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에 미친 남자, 장편소설, 돈
2부
2010년 -2015년
벌써 송년회이다.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고 돈 버는 재미에 5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남자는 인맥을 만들고자 부동산학 박사과정에 진학하였고, 내년에 논문 학기이다. 데이터는 부동산써브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서 5만 건의 상가거래 자료를 받았다. 이것을 통해서 상가투자의 특이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목에 두른 붉은 보라색의 머플러를 풀면서 2층으로 올라간다. 안쪽에 미희가 희수 옆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두 여자 앞에는 검은 카디건 걸친 형기가 앉아있다. 몇몇이 태현을 보더니, 손짓으로 부른다. 태현이는 웅성웅성 시끄러운 술자리를 두리번거린다. 하얀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어 올려 의젓하게 앉아 술 마시는 호영이 앞자리에 끼어 앉는다. 구레나룻의 흔적이 얼굴에 보이는 호영이는 현직 검사이다. 눈썹이 짙고, 덩치가 커서 국민학교 때 마징가라는 별명이 있었다. 태현이와 호영이는 5학년과 6학년 같은 반이었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성적순으로 앞자리부터 앉혔다. 1등과 2등을 둘이 번갈아 하는 바람에 1년 내내 짝꿍으로 지냈다. 호영이가 술을 따라준다.
“세금으로 밥 먹고 사는 공무원이 야근하면서 일해야지 이렇게 나와서 술 먹으면 돼?”
한 마디 던지고 술잔에 술을 채운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마신다. 술 따르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또 마신다. 상대의 빈 소주잔에 술을 또 따른다.
“너하고 나하고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말자. 애들 듣는다.”
“알았다. 다음에 골프나 한번 치자. 조만간 연락할게”
“그래 알았다.”
“호영아, 재 알아? 미희 앞에 앉아있는 놈. 주먹이란다. 눈초리가 차가운 인상이기는 하지만, 보기에는 얌전하고 여리여리해 보이는데 행동대장이란다. 지지난번에 처음 봤다. 강남에서 주먹으로 놀았단다. 암튼 난 처음 보는데 국민학교 때, 싸움을 잘했다고 하더라. 난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난, 알지. 내 직업이 뭐니?”
“그렇지, 검사···”
“우리 학교 다닐 때, 한 반에 80명씩 15반이었잖아.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형기 손 씻었어, 그쪽 세계에서는 꽤 유명했지, 한가락 한 것은 맞아. 지금 은퇴했어, 그렇게 알고 있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떠들면서 술자리가 이어진다. 태현이는 서너 번 자리를 옮기면서 친구들 술잔에 술 따라주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덧 나란히 앉아있는 미희와 희수에게 다가간다. 희수가 그것을 보고 ‘너, 서방님 오신다.’ 미희에게 귓속말한다. 미희가 눈을 흘긴다. 두 여자 사이에 비집고 앉는다. 희수가 웃으면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소주병을 들어 술 따라준다.
“나, 태현이야, 형기라고 했지. 내가 술 한 잔 따르마, 지지난번에 봤지? 그때는 내가 일이 있어서 얼굴만 잠깐 비치고 가는 바람에 말도 못 섞었네. 국민학교 때 몇 반이었어, 한 번도 같은 반 된 적이 없나 봐”
“6학년 때 너 1반, 난 2반, 맨 꼭대기 층에 교실이 2개 밖에 없었잖아. 그래서 너 알아, 너 1반 반장이었잖아”
“아, 그래, 그런 걸 기억해주고, 반갑다.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아는구나. 이거 내가 불리한데, 술 먹자. 자주 보자, 자주 나와라. 그리고 여기 미희 알지? 우리 회사 상무님이야. 내가 4년 전에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면서 스카웃 했거든”
“우리 셋이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미희가 태현에게 말한다. 미희 말에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보이고는 형기가 술을 묵묵히 마시고 내려놓는다.
“어릴 적 친구들이라서 재밌어. 서울에서 돈 없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잖아. 윗마을 달동네 아니면 아랫동네 시궁창 골목, 그런 친구들이라서 그런 건지, 가슴에 품은 한들도 한두 개씩 있어. 물론 형편 좋았던 놈들도 있지만, 다들 막상막하지,”
아랫동네에 살던 형기는 장마철이면 시궁창 똥물이 집안 하수구로 밀고 들어와서 바가지로 퍼내었던 일이 생각났다. 정말 지질이 궁상떠는 그런 동네였다.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래서 그런가, 밖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끼리 모이면 다들 착해, 열심히들 살고, 힘든 놈도 있지만 서로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지. 우리 나이가 지금 그럴 때잖아,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 불혹, 불혹은 다른 말로 유혹이다. 불혹의 나이를 살아가는 사람들, 유혹받기 쉬운 나이, 갈팡질팡하는 40대야.”
형기는 웃음기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태현이가 하는 말을 듣는다. 태현이 술잔을 들자 같이 잔을 들고 마신다.
속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친구라고 태현이는 생각한다. 빈 술잔에 서로 소주를 따라준다.
“자기 인생에 있어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 ‘하나’, 그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몰라, 뒤돌아보니 한심하고, 앞을 보니 더 한심한 나이이지, 인생의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갈팡질팡 흔들흔들, 너도 불혹, 나도 불혹, 우리 모두 불혹이 아닌 유혹에 살고 있어”
‘불혹이 유혹이라’ 형기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한다.
“남들이 모르는 눈물 흘리면서 사는 나이야. 지금 다들 그렇게 살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 알지? 경마장 가면 ‘마칠기삼(馬七騎三)’이라고 한다.
인생이 그냥저냥 잘 풀렸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거니, ‘운칠기삼(運七技三)’이지. 세상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지, 밑바닥 인생으로 추락하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건방 떨 필요도 없고, 기죽을 일도 없어. 아니 마칠기삼(馬七騎三)인가?”
형기는 태현이가 불혹을 이야기할 때, 복잡한 느낌을 받았다. 건달 생활을 끝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시간이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는 듯했다. 이유 없는 불안함이 매일 밤 찾아왔다. 방향 잃은 고장 난 나침판이었다. 하루하루가 유혹이고 갈등이었다.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보고 있는 듯, 앞에 앉은 친구가 이야기한다. 불혹이 유혹이라고 한 말에 100% 공감되었다. 말을 잘하는 친구로 보였다. 묘한 호기심이 생기는 친구였다.
지난번 송년회에서 보았고 3개월 만이다. 학동사거리에 있는 고급 일식집이다. 형기가 제일 먼저 도착하였다. 일본 전통 실내정원이 있는 중앙 홀을 지나 미색의 은은한 조명이 어울리는 통로를 따라 독립된 룸으로 안내해준다.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형기 뒷모습이 보인다. 주방에서 나오던 지배인이 경직되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팔각 문양이 있는 창호 문을 열자 일본 귀족의 거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족자들과 꽃꽂이, 다다미가 눈에 들어온다. 언뜻 보면 몽환적인 그런 느낌도 있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잠시 뒤에 들어온 지배인은 허리를 90도로 굽혀 형기에게 인사한다. 형기의 눈빛이 변한다. 이야기를 나눈다. 지배인이 인사하고 나가는 순간에 호영이가 들어오면서, 나가는 지배인을 흘끗 보고는 형기를 향해 웃는다.
“여기 오는데 뒷문으로 나왔잖아. 앞으로 나오면 나 기다리는 놈들 많아. S그룹, D그룹에서 나온 놈들이 술 먹자고 정문에 쫙 깔려있어. 그놈들 눈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것도 피곤해. 설마 여기까지 미행하지는 않았겠지”
“검사들도 힘들게 사네”
태현이가 미희와 같이 들어온다. 형기가 일어나 호영이 옆으로 옮겨 앉는다. 미희와 태현이가 같이 앉는다. 숙성회를 중심으로 최고급 일식 요리가 테이블에 펼쳐진다. 발렌타인 30년산을 지배인이 가지고 온다.
“폭탄주로 먹어야 하는 것 아냐?”
“야! 아깝지, 이 좋은 술을 맥주에 타서 먹으면, 그냥 먹어”
“좋지, 자 먹자고,”
술이 돌고 돈다. 형기는 다소 조심스럽다. 한 놈은 검사이고, 한 놈은 부동산 사업하는 놈이다. 뜬금없이 태현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 검사하고 같이 술 먹자면서 시간 낼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호영아, 너 청담동에서 술 먹으면서 나한테 한 말 기억하냐?”
“뭐? 어떤 이야기”
“나한테 돈 많이 벌라고 했잖아. 너 유혹 안 받고 살게 해 달라면서”
“아, 그날, 기억나지,”
2년 전에 호영이가 태현에게 술 한잔 사달라고 하였고, 순댓국집에서 만나, 오소리감투에 소주를 먹었다.
“유혹받으면 검사 옷 벗어야 하는 것 알지? 유혹 안 받고 위로 올라가 고위직으로 살아보게, 너 돈 많이 벌어···, 나 좀 도와줘라”
태현이가 상대방 잔에 술 따라주고, 자기 술잔에도 술을 따른다. 오소리감투 한 점을 새우젓 찍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어디까지 가고 싶은데”
멋쩍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생기고,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노려본다. 잔잔한 눈빛이 친구라는 이유로 경계선 없이 서로의 생각을 읽는다.
“그냥 사는 게 재미없어, 꼭대기에 올라가 재미나게 살고 싶다.”
혼잣말처럼 툭 뱉고 술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침묵이 술잔에 놓여있다. 무언의 대화가 서로의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욕망과 희망은 같은 것이다.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에 있다. 현실을 관대하고 너그럽게 바라볼 때, 욕망인지 희망인지 모르는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권력의 힘으로 놀고 싶다는 호영의 욕망을 태현이는 보았다. 두 남자는 청담동으로 자리를 옮겨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확실한 미래를 이야기하였다. 욕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시간이었다.
‘돈 많이 벌어서 유혹 안 받고 살게 해 달라’고 박 검사가 이야기했다는 말을 듣고 ‘얘네들 뭐지’하는 싸함이 엄습했다. 오늘 술자리가 그냥 술자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형기야, 너는 어떻게 지내냐? 친구들 말로는 너 이혼해서 혼자 딸아이 키운다면서”
“아닌데, 나 이혼 안 했어. 혼자 딸아이 키우는 것은 맞아. 아이 엄마가 대장암으로 죽었지”
형기가 소리 없이 웃는다. 다들 말없이 형기를 쳐다본다.
암으로 죽어가면서 ‘딸 잘 키워라’ ‘건달 생활 그만하라’ 잔소리만 하다 죽은 마누라가 생각난다. 첫사랑 여자였다. 형기는 친구들의 무거운 시선을 느끼면서 말을 이어서 한다.
“굳이 말 옮기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 건데, 이혼했다고 소문이 나더라.”
네 사람은 이상한 침묵 속으로 숨기보다는, 술잔에 술을 따르고 마시고, 떠들기로 한다. 어릴 적 그 시절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여과지 없이 말을 뱉어낸다. 어깨가 뒤로 제겨지듯 웃다 보면 눈물이 나온다. 말싸움하듯 떠들고, 아귀처럼 호들갑스럽게 먹고 마시었다.
형기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맘 편하게 술 먹어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늘 긴장하면서 살았었고, 집에 오면 집사람과 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었다. 오늘은 그런 감정에서 벗어났다. 어릴 적 미희가 고무줄놀이하면, 고무줄 끊고 잽싸게 뛰어 도망가는 코흘리개 어린 형기였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영이는 알고 있는데, 형기야, 미희하고 나하고 둘이 사귀고 있어, 몰랐지?”
“아니 눈치채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까 자리 비켜준 건데, 너희 둘이 앉으라고”
“역시 눈치 빠르네, 어떻게 알았어, 얘네 둘이 사귀는지, 모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호영이가 술 마시고 빈 술잔을 테이블에 놓으면서 말을 계속한다.
“미희가 아깝지, 미희 얘도, 소녀 가장하면서 참 힘들게 살아온 친구다. 저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데, 태현아 너 잘해라, 미희 힘들게 하면 내 손에 죽는다. 미희 오라버니가 나라는 것만 알고 있어라”
“야, 됐거든, 사주에 난 결혼할 운이 없단다. 자, 남의 연애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술 드세요.”
“형기야, 나하고 일하자”
태현이가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네 사람은 느낀다. 있는 듯 없는 듯 얼떨떨한 웃음이 형기에게 순간적으로 왔다 간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
“부동산 사업이라고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춤출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 생겨, 밥상 차릴 능력도 없으면서 밥상에 숟가락 얻고 같이 먹자고 덤비는 놈들도 있고, 암튼 깨끗한 손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쯤은 너도 알 것이고···, 인생의 반환점을 돌면서, 한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는 그 무엇을 잡았는데···, 저놈은 권력으로, 나는 돈으로···”
다들 조용하게 술잔을 들고 마신다. 빈 잔이 보이면 미희가 눈치껏 술을 따라준다.
형기가 옆에 앉은 호영이 얼굴을 본다. 눈이 마주친다. 호영이가 한쪽 눈을 윙크하듯 찡그리며 보일 듯 말 듯, 그런 웃음을 보인다. 형기는 두 놈이 뭔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림 도구는 권력과 돈의 힘이다. 거기에 주먹의 힘을 가지고 밥상머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오늘 술자리 이유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는 다른 인연이 오고 있다. 아니다.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 거고, 사는 것이 목숨 걸고 사는 인생이라면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인연이다. 대충 사는 인생이라 다른 인연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대학 4학년 때 고시 합격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검사 된 아들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고시 합격 소리 듣고 돌아가시었지”
다들 호영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태현이는 술 한 잔을 마신다.
“형기야, 내가 검사 노릇 하면서 뭐 배웠는지 아니?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있다는 거다.”
태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호영이가 본다.
“감성과 이성 둘을 뒤섞는 것이 정치 기술이야.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이 증언하지만, 단 하나도 확실한 증거는 없어, 미스터리 추적과 같은 방송 만들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가짜인 것을 조금만 공부하면 다 아는 거야”
미희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호영이 말에 귀 기울인다.
“죽으면 사후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알 수 없잖아. 확인할 수 없으니 믿는 거지. 그게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야, 정치도 마찬가지지. 정의, 민주, 평화, 인권 등의 단어에··· 힘을 실어주는 거야’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선동이고, 언론 플레이이고, 정치 마케팅이야. 일단 돌을 하나 연못에 던지면···, 파문이 퍼져나가지,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패거리가 만들어져, 웃긴 것은 그 무리가 알아서 뭉치고 진화하고···, 자기들만의 믿음을 만들어 충성한다는 거지. 그들만의 권위가 생기는 거지, 사이비 종교가 생기는 이유이고, 정치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야.’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국민을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는 것이 정치이고 권력이거든. 인류 역사를 보면 모든 전쟁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돈이 목적이었지. 종교도 그래, 종교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살육, 강간, 폭력은 인류 역사에 너무나 많아. 마녀사냥은 힘없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살인 게임이야. 실제는 종교 지도자들이 돈을 갈취할 목적이었고, 아프리카 노예사냥들도 마찬가지야. 무엇이든 권력의 숨어 있는 목적은 돈이었어.”
“네 놈은 나하고 생각이 너무 비슷해”
태현이가 웃으면서 중얼거리듯 말한다.
“누가 그러더라, 너희 둘이 연애하는 줄 알았다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거의 매일 붙어 다녔다고 하던데”
미희가 새초롬하게 말을 던진다.
“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그래서 형기야, 내가 이놈에게 돈을 벌라고 하는 거야. 그게 이유야. 태현이 너, 무슨 말인지 알지?”
“알지, 그래서 내가 돈 번다고 하잖아”
“그래,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 모인 거기도 하고”
비워진 술잔에 서로 술을 따라준다. 형기는 30대 중반이 되면서 알았다. 배운 놈들은 나랏돈을 훔치는 큰 도둑이고, 자기 같은 쌈꾼은 푼돈 뜯어내는 작은 도둑이었다. 그 차이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깡패라고 하여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두 친구는 작당질하고 있었다. 두 놈은 인생을 걸었고, 자기도 걸어야 한다.
“형기야, 같이 일하자”
미희가 형기를 지긋이 보며 말을 건넨다.
형기는 미희가 자기를 안쓰럽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술자리 끝날 때, 이따가 헤어질 때까지 고민해보자, 오늘 술자리 끝나면서 이야기해줄게, 그때까지만 생각해보자.”
형기는 큰 도둑 흉내를 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두 사람처럼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항할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 친구가 그린 그림에 들어가 그림 속의 인물로 사는 것이다.
대리를 불렀다. 차는 옥수역 인근의 아파트로 들어간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는다.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8개월 전에 여자 이름으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였다. 거실에는 남자와 여자 사진이 걸려있다. 여자가 창밖을 보며 강변을 달리는 차량의 불빛을 본다. 거실 창에 비친 밤하늘에 실루엣이 보인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가는 모습이다. 아침이다. 여자가 고개를 돌리면서 눈을 뜬다. 서로의 얼굴을 본다.
“잘 잤어?, 아침 뭐 먹을까? 뭐 먹고 싶어?”
부드러운 여자의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태현이는 두 집 살림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희는 그것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