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불혹

<불혹은 유혹>

by 경국현

송년회였다.

부동산 사업에 뛰어든 지 5년, 돈 맛에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박사과정도 어느덧 논문 학기에 접어들었고, 부동산써브에 있는 지인 덕에 5만 건의 상가 거래 데이터를 확보했다. 상가 투자에서만 보이는 특이점을 찾아보려 한다. 머플러를 풀며 2층으로 올라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미희는 희수 옆에 앉아 있었고, 그들 앞에는 검은 카디건을 걸친 형기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몇이 태현을 알아보고 손짓했다. 태현은 두리번거리다 호영이 앞자리에 끼어 앉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 구레나룻의 흔적이 있는 호영은 현직 검사였다. 국민학교 시절, 덩치 덕에 마징가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던 아이. 둘은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을 함께 보냈고, 성적순으로 앉히던 담임 덕에 1년 내내 짝이었다.

"세금으로 밥 먹는 공무원이 야근 안 하고 이렇게 술 마셔도 돼?"

태현의 농담에 둘은 잔을 부딪치며 웃었다. 술잔이 비면 채우고, 다시 비워내는 사이, 말이 오갔다.

"여기선 말하지 말자. 애들 들으니까."

"그래, 골프나 치자. 곧 연락할게."


잠시 뒤, 태현은 미희와 희수 사이에 비집고 앉는다.

희수가 장난스럽게 미희 귀에 속삭였다.

"너 서방님 오신다."

"형기라고 했지? 지지난번에 봤던 거 같은데. 국민학교 때 몇 반이었어?"

"6학년 때 네가 1반, 나는 2반. 그 맨 꼭대기 층 교실. 넌 반장이었잖아. 기억나."

"아, 그랬구나. 난 기억이 없는데, 반갑다. 자주 보자."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곧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 번졌다. 형기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인다.

"서울에서 돈 없던 애들끼리 살던 동네였잖아. 달동네든 시궁창 골목이든. 가슴에 한두 개씩은 한이 있는 친구들이야. 형편 좋은 놈들도 있었지만, 다 막상막하지."


형기는 장마철마다 시궁창 똥물을 바가지로 퍼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끼리 모이면 다 착하지. 열심히 살고, 서로 그러려니 하고. 우리 나이, 인생의 반환점 불혹이지. 하지만 솔직히, 불혹은 유혹이야. 흔들리는 나이야."


태현의 말에 형기는 말없이 잔을 들었다.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 몰라. 과거를 돌아보면 한심하고, 앞을 봐도 막막하고. 우리가 지금, 유혹에 가장 취약한 시기를 살고 있는 거야."



그날 이후 3개월 만에 다시 만난 술자리이다.

고급 일식집의 은은한 조명 아래, 형기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지배인은 형기를 알아보고 굽실거리며 인사한다. 그 분위기를 깨듯, 호영이 들어온다.

"정문엔 S그룹, D그룹 애들 깔려 있어서 뒷문으로 왔다. 검사도 참 힘들게 산다."

잠시 뒤, 미희와 태현이 함께 도착한다. 미희는 형기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최고급 숙성회가 나오고, 발렌타인 30년산이 등장한다.

"폭탄주로 해야지."

"야, 이 좋은 술에 무슨 맥주야. 그냥 마셔."


잔이 돌고, 말이 흐른다. 태현이 조용히 말을 꺼낸다.

"청담동에서 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돈 많이 벌라고 했잖아. 유혹 안 받고 살게 해달라고."

2년 전, 순댓국집에서 오소리감투에 소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였다.

"그냥 사는 게 재미없어. 꼭대기에 올라가서 살아보고 싶어."

말은 짧았고, 눈빛은 길었다. 욕망과 희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나이. 태현은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 호영을 봤다.


형기는 오늘의 술자리가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형기야, 너 이혼했다며?"

"아니. 마누라 대장암으로 죽었어. 첫사랑이었지."

모두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묵직한 감정들이 맴돌았다.

형기는 그런 침묵에서 벗어나려 애쓰듯 웃으며 말했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 그렇더라."


소란스러운 과거와 조용한 현재. 술잔은 또 비워지고 채워졌다.

"형기야, 나하고 일하자."

태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던졌다.

"부동산 사업이라는 게 법과 불법의 경계선 위에서 춤추는 일이야. 돈이든 권력이든, 뭔가를 걸어야 하는 게임이지."

형기는 호영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듯했다.

두 친구가 짜놓은 판. 돈과 권력으로 짜인 그림.


"고시 붙고 나서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검사된 아들 보여드린 게 다행이야."

호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생활하며 깨달은 건 하나야.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 나뉘어 있어."

정치와 종교, 선동과 신념, 이성의 탈을 쓴 감성의 장사. 그 모든 것을 호영은 담담하게 읊었다.


"형기야, 같이 일하자."

미희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단호했다.


형기는 미희의 눈빛을 읽었다.

그 안엔 연민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


"오늘 술자리가 끝나면 대답할게. 그때까지만 생각해보자."

형기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

새로운 인연, 새로운 삶의 경계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대리를 불렀다. 옥수역 근처 아파트에 도착한 차 안. 남자의 어깨에 여자의 머리가 기대었다.

8개월 전 그녀 이름으로 장만한 아파트, 한강이 보이는 거실 벽엔 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잘 잤어? 뭐 먹고 싶어?"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 태현은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고, 미희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혹의 나이. 유혹의 나이. 그들은 지금 그 경계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작가 소개

부동산학 박사

삶의 나락과 상승, 그리고 인간관계의 균열속에서 피어나는 소설을 국내 최초로 쓰고 있습니다. 브런치에는 요약본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다음회 예고

미희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 될 것입니다. 사랑을 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 가슴에 품고 살아야하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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