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물 잡기 08화

세 번째 여자

by 호인

“속도 좀 내. 이러다 날 밝겠어.”


상철은 조수석의 아내를 돌아보았다. 검은 눈두덩, 뺨과 목에는 멍들고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상철은 후들거리는 손목에 힘을 주고 액셀을 밟았다.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제한 속도 80킬로미터 구간입니다.


“조심해. 만에 하나 경찰이라도 쫓아올 일 없게.”


경찰! 상철은 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쫄 건 없잖아. 이 시간에 무슨 경찰이 있겠어.”


상철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심스레 속도를 올리자 아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 왜 고집을 부려. 남자가 결혼을 했으면 아내 말을 들어야지.”


상철의 내부에서 작은 심장이 꿈틀했다.

상철은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과부였다. 억척스레 돈을 벌며 혼자 상철을 키워냈다. 상철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하고, 전공을 택할 때도 어머니의 의견을 따랐다. 레지던트 시절 사표를 내고 도망친 것을 찾아와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박살 낸 호텔 집기를 변상하는데 한 달 치 월급이 들어갔다. 함께 가출했던 여자와는 그날로 헤어져야 했다.

아내와의 결혼을 앞두고 주례를 부탁하러 찾아갔을 때, 외과 과장이 농담처럼 말했다.

모름지기 남자는 일생 동안 세 명의 여자 말만 잘 들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법이네. 그 첫 번째 여자가 어머니인데, 닥터 김은 어머니 말씀을 잘 따라서 외과 전문의가 되지 않았나. 두 번째 여자는 아내인데, 신부가 마침 외과병원 댁 따님이라니,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만사가 편안히 풀려갈 걸세……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그 말을 아내는 수시로 우려먹었다.


“주례 선생님도 그랬잖아. 아내 말을 들으면 모든 일이 편하다고.”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때 그냥 친정으로 가버렸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자기가 괜히 막고 나서서.”


이 상황에 이런 이야기라니, 고래 심줄 같은 신경은 어머니를 닮았다.


“유성으로 가자. 적당한 데 있어. 자세한 길은 내비 찍으면 되니까.”


“청도로 가.”


상철이 용기를 내 반항했지만 돌아오는 건 아내의 포효.


“청도? 자기 돌았어? 미쳤다고 지금 그 먼 촌구석까지 가?”


독단적인 말투와 태도도 어머니를 꼭 닮았다.


“제발 그만해. 뒤에 어머니도 계신데.”


“정신 나간 소리 그만하고 유성으로 가.”


“그만!”


끼이익! 상철은 좁은 노견에 차를 세웠다. 유리창을 들이박을 듯 앞으로 쏠렸다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아내가 놀란 눈으로 상철을 바라봤다.


상철이 아내와 결혼한 이유는 간단했다. 장인의 자녀 중에는 의사가 없었고, 의사인 상철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돈지간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돈 유세를 하는 병원장 장인과 의사 아들 유세를 하는 홀시어머니는 그런대로 게임이 되었다. 상철과 아내도 매우 좋았다. 어머니 말을 따르듯 아내의 말을 따랐으니까. 그러나 똑같이 만만찮은 어머니와 아내는 만날 때마다 으르렁댔다. 사이에 낀 상철은 좌충우돌 튀다가 몇 번 벼락을 맞고, 두 여자를 만나지 않게 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제삿날,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왔다. 집안 가풍이니 악습 타파니 고부간에 싸우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상철은 아버지도 이렇게 힘드셨나요, 울며 잔을 올렸다. “아버지 생각나 우는구나. 장가 든 후로 아버지 성묘도 못 가고, 쯧쯧” 어머니가 혀를 찼다. “아무렴. 모든 게 다 며느리 탓이지.” 아내가 작은 소리로 빈정거렸다.

아내의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처제 역시 의사와 결혼했는데, 동서는 학벌이 더 좋았다. 아내는 공연히 초조해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동서는 아들 셋인 집의 둘째라더니, 엉뚱한 불똥까지 튀었다. 동서가 자기 본가를 제쳐두고 처가의 아들 노릇을 하는 통에 아내의 요구가 천정부지 치솟은 것이었다.


설날에 역귀성한 어머니 심기는 최악이었다. 축 늘어진 볼살에서 시어머니 용심이 불끈거렸다. 남의 감정에 둔감하기론 어머니나 아내나 막상막하. 아내가 친정에 무한 효도 중이고 상철이 거기에 끌려다닌다는 걸 안 어머니가 화를 냈다. 아내는 쌩하니 일어섰다.

그때 그냥 아내를 따라나섰더라면.

아니 그냥 아내 혼자 가게 놔두기라도 했더라면.

그러나 일생일대의 실수로, 상철은 친정으로 가는 아내를 막고 나섰던 것이다.


“자기가 지금 이럴 주제나 돼? 제부랑 얼마나 비교되는지 알아? 제부는 자기보다 학벌도 더 좋고 집안도 더 좋지만 처가에는 더 잘한다는 거 몰라?”


어머니가 달려와 아내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내는 어머니의 손목을 쥐어뜯는다. 엉겨 붙은 두 여자는 서로 치고받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상철은 가까스로 두 여자를 떼어내 힘껏 밀쳤다. 벽 쪽에서 뻐억 소리가 났다.

세 사람 모두 얼어붙은 듯 정지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아내였다. 어머니를 흔들어 본 아내가 말했다.


“다, 당신 의사잖아. 어떻게 좀 해 봐.”


의사인 상철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파랗게 질린 아내가 다시 말했다.


“사고, 사고였다고, 어머니가 혼자 넘어져 벽에 부딪쳤다고 하자.”


상철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집안 꼴과 두 여자의 몰골로 보아 단순한 사고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였다. 한참을 울고불고 횡설수설하던 아내가 마침내 정신을 수습하고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은 작고, 거구의 어머니는 이미 굳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해 봐. 당신 외과 의사잖아.”


어머니, 외과 의사 시키신 걸 원망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좋은 선택이었다는 걸 알게 되네요. 상철은 울면서 어머니를 가방에 차곡차곡 넣었다.



“자기야. 진정해. 어서 가자. 이러다 날 밝겠어……”


아내가 상철을 달랬다. 어르고 달랠 때의 수법도 어머니를 닮았다. 잠시 정신이 나가 버럭 차를 세웠던 상철은 풀이 죽는다. 눈치를 챈 아내가 다시 시작한다.


“청도 선산에서 아버님 묘소 옆에 도둑 매장하면 뭐가 달라져? 만에 하나 발견될 경우를 생각하면 전혀 관계없는 곳이 오히려 나아. 청도 사람들은 어머니가 서울 가신 줄 아니까, 나중에 가서 집을 정리하면 되고, 자기는 일단 시치미 떼고 내일 아침 병원으로 출근하면 돼.”


뜬금없이 오래전 호텔에서 끌려와 병원으로 출근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는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 상철의 마음을 읽지 못한 아내가 말했다.


“빨리 출발해. 다음번 유성에서 나가자. 아무 데나 묻고 어서 돌아가야지.”


“엄마 평생의 소원이었어. 아버지 옆에 묻어드려야 해.”


상철을 아내를 보았다. 아내의 입술이 나불거렸다.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자기가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 좀 해 봐.”


상철은 안전 벨트를 풀었다. 아내의 목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상철은 뒷트렁크를 열었다. 어머니가 들어있는 가방을 한쪽으로 밀고 빈자리에 아내를 집어넣었다. 다시 운전석에 앉아 액셀을 밟자 차가 출발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어머니도 아내도 없다.


-다음 안내 시까지 직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여자의 목소리에 상철은 핸들을 바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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