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물 잡기 10화

안나의 종말

by 호인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린도전서 15 : 51-52 )


안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세요, 내가 당신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거예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안 나 야?”


안나의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았다. 안나의 눈은 정말 검은색이다. 보통 동양인의 눈이 검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의 짙은 갈색이다. 눈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홍채는 갈색이고 그 가운데 까만 동공이 있어서, 밝은 곳에서 동공이 축소되고 어둡거나 놀랐을 때는 동공이 커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안나는 홍채의 색깔이 동공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까매서 아무런 변화도 알아챌 수 없다. 그 새카만 눈동자는 마치 거울 같아서 안나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그 안에 들어있다. 안나 눈동자 속의 나는 거울 속에서 만나는 나의 모습보다 백만 배는 더 멋지고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안나야, 안나. 니 ‘안’에 ‘나’ 있다는 뜻? 아니면 안. 나. 내가 아니라는 뜻?”


그렇게 실없는 말을 던져보아도 안나는 미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안나는 소리 내어 웃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 미미한 미소를 짓는 볼 가운데 깊이 파이는 볼우물을 보면, 그 속에 빠져 죽고 싶어졌다. 그런 순간마다 동정 서약이 후회되지만, 하지만 나는 또 참을 수밖에 없다. 혼전순결 모임에서 안나를 만났으니 어쩌겠나. 내가 사는 곳은 시골 작은 마을이다. 파도가 심한 바닷가 어촌에서 배는 자주 뒤집혔고, 뱃사람들은 쉽게 죽었다. 유능한 목사는 과부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고, 마을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적 도덕관에 젖어있었다. 하물며 나는 그 고루하고 보수적인 마을하고도, 바로 그 유능한 목사의 착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교회는 문자 그대로 나의 집이었고, 나는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는 모범생으로 자라 교과서와 성경만을 읽었고, 퇴폐적인 소설이나 음악, 여자아이 따위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다만, 안나를 만나기 이전까지만.

안나는 교회의 혼전순결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의 교리에는 회의적이었다. 안나는 모든 종교에 열려 있었다. 자신의 종교만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종교를 증오하는 것은 예수님도 원치 않으실 거라고 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을 의심한 적 없는 목사의 아들에게 안나의 말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던지. 안나를 만난 이후 나는 주일마다 예배를 빼먹고 안나와 함께 세계의 온갖 종교를 공부했다. 안나는 개신교와 가톨릭은 물론 불교, 무슬림, 힌두교, 심지어는 무속에까지 일가견이 있었고, 나는 안나가 시키는 대로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읽었다. 요즈음 안나는 부두교의 마법에 심취하여 내게도 관심을 갖길 요구하고 있다.

내 실없는 질문은 무시하고 안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주말마다 교회 대신 함께 등산을 다니며 까다롭게 캐온 약초들을 꺼내더니 파랗게 녹이 슨 청동 냄비에 담았다. 냉장고 안에 있던 물통도 꺼냈다. 안나의 부탁대로 성당을 돌며 훔쳐 온 성수가 들어있다. 목사의 아들, 모태 기독교인인 내가 성당에서 성수를 도둑질을 하는 것은 더군다나, 안나를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다.

안나는 약초가 담긴 청동 냄비를 고색창연한 청동화로 위에 올려놓고 훔쳐 온 성수를 붓더니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안나는 신비롭게 아름다웠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 까만 눈동자는 보이지 않지만 대신 길고 짙은 속눈썹이 창백한 뺨에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나는 노래에 맞춰 춤추듯 천천히 몸을 흔들었다. 희디흰 맨살이 드러난 어깨 위에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하얀 대리석 담 앞에 아른거리는 담배 연기처럼 물결치는 것을 나는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내 손에는 검정 비닐 봉다리를 든 채였다. 오늘은 주일이자 목사님인 우리 아버지의 생신이건만, 나는 안나와 교회 대신 인근 대도시에 가서 애완동물 상가를 뒤져 기묘한 것들을 사 왔던 것이다. 왜 하필 오늘이냐는 나의 질문에 안나는 답하지 않았다. 다른 날 가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안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안 달력은 날짜를 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며, 기원전 기원후를 나누는 서력기원 원년조차도 예수 탄생 연도와 3,4 년 차이가 있는 믿을 수 없는 기준일 뿐이라는 애매한 말을 했다. 그러니까 달력으로 주일이니 생일이니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면서 세계의 책력이니 마야 달력이니 하는 이상한 책들을 내게 권하는 것이었다.

물이 끓자 안나는 내 손에서 비닐봉지를 건네받더니 그 안에 들어있던 검정 두꺼비와 푸른 무당벌레 일곱 마리를 맨손으로 꺼냈다.

안나의 노랫소리가 높아지더니, 헉, 내가 놀랄 사이도 없이 두꺼비와 무당벌레들을 끓는 냄비에 던져 넣었다. 성당에서 훔쳐 온 영성체와 아버지의 서랍에서 훔쳐 온 십자가까지 냄비에 던진 안나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를 살짝 흘겨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의 서약은 아직 유효하겠죠?”


우리가 함께한 혼전순결 서약을 말하는 것이겠지.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안나는 만족스러운 듯 생끗 웃는다. 그 볼우물에 빠져들고 싶다는 충동을 알아챈 듯 안나가 속삭였다.


“우리의 피가 섞임으로서 그 서약은 종료됩니다. 서약을 끝내는데 동의하세요?”


뭐라고!

할렐루야, 이게 무슨 소리냐,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리가 맺은 서약은 분명히 한가지 뿐이었다. 혼전까지 서로의 육체를 탐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 동정 서약. 그런데 그 서약이 종료된다고? 우리의 피가 섞인다고? 나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 뒤의 강아지 인형처럼 무한반복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안나는 입술 대신 하얀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마주 내민 내 손에 안나의 손이 다가왔다.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목을 꽉 움켜쥐더니 반대편 손이 내 팔 중간을 스쳤다.


“아얏”


생각지도 못한 날카로운 손톱이었다. 안나의 손톱이 긁고 간 자리에서 빨갛게 피가 스며 나왔다. 안나는 자기 팔뚝에도 같은 상처를 내더니 내 상처에 마주 댄다. 두 팔뚝에서 흐르는 피가 합쳐지며 청동 냄비 안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니, 피가 섞인다는 게 이런 것이었어?”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피는 서로의 팔뚝에 손톱으로 할퀸 상처에서 흘리는 진짜 붉은 피가 아니라…… 내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갑자기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튼, 내가 상상한 피는 진짜 피가 아니라…… 아, 물론 안나는, 순결한 안나의 경우는 진짜 피이겠지만, 남자인 내 경우는 진짜 피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 말하자면 일종의 은유법으로….. 횡설수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빰빠라빰빰빰빰……

천지를 울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안나가 깔깔 웃었다. 안나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처음 본다. 처음 듣는 안나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할 말도 잊었다.

빰빠라빰빰빰빰……

다시 나팔 소리가 울리고 안나가 웃음을 멈추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나의 팔이 내 등을 휘감자 온몸이 저릿저릿 조여들며 넋이 빠져나가 버린다.

빰빠라빰빰빰빰……

세 번째 나팔 소리에 황홀해하던 안나가 자기 입술을 내 입술 위에 포개자 내 몸을 빠져나가 공중에서 나를 바라보던 넋이나마 산산이 분해되어 흩어져버린다.

빰빠라빰빰빰빰빰…….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나팔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길게 키스하고 마침내 입술을 뗀 안나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완전 성공이에요. 청동화로, 청동냄비, 성수와 약초와 검정 두꺼비와 푸른 무당벌레, 그리고 한 번도 여자와 몸을 섞은 적이 없는 동정남과, 천 명의 남자와 체액을 섞은 마녀가 서로 합의하여 피를 섞으면……”

세상에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흩어졌던 넋이 급히 수습되며 안나의 알쏭달쏭한 말을 따져보고 있었다. 한 번도 여자와 몸을 섞은 적이 없는 동정남과 천 명의 남자와 체액을 섞은 마녀라니, 그럼 순결 서약은 나 혼자 한 것이고 안나는 이미 천 명의 남자와 관계를?

그러나 그런 의문은 그 직후 일어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열두 살 연상의 유부녀 애인의 첫 남자이기를 꿈꾼 사춘기 남자애의 실망처럼 어리석은 것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거예요. 호호호호……”


더 알쏭달쏭한 말이 끝나자마자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세상이 어두워졌다. 안나는 청동 촛대에 불을 붙였다. 촛대를 잡은 그 손가락의 손톱이 촛대를 뚫고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길게 자라난다. 기절을 할 듯 놀라는 나를 안나는 깔깔 드높이 웃으며 빤히 쳐다본다. 오, 세상에. 새카맣던 그 눈은 어느새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안에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뒤덮인 머리 양쪽으로 염소처럼 뿔이 솟은 한 사내의 모습이.

으흐…… 나도 모르게 나오던 신음 소리가 클클 기괴한 소리가 되어버린다.

안나의 뒤로 보이는 창문 밖에 기이한 움직임이 보였다. 해가 시커먼 구름에 가려진 컴컴한 세상이 꿈틀거린다. 내 시선의 방향을 눈치챈 안나가 창가로 달려갔다.

안나의 창밖으로는 공동묘지가 내려다보였다. 마을 중심에서 떨어진 외곽, 뒷산에 바로 면한 외진 곳이기도 하지만, 거실 한 면은 하필이면 산등성이 공동묘지를 향해 창이 나 있다. 왜 이런 음침한 곳에 사느냐고 묻기에는 나는 안나에게 너무 반해 있었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내가 안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던가, 아는 것이 있기는 하였던가, 후회가 들며 무서워졌다. 창가로 간 안나가 얼어붙은 나를 손짓해 불렀다. 나는 염소처럼 털이 자라고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여 창가로 갔다.

공동묘지 언덕은 천 개의 젖을 가진 원시시대의 지모신처럼 볼록볼록 돋아난 봉분들이 가득했다. 언덕이 꿈틀꿈틀 몸을 떨었다. 봉분들이 함께 꿈틀거렸다. 억센 손아귀가 주무르듯 이리저리 찌그러지던 봉분들이 급기야는 토마토나 귤이 터지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덤이 열리고, 그 안에 잠자던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 시체들이 몇 년 혹은 몇십 년 잠들어 쉬던 관을 부수고 비틀비틀 걸어 나온다. 몸을 감은 낡은 삼베 천을 너덜거리며 시체들이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찢어진 천 사이로 썩은 살을 드러낸 채 시체들이 걸어온다. 그 광경을 부며 안나가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성공이야, 성공! 드디어 해냈어! 내가 불러냈어! 내가 살려냈다고! 이제 이 세상은 내 거야! 내 거라고!”

공동묘지만이 아니었다. 산과 들에서, 흙이 들썩이더니 오래된 시체들이 일어났다. 공동묘지가 생기기 훨씬 이전에 매장된 뼈 조각들이 삐그덕거리며 걷기 시작한다. 산야에 버려졌던 백제 시대 노비들과, 신석기 시대에 객사했던 원시인들의,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산산이 가루진 뼛가루들이 들썩이는 흙에서 날아오른다. 뼛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모이고 뭉쳐 희미한 사람 형상을 만들어 내더니 흔들흔들 이웃의 백골들을 따라 움직인다.

멀리 마을 쪽에서부터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안나는 즐거워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마을에서도 죽은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야. 아무도 몰래 살해당해 벽 속에 묻혀있던 시체라도 깨어났나 보지. 마을뿐이 아니지. 온 세상의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나를 빤히 보는 것이었다.


“목사의 아들이니 잘 알겠지? 성경에 씌어있는 일이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거라고.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시체들을 살려냈으니 이제 이 세상은 내 거야. 내가 살려낸 죽은 자들은 나에게 절대복종하는 나의 신민이 된단 말이야. 이제 그 누구도 내게 거스르지 못해. 이 세상은 내 거야.”


깔깔 웃던 안나가 한 손을 높이 치켜들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소리 높여 외쳤다.

시체들이 모두 안나를 향했다. 안나가 다시 무언가 외치자 썩은 시체들이 삐걱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입도, 혀도, 성대도 부패한 시체들이 박자를 맞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안나에게 경배하는 소리였다. 안나가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이제 볼우물은 패이지 않는다. 안나의 빨간 눈동자 속에 뿔난 머리 위에 백발을 뒤집어쓴 사내가 겁에 질린 채 염소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자, 순진한 동정남. 네게도 권세를 나눠 주지. 내 말에 복종한다면.”


“안나야…… 이건 아닌 것 같아……”


“뭐라고?”


안나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안나는 마녀다. 마녀 안나는 성경에 몇 구절, 고린도 전서 15장의 몇 구절을 보고 이것이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확신했다.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린도전서 15 : 51-52 )


‘홀연히 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된다.

안나는 그것을 부두교의 마법과 결합시킬 계획을 세운 것이다. 부두교의 마법사들은 죽은 시체를 살려내서 움직이게 하는데, 그것을 '좀비'라고 한다. 요즈음 온 세상 영화와 게임 등에 등장하는 ‘좀비’는 바로 그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혼이 없는 좀비들은 마법사가 명령대로 움직이는 마법사의 종이 되는데, 안나는 그 마법을 고린도 전서 15장의 그 일과 함께 일어나도록 시간과 방법을 조절함으로써 온 세상의 모든 시체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좀비를 만드는 부두교의 마법을 위해 동정남의 피가 필요했고, 거기에 걸려든 게 나였다. 안나가 나를 선택한 건 오직 한 가지. 보수적인 시골 마을 순진한 목사의 아들. 여자 경험이 없는 찌질이였기 때문이다. 혼전순결 서약은 개뿔, 안나는 이미 천 명의 남자와 몸을 섞었고, 다만 나를 동정으로 묶어두기 위해 함께 서약했을 뿐이다. 나를 속이고 이용한 건, 나는 용서할 수 있다. 난 그만큼 안나를 사랑했고, 안나로 하여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행복했으니까. 아니, 안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 정도의 일을 상관할 때가 아니었다.

안나는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알기는 알되, 너무 조금밖에 모른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성경에 씌어있건만, 안나는 성경을 다 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몸이 떨려서 제대로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이러면 안 돼. 안나야, 성경은 고린도전서에서 끝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성경을 끝까지 읽어야 해…….”


“이봐, 동정남. 제대로 말을 해봐. 되살아난 시체들에게 죽고 싶지 않……”


안나의 목소리는 엉뚱한 소리에 묻혀버렸다. 마을의 동사무소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다.


-주민 여러분, 너울성 파도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급히 마을 밖 언덕으로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너울성 파도가 빠른 속도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주민 여러분 급히……


공동묘지를 향한 창문 밖에서는 시체들이 안나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편 벽에는 창문 하나가 마을을 향하고 있었고, 그 창문 밖으로 하늘까지 치닫는 물의 벽이 마을을 휩쓸고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안나가 놀라 치켜뜬 눈 속에 빨간 눈동자 가운데 까만 동공이 화악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였을 때는 동공을 구별할 수 없었고 놀라거나 빛을 보거나 눈동자는 아무 변화를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안나의 눈은 커다랗게 확대된 검은 동공 주변으로 시뻘건 홍채가 좁은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마치 금환식처럼. 붉은 해의 중심을 삼킨 금환일식의 달그림자처럼, 검은 동공이 붉은 홍채를 삼켜버렸다. 다음 순간,

거대한 파도가 마을을 삼키고 달려와 안나와 내가 있는 집 안으로 밀어닥쳤다. 안나가 거센 물살에 휘청였다. 나는 안나에게 달려가 그 손을 꽉 잡았다. 차갑고 작고 여린 손, 철저한 순결 서약에 매여 처음 잡아보는 그 손이 내 손을 마주 잡아 온다. 믿을 수 없을 만치 부드러운 그 손의 끝에서 생각지도 않게, 십 센티는 넘게 자라버린 손톱이 내 손바닥을 관통해 들어와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집이 무너지고 파도가 마법처럼 사라져버린 후, 우리 주변엔 파도에 휩쓸려 죽은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익사한 뱃사람들의 시체가, 바다가 토해놓은 백골들이. 겨우 정신을 차린 안나와 내가 겁에 질려 지켜보는 가운데, 시체들이 물방울을 떨구며 일어섰다. 공동묘지에서, 산과 들에서, 그리고 마을과 인근 도시와, 온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난 시체들이 쓰러져 있다가 스멀스멀 다시 일어서고 있을 터였다. 안나가 기쁨에 겨워 앗싸, 주먹을 쥐었다. 안나의 손톱이 내 손바닥을 파고들어 비명을 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안나는 주먹을 흔들며 기뻐 날뛰고, 내 손바닥은 이리저리 찢어져 피가 흐른다. 기뻐할 때가 아니라고 말하려던 나는 대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 세상이라고 외치던 안나가 뚝, 소리를 멈추었다. 백만 개의 전구가 한순간에 켜진 듯 하늘이 밝아졌다. 안나의 빨간 눈 가운데 동공이 확 줄어들며 까만 점이 되었다.

마침내,


밝은 하늘보다 더 밝은 빛을 뿌리며 하얀 천사가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나타났다. 천사는 안나를 향해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내가 미처 막아설 겨를도 없이 천사가 안나의 몸을 잡아채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안나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끌려 올라가고, 안나의 갈고리 손톱에 손바닥이 꿰어진 나는 속수무책 대롱대롱 딸려 올라갔다.

하늘에 뜬 채 발아래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갈고리에 걸린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한 손이 안나의 손톱에 꿰어진 채,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도 빙글빙글 돌았다. 가까스로 초점을 맞추었다. 지구가 점점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온 세상에 널려있던 되살아난 시체들이, 안나처럼, 나처럼,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어느 순간, 하늘 위 높은 곳에는 낙원이 그 문을 열고, 하늘 아래 땅에는 거대한 불구덩이가 입을 쩌억 벌렸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늘로 들어 올려진 산 자와 죽은자들 중, 혹자는 하늘 위 낙원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혹자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던져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순결했던 목사의 아들. 심판의 순간이 오면 누구보다 먼저 낙원에 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안나의 갈고리 손톱에 꿰인 채 대롱거리고 있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 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 : 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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