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좀 가져가. 문자는 보냈지만 남편이 정말 어항을 가져갈 거라는 기대를 한 건 아니다. 맨몸으로 나간 곳이 고작 고시원 한 칸인데 어항을 둘 곳이 있을 리도 없다. 나는 작업실로 갔지만 팔찌를 만들지 못한다. 낚싯줄에 비즈를 줄줄이 꿰는 일조차 집중을 할 수 없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본다. 당연히 남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한참 망설이다 6층 여자에게 전화를 한다. 어제 무슨 일 있었다며? 시치미를 떼고 물어본다. 그녀는 입주민 카페에도 올라오지 않은 최신 소식을 전해 준다.
-어제 여자애 습격한 범인 말이야, 리셋증후군이라는 말 들었어?
-리셋증후군? 사이코패스 아니고?
-범인이 이상한 소리 질렀는데 그게 게임에서 쓰는 마법주문 같은 거래. 컴퓨터 게임하다가 리셋하면 싹 다시 시작하잖아? 게임하는 애들이 사람을 죽여도 단추 하나 누르면 게임처럼 다시 살아나겠거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그리고는 ‘그 애들’처럼 게임방에서 사는 애들 아니겠냐고 했다. ‘그 애들’이라는 건 그녀의 아들을 때린 무리이다. 얼마 전 ‘그 애들’을 학교폭력으로 신고한 후 그 부모들과도 싸워야 했던 그녀는 아직 분을 풀지 못했다. ‘그 애들’은 전학 가서도 똑같대. 제 버릇 어디 가겠어? 그 동네 인간들, 부모부터 애들까지 다 똑같잖아? ‘그 동네’는 길 건너의 임대아파트 단지이고, 그 동네 아이들이 우리 아파트를 통과해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한 후로 갈등이 생겼다. 길을 돌아가야 했던 ‘그 애들’이 하필 아파트 후문에서 나오는 그녀의 아들과 마주친 후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게 말이야, 오죽하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있겠어? 예전 같으면 맞장구를 쳤겠지만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아빠가 가출한 후 한솔이도 콩인지 팥인지 알 수 없는 외톨이가 되었고, 그렇게 엉망이 된 한솔이와 어울려준 건 그나마 ‘그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솔이도 그 애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증언을 원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로서는 한솔이가 6층 아이 편을 들다가 ‘그 애들’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도, ‘그 애들’과 도매금으로 학교폭력위원회에 넘겨지는 것도 모두 두려울 뿐이었다.
‘그 애들’이 강제 전학을 간 직후 한솔이는 다시 모범생으로 돌아온 듯했다. 일찍 귀가하고, 더 이상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과한 용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동안 신발장에서 없어졌다던 새 운동화, 수시로 잃어버린 새 옷들, 피시방에 두고 왔다던 새 패딩, 그런 것들을 학폭위에 증언하는 게 나았을까, 후회도 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열흘도 지나지 않아 한솔이의 귀가는 불규칙해졌다. 아파트 주변에 고양이 학대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6층 여자는 학교에서 쫓겨난 ‘그 애들’ 소행이 틀림없다며 흥분했고 나는 그런 거 같아, 하고 말했다. 나는 한솔이가 누구와 어디를 돌아다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캐물으면 한솔이는 대들고 반항하는 대신 몇 마디 틱틱 대충 얼버무리고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나도 리셋증후군 걸렸나 봐. 단추 하나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네.
그녀는 아들이 아직도 정상 생활이 어렵다며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전화를 끊고 나는 오래 열지 않았던 서랍을 연다. 그 안에는 비즈 재료 세트들이 줄지어 정리돼 있다. 각각의 세트마다 색색가지 구슬들이 나뉘어 담긴 작은 지퍼백들이 들어 있다. 마지막 줄에는 미완성 작품들이 있다. 그중 하나를 꺼내 든다. 구슬이 색깔별로 분리되지 않고 한꺼번에 담겨있는 봉지다. 여러 가지 구슬들이 뒤섞여 칙칙해 보이는 사이사이 진하고 옅은 핑크색이 언뜻언뜻 맑고 밝게 빛을 뿜는다. 봉지를 열자 한쪽 구석에 연꽃 몇 송이가 보인다. 단단히 웅크린 작은 봉오리부터 반쯤 벌어진 꽃송이까지, 짜다가 만 비즈 직조다. 활짝 핀 것들은 더 아래쪽, 아직 짜지 않은 부분에 있을 예정이었는데 직조가 찢어지며 망쳐 버렸다. 커다란 이파리와 물속의 금붕어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채, 연꽃들은 허공에 떠 있다. 아직 나타나지 못한 만개한 연꽃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눈을 뜬다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면. 나는 삼각접시를 손에 쥐고 구슬들을 색깔별로 나누기 시작한다. 수십 가지 구슬을 따로 분리하는 단순한 작업이 지루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새 도안을 구상한다. 나무뿌리에 휘감긴 채 되살아난 동남아 밀림 속 고대 도시의 수많은 사면불상들이 차례로 나타나 눈을 뜨고 감고 다시 뜨고, 세상이 새로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린다. 우리 가족이 함께 보았던 이국의 풍광, 잊지 않고 싶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린 우리 세 식구의 해외여행. 여행을 떠나던 순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었을지, 그것 역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