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뒤척인다. 시계를 보니 아침 다섯 시 오십 분. 혹시나 다시 잘 까 하고 숨죽여 있는데 코가 막혀 잠에서 깬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여행 와서 늦잠 좀 자면 얼마나 좋을까, 이 녀석은 낭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집에서라면 거실로 데리고 나갈 텐데 호텔이니 그럴 수가 없다. 핸드폰 메모장에 그냥 누워 있을래, 엄마랑 로비에 나가서 책 볼래? 하니 책 본단 글씨에 손을 짚는다. 끙차 하고 일어나 아이의 책을 들고 살금살금 나갔다.
잠옷바람으로 로비에서 화장실 갔다가 편의점 구경하고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는 왔는데 그동안 실컷 노느라 책은 여행지에서 처음 읽어준다. 그러다 보니 둘째도 깼다는 연락이 와서 샌드위치를 사서 올라갔다.
밤새 폭우가 온 모양이고 아침이 되며 다행히 소강상태가 되었다. 오늘의 일정은 아점과 후식을 먹고 무사히 집에 가는 것으로 정했다. 향일암도 가고 싶고 , 케이블카도 타고 싶었지만 전국에 호우경보, 중부지방도 강우량이 상당할 것 같아, 안전 우선 무사귀가가 첫째다.
아침은 간단히 먹고 짐을 정리하여 근처 백반집으로 갔다. 진짜 아무 데나 들어가도 맛있는 전라도 백반이다. 갓김치를 사가서 집에서도 먹어봤는데 이 맛이 나지 않았었다. 아마도 한 상 가득 놓이는 모든 반찬의 조화, 여행이라는 여유의 맛이 한 스푼 빠져있어 집에서는 같은 갓김치라도 이 맛이 아닌 것이 아닐까.
후식으로는 근처에 과일주스집으로 갔다. 생과일주스와 어마어마한 과일빙수로 이미 꽤 유명한 모양이다. 아침 일찍 근처에 혹시 문 연 커피숍이 있을까 검색을 해보다 알게 된 곳인데 관광객에게도 동네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인 것 같았다. 후식으로 진한 리얼 망고주스와 수박주스를 한 모금 마시니 동남아 여행 부럽지 않은 시원함과 청량감이 느껴진다. 며칠간 과일을 못 먹어서 조금 아쉬웠는데 주스 한 잔으로 아쉬움이 정말 날아간다. 백반집에서 과다 섭취한 나트륨이 중화되는 느낌도 났던 건 기분 탓일까.
주스집에서 나와 여수시내를 한번 돌고 고속도로에 오르니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전국적으로 이렇게 비가 많이 왔다는데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며 휴가 보낸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
공주를 지나는데 공산성도 비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충청 지역 피해가 컸다는데 천년 넘게 굳건하던 성벽이 유실됐다니 기후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앞으로는 더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몇십 년 만에 가장 큰 비가 아니라 천년만에 가장 큰 비가 아니었을까, 기후변화에 한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부채감이 든다. 내가 마땅히 누리고 자란 것들을 아이들은 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권으로 들어오니 비가 차츰 소강상태가 된다. 회색 하늘 저 끝으로 파란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동네에 들어오니 비는 완전히 그친 상태, 비 오면 짐 끌고 가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이 든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왔다. 집중 호우를 주인 없는 상태로 보낸 집은 첫 느낌부터 눅눅하다. 벽지도 다 습기 먹고 다 울고 있어서 얼른 에어컨을 켜고 제습을 돌린다. 베란다에 물 들이친 부분을 점검하고, 짐을 풀다 보니 몇 시간이 또 훌쩍이다. 꿈같던 휴가는 이렇게 지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집에 오니 또 집이 최고라며 신나게 며칠간 못 갖고 놀았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부지런히 빨랫감을 정리하고 내일 유치원과 학교에 가지고 갈 준비물들을 챙기고, 일상으로 다시 이렇게 스며든다.
이 여행의 추억은 아이들의 기억에선 흐려져도 정서에는 뚜렷이 남아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재미를 남겼으리라 생각한다. 아이들과 여행을 하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그 어떤 것도 아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질 그것보다 소중하진 않기에, 엄마 아빠는 기꺼이 어른의 여행을 포기하고 아이들의 여행을 맞춰주는 것, 아이들은 밝은 웃음으로, 행복한 미소로 엄마 아빠의 아쉬움을 충분하고도 남게 달래 주었으니 모두가 즐거웠던 여행이었다. 다음에 또 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1000킬로미터를 넘게 운전한 신랑에게 감사를, 운전면허 있으면서도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한데, 자꾸 내가 운전하겠다고 해도 그는 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