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서 읽을 책 한 권을 골랐다. 보통 외출이나 나들이를 나갈 때 읽든 안 읽든 책을 한 권 챙겨가는 편이다. 못 읽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챙긴다. 이건 무슨 허세인가, 쓸데없이 가방만 무거워지는데도 꿋꿋하게 지키는 습관이라고 해 두면 좋겠다.
여행이나 나들이를 갈 때 가져가는 책의 기준은 너무 재밌으면 안 되고 (책 읽기에 빠져서 다른 걸 못 하니), 지나치게 두껍거나, (크로스백에 넣고 다니기 때문에 어깨가 아파진다) 당연히 재미없어도(재미없으면 안 읽으니) 안 된다. 적당히 흥미를 유발하면서 한 챕터가 짧은 것이 가장 좋다. 챕터와 챕터 사이에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고 독립된 것이 좋다. 잠깐잠깐 읽기고 덮기에 가장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 가져간 책은 <정약용 코드>라는 책이었다. 흑백의 시대를 살았던 정약용에게 컬러를 입혔다는 작가의 설명이 마음에 와닿는다. 정약용 코드는 한무숙 작가의 <만남>이라는 책을 읽고 정약용에 다시 관심이 생겨 구매한 책이다. 정약용에 대한 책은 위인전부터 저서에 대한 책까지 많고도 많지만 평범한 내가 읽고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와 기를 논하는 사상철학부터 거중기의 설계까지, 그런 책들은 정말 까만 것이 글씨이고 하얀 것이 종이라는, 까막눈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 주는데 이 책은 알기 쉽게 설명이 잘 되어있어서 나도 이해가 쉬웠다.
<운명이다> 정약용의 자찬 묘지명에 담긴 말이라 한다. 정약용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시대를 잘 못 타고났음이 슬플 정도로 안타까운데 이것 역시 운명이라고 본인은 과감함 때문에 화란을 당한 것이 운명이라고 평한다. 한무숙 작가의 <만남>에 등장하는 정약용은 유배 이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조금은 유해지고, 힘이 빠진, 그러나 여전히 꼬장꼬장하고 무서울 정도로 학문에만 매진하는 모습이었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정약용은 20대 후반 과거에 합격하고 지방 관직을 수행하고,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모습도 그려져 꼬장꼬장함을 넘어 독선이라고 비칠 만큼 옳고 그름의 선이 정확한 사람으로 나온다. 지금 2023년을 사는 내가 생각해 보면 정약용의 생각이 상식이라고 생각되는데, 조선 후기는 암으로 치면 4기, 썩은 부분을 얼른 도려내지 않으면 결국엔 망하게 될 운명에 처한 나라였으니 정약용의 상식적인 생각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조선 시대상들도 많이 있다. 이순신의 거북선만 봐도 조선 초 중기의 조선의 과학 기술이나 선박 제조술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는데, 그게 조선 후기가 되며 싹 사라져 버렸다. 무과는 천시되고 과학을 경시하니 당연한 결과이다. 외국의 선박이 좌초하면 선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잔해를 조사하도록 되어 있었다는데 잔해 조사는 하지 않고 근처 마을로 관리들이 들어가 마을 백성들에게 잔뜩 삥만 뜯고는 대충 서류를 꾸며 마쳤다 하고, 백성들은 관리들의 횡포가 너무 힘드니 좌초되는 선박을 구해주기는 커녕 내쫓아 버리거나 방치했다고 한다. 황현필의 <이순신의 바다>를 읽으며 우리나라 선박 제조술에 강한 자부심을 뿜뿜 느꼈던 나로서는 이 대목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에도 강한 비판을 한다. 고요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라고, 세계정세가 급변하는 18세기, 19세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양과의 수교는커녕 가까운 나라들과도 수교의 문을 닫아 버리고 스스로 고요해졌으니 나라가 발전 할리가 없다는 남연군묘 도굴사건의 범인인 기록이 안타깝기만 하다. 정약용은 이 모든 것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조선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500권이 넘는 저술을 통해 울부짖듯 외치지만, 그 시대에 받아들여진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의 말마따나, 이것 역시 운명일까.
아이 교육에 관한 부분도 나온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아거 접미사 "충"이다. 급식충, 맘충등. 조선시대에도 삼충이 있다. 정약용은 가정교육을 강조하면서 잘못 카운 아이는 "삼충"이 된다고 했다. 재산 많은 사람이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데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다. 재산을 남겨줘도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자식을 낳아서 꾸짖지도, 혼내지도 않고 애지중지 키우면 아이는 부모가 빨리 늙어 죽기만 바란다. 부모가 죽고 나면 아이들은 3년상이 끝나기 무섭게 "삼충의 기예"를 갖춘다고 했다. 가장 위에 있는 벌레(상시)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으면서 보물을 좋아하고 목 위를 병들게 한다. 즉 돈 욕심 벌레다. 뱃속에 있는 벌레(중시)는 음식을 좋아하고 오장을 병들게 한다. 음식 또는 술 욕심 벌레다. 맨 아래쪽에 있는 벌레(하시)는 색을 탐해 하반신을 병들게 하는 색욕 벌레다. 삼충을 없애는 길은 부모의 엄한 가정교육뿐이다. 정약용이 지어준 두 아들의 서재 이름이 삼사재이다. 삼사재에서 말하는 마땅히 닦아야 할 세 가지는 용모, 말, 안색이다. 공부 잘하고 글 잘 쓰는 게 중요하지 않다. 공부에 앞서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을 공손하게 하고, 얼굴빛을 밝게 하라는 당부다. 함부로 말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면 나중에 세상을 훔치는 도적이 되고 큰 악을 저지르게 된다고 경고한다.
명심 또 명심을 하며 두 번 읽은 부분이다.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공부하라는 잔소리도 상당히 하셨던 걸로 아는데 그것 보다 더 했던 잔소리가 용모, 말, 안색이라니. 명문가의 자녀 교육법을 배운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 기본에 속하는 것이라, 정약용이 꿈꾸었던 세상은 공정과 정의, 그보다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수까지 갔는데 해남 강진도 가 보고 싶었다. 강진의 다산초당을 둘러보고 그의 유배생활과 근처의 차밭, 가깝게 지냈다는 혜장 스님이 머물렀던 백련사도 구경가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그 대신 이번 가을쯤, 남양주 마재 쪽 정약용의 생가에 가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쪽엔 실학 박물관도 있고, 둘째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조카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가을에 단풍이 예쁘게 물들 즈음 그곳에 가서 다산 정약용을, 그의 가족들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
이번 여행 내내 정약용을 조금씩 만나며 정약용에 젖어있었다.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문이과 통합 영재가 되었을까, 아니면 평준화된 교육으로 어린 시절 영재였다가 결국엔 평범해졌을까, 아니면 한국에 있지 못하고 외국에서 뜻을 펼치게 되었을까. 정약용 코드에서 가장 큰 키워드는 <애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애민정신을 평범한 나에게도 적용시켜 보려고 한다. 나는 무슨 공무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니 그냥 주변을 잘 돌아보고, 혹시 외롭거나 소외받는 이들이 있다면, 나의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손을 내밀어 보는 것, 그렇게 적용시키면 될까. 돈이나 명예 그 무엇보다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그것이 바로 애민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