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잠적했던 시동생이 구속되어 삼 년 형을 받고 동서가 지방 업소에 취직을 한다고 나가 버렸다. 다시 한번 조카아이의 거취가 문제로 떠올랐다. 나는 더 이상은 그 아이를 돌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이는 동서의 친정 오빠가 맡기로 했다. 시동생이 저지른 사고들을 해결해 준다며 우리에게서 돈을 갈취하곤 하던 문제의 조폭사돈이었다. 월 백이십만 원의 양육비를 요구해서 구십으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는 동남아 특가 상품을 예약했다. 힘들었던 과정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지만, 다달이 엄한 곳에 거액을 지출하게 되자 그동안 애면글면 아끼고 절약하며 살아온 게 억울해서였다. 그렇게 기다리던 가족 동반 첫 해외여행을 떠나기 이틀 전, 조카애가 이웃집 아이를 물어뜯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의 외삼촌은 합의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백만 원을 제시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남편은 머뭇댔지만 그 방면에 전문가신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어, 내가 속삭이자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다는 척,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조카아이가 다발성 장기 파열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외삼촌은 온 세상의 비난을 받고 감옥에 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남편에겐 하나뿐인 조카였고, 외동인 한솔이에게는 하나뿐인 사촌이자 동생이자 우리 집에 머물렀던 친구였다. 나에겐 버릇없고 무례하고 집을 어지럽히고 고양이를 죽게 하고 금붕어를 괴롭히고 비즈 작품을 망쳐 놓은 시조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아이는 여덟 살이었고, 제대로 양육을 받는다면 병원에 데려가 무슨 주의력 결핍 증후군 같은 진단을 받았을지도 모를 아이였다. 아니, 설령 그 아이가 열여덟, 혹은 스물여덟 살이더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는 순수한 꼬마 악당이었다 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리 가족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작업대에 앉아 하루 종일 구슬을 꿰었지만 좁쌀 같은 구슬들은 질서 없이 바늘에 꿰어지고, 바늘은 제멋대로 내 손가락을 꿰뚫고, 저녁이 되면 쓸모없는 물건을 만들어져 있었다. 장을 봐서 저녁을 차린 기억은 나는데 가족이 식사를 함께 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마루와 가구가 닳아 없어지도록 문질러 닦았는데 그 집에서 쉬는 가족이 없었다. 내가 꽃밭처럼 가꾸었던 가정이 조카아이가 속했던 가정처럼 삭막한 사막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내 가족이 실재했던 걸까. 아마도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에 아이콘들이 단정하게 정렬했다. 아무것도 클릭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는 동안 모니터는 캄캄하게 죽어버렸다. 퍼뜩 두려워져서 단 한 번 마우스를 건드리자 화면보호기가 작동하며 아름다운 풍광이 천지창조처럼 나타났다. 다시 한번 손가락을 놀리면 그 아름다운 풍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아이콘들이 줄 맞춰 선 바탕화면이 나타나고, 나는 그 허망한 공간에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의 흔적을 찾았다. 사진 폴더 안에는 남편과 내가 만나 3인 가족을 이루어 온 과정을 날짜별로 깔끔하게 분류해 놓았다. 언제 들어온 걸까. 어쩌면 원래부터 집에 있었던 걸까. 남편이 내 뒤에 서서 같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사진 폴더들을 하나씩 열어 갔다. 한솔이가 태어나기 전 풋풋한 남편과 내가 만나고, 어느새 한솔이가 내 뱃속에 숨어 있고, 아주 작은 한솔이가 나타나 어엿한 중학생으로 성장해 가다가, 미처 이름도 짓지 못한 새 폴더에 이르렀다.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했던 여행 사진들은 전혀 손대지 못한 채, 순서도 장소도 뒤죽박죽이었다. 그 모양을 보자 뒤엉킨 채 죽어 가던 기억이 숨을 쉬려 했고, 나는 그 뒤죽박죽 사진 중 하나를 클릭했고, 그리고 남편은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해선 안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