른 거였다. 숨 쉬는 자의 권리이면서 잔인한 운명이다.
LP를 틀어주는 BAR이다. 두 여자가 가는 단골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갑게 웃는 여사장이 도로의 차들이 보이는 테라스로 자리를 안내한다. 한쪽 벽에는 LP가 가득하다. 먼지가 자욱하게 쌓였을 같은 모습이 80년대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칵테일 한 모금을 마시면서 혜영이가 묻는다.
“언니,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아, 결혼은 하지 않았으니 연애는 어떻게 하나 싶어?”
“뭐가 궁금한데?”
미희가 입을 삐죽 내밀면서 장난스럽게 웃는다.
“난 전에 말했듯이 캐디 하면서 첫 남자를 만났어. 마흔 살이 넘는 아저씨였지, 일부러 남자를 안 만난 것도 아닌데···, 나도 한때는 순결을 지킬 정도로 순진했었지, 내가 처음이듯, 남자도 처음이기를 바랬는데···, 서로가 지켜온 선물을 교환하듯···, 그런데 동정을 지킨 그런 남자 없더라, 세상이 그런 것을 알고···, 그렇게 어쩌다가 나이 먹은 아저씨가 내 첫 남자가 되었지,”
“그래 알아, 전에 잠깐 이야기했어,”
“아저씨가 날 엄청나게 쫓아다녔지. 그 노력에 진심이 보였어, 그 아저씨와 처음으로 관계를 맺었는데 아파서 죽는 줄 알았어, 부끄럽고 창피하고, 그런데 침대 시트에 붉게 물든 처녀의 흔적을 보고 그 아저씨가 부들부들 떨면서 울먹이더라. 남자로 살면서 처음이라고, 자기가 책임질 터이니, 캐디 그만두라고 하더라. 천호동에 분양하던 오피스텔을 내 명의로 사주면서 날 사랑한다고 자기 맘을 받아달라고 하더라. 애가 둘 있는 사람인데 년 매출이 300억 원 정도 되는 기계 장비 사업을 하더라고, 한 달에 400만 원씩 용도도 받았지, 차도 한 대 사줬어. 어쨌든 나는 캐디 그만두고 골프 치러 다니고, 피부 관리하러 다니고, 영어 학원 다녔어. 그러다가 그만 임신이 됐지.”
“어머, 진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미희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굴이 사색···, 당황해서 말도 더듬어’
아저씨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지, 어쨌든 낙태는 불법이잖아. 그때 바람나서 집 나간 엄마가 생각나더라, 웃기더라고.’
그 뒤로 관계는 끝났지. 참, 그 아저씨는 성남에 있는 무슨 교회의 장로였어. 헤어지면서 위자료 달라고 그랬더니 1억 원 통장으로 입금해주더라.’
그런 거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돈 있는 사람이 젊은 여자, 첩 하나 두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날 사랑은 했을까?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해’
그 사람하고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이 사준 오피스텔 팔았지, 돈이 있으니 좋더라. 그리고는 청담동에 있는 스포츠 센터 등록하고 하루에 4~5시간을 보냈어,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같은 다양한 색깔의 사랑을 해봤지. 그러다가 우리 사장을 만났어.”
“사별하신 분이라면서?”
“응, 너무 내 이야기만 했나? 어쨌든 난, 여자는 몸을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해. 남자들이 원하는 사랑은 여자의 몸이거든,”
“술 안 취했지? 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
“언니, 사랑하지, 난 연속극처럼 울고 매달리고 징징 짜고, 뭐 그러지는 않아. 사랑을 핑계로 누군가가 내 인생을 독점하고자 한다면 그게 사랑일까? 내 인생 포기하는 거잖아? 난 그게 싫어, 눈먼 사랑을···, 난 하지 않아. 사랑을 재밌게, 사랑을 즐겁게, 사랑은 노는 거야, 사랑하는데 괴롭다고···, 그거는 사랑이 아니야, 인생도 그렇고···”
“노는 게 사랑이라고?”
“나 좋아한다고 하는 남자, 나도 사랑하지, 나 싫다고 가는 남자, 잡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가 싫은데 나한테 매달리는 것도 싫고, 여자는 꽃이라고 하잖아, 남자는 나비라고 하고···, 나비는···, 한 꽃만 찾지 않아, 꽃도 한 나비만 기다리지 않아, 사람들은 이걸 모르더라, 언니는 사랑하는 남자 있어? 형부 이야기 좀 해봐”
미희는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한다. 이야기를 듣는 혜영이의 반쯤 벌어진 입에 놀라움이 가득하다.
“그 사람이 나 때문에, 혹은 내 사랑 때문에, 힘들어한다면 그렇게 만든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은 나에게 사랑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
“아니지, 언니.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해야지”
“이미 사랑하고 있는데 증명이 필요한 것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언니, 그게 여자들 심리”
“그래, 이해는 해. 내가 보기에는 남자 여자 차이가 없어. 사랑을 말로 증명할 수 있을까? 말로 증명하지 못하니, 돈으로 하라고 하지, 돈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인데, 돈 주면서 사랑한다고 한다. 돈의 액수가 크면, 사랑도 큰 건가? 난 그게 더 웃겨 보여.”
“언니는 내 이야기 듣고, 나한테 실망했겠네”
“아니, 혜영아, 난 너의 이야기 존중하고, 널 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 그냥 생각이 다른 거지, 넌 너만의 사랑을 하는 거고···, 난 나만의 사랑을 하는 거고···”
미희가 혜영의 손을 한번 잡아주었다가 뗀다. 인간이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인연이 있다. 당연한 것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실내에 있는 테이블에서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 두 명은 보드카를 마시고 있고, 작달막한 여자 한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남자 둘은 친구처럼 보였고, 여자는 혼자 BAR에 온 듯, 홀로 술을 마신다. 여사장이 왔다 갔다하다가 여자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인다. 다소 마른 남자 한 명이 이쪽을 흘끗 보다가 시선을 돌린다.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가끔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 그 사람과 같이 있지 않을 때도···, 난 좋아. 같은 공간은 아니지만···, 같은 시간에 있는 거잖아. 그럼 몸이 따로 있어도 그 사람과 나는 같이 있는 거야”
“언니, 너무 슬프다.”
“슬퍼? 음···, 그런 의미가 아닌데,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가정이 있던 사람이었어. 나 만나기 전에 다른 여자가 그 남자 마음에 있었어, 그래서 결혼 했겠지, 그 여자가 나보다 먼저 그 남자의 사랑을 받았어, 비록 지금은 그게 아닐지라도, 그 사람 몸과 마음을 내가 독점할 수는 없어, 그건 욕심이지. 너는 사랑을 핑계로 너를 독점하고자 한다면, 그 사랑을 버리겠다고 했지?”
“응”
“그래 맞아, 그게 싫으면 애초부터 사랑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지. 원래 다른 여자가 있는 남자를···, 사랑한 거는 나잖아.”
“어렵다, 언니. 언니하고 나하고 다른 것 같은데, 비슷해, 많이.”
“그래 사랑이든 뭐든···, 시작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욕심일 뿐이야. 혜영아, 너는 어떤지 모르지만, 너와 나의 차이는 하나밖에 없어.”
앞에 있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다. 혜영이도 마신다.
“언니, 가슴이 너무 아리다. 너무 슬퍼. 슬픈 사랑이다.”
“사랑하면서 자꾸 사랑을 의식하면 사랑이 왜곡되는 것 같아. 사랑한다는 거를 잊어야 사랑이 되는 거야”
영혼의 깊고 깊은 밑바닥 한 귀퉁이에 숨어 있는 사랑이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사랑을 여자는 하고 있다.
둘은 BAR에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감미롭다. 밤이 길어질수록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고독이 살찌는 시간이다.
편견에 빠진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같지만, 사랑에 대한 무게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두 여자는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격을 받았고, 서로에게 아련한 슬픔을 느낀다. 미희가 노래를 하나 신청한다. Melanie Safka의 ‘The Saddest Thing’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혜영이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미희는 본다. 둘의 눈에는 그늘진 눈물이 고여 있다, 그리고 웃는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은 몇 가지일까? 있다면 하나일 것이다. 지금 하는 사랑만이 유일한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랑은 잔인한 모순덩어리가 되어 삶의 먼지로 변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