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부모의 문제, 선생님도 아이도 행복한 학교이기를.
서울 서초구 S초 1학년 담임선생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초등 1학년 학생의 학부모이자 초등 1학년 담임교사를 절친으로 두 명이나 둔 사람으로서 정말 슬픈 일이었다.
1학년 교사 친구 A가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요새 애들이 정말 예전 같지 않다고. 16~17년차 경력의 교사 눈에 그간 아이들의 변화가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데 50대 이상 더 경력이 많은 선생님들이 느끼는 변화는 더 클 거라고도 했다.
요즘 저학년 아이들의 안 좋은 쪽으로의 변화는 코로나19도 한몫을 크게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관 생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고, 했어도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상대에게 다가간다. 보듬기보다 경계하고 거리 두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들, 학습 격차는 더 심하게 벌어져 불안감에, 혹은 불신으로 내가 느끼기에도 사교육 의존도는 더 높아진 것 같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요즘 저학년 학생들의 변화를 보면서 혹시 우리 세대 부모들이 애들을 잘 못 키우나 싶은 반성도 하게 된다. 아들딸 차별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한국에서 외국에서 실컷 할 수 있었던 첫 세대가 나를 비롯한 80년대생 학부모들이 아닌가 싶다.
이 세대가 부모가 되고 쏟아져 나오는 육아서를 탐독하지만 애들 키우는 일이 어디 책대로 되나. 지식보다는 지혜, 불의에 맞서기도 해야 하지만 부당해도 조금 참는 것이 필요한 것이 육아의 영역인데 애석하게도 이 부분은 매우 서툴다. 똑똑해서 서툼에도 익숙지 않다. 잘하려고 노력할수록 무언가 더 어려워진다.
게다가 학교 민원이나 소통의 문은 낮아졌으니 이렇게 저렇게 한 마디 보태는 것이 쉬워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불이익을 받는다는 속설도 돈다. 그래서 너도 나도 한 마디 한 마디 첨언을 해야 똑똑한 엄마가 되는 분위기이다. 엄마가 너무 가만히 있으면 아이에게 신경을 안 써준다나.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 정도로 선생님들을 못 믿지 않는다. 존경하는 스승이 많을수록 아이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 존경할 만한 스승만, 그런 동네만 찾아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스승을 만나도 그분을 따르고 배울 점을 배우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 아이의 앞길에, 아이의 행복에 유리하다는 말이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 나오는 할머니 육아가 절실한 요즘이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스스로 자란다. "장혀, 뒤았어, 몰러, 워쩌, 저런" 하는 칭찬과 격려, 응원의 말속에서 자립한다. 똑똑한 엄마의 완벽한 통제보다 지혜로운 할머니의 빈틈이 아이를 더 훌륭하게 키우는 법이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 아이에게 빈틈을 주자고 다짐했는데 어느새 잊었다.
교사 친구는 말한다.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혹시 전화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먼저 물어보라고. 전화할 일인지 아닌지 자기가 먼저 알려준다면서. 들어보면 대부분 쓸데없는 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말한다. 우리 세대 부모가 아이를 잘 못 키우는 것 같다고.
아이 양육의 궁극의 목표는 독립과 사회생활이다. 사장님이 직원을 봐주지 않듯이, 동료 직원들끼리 지켜야 할 선이 있듯이, 자기 할 일을 누군가 대신 해주길 바라서는 안 되듯이 가정과 학교에서 그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당함을 당할 때도 있고, 하고 싶은 대로 못 할 수도 있지만, 그게 사회생활이니 학교생활도 비슷하게 해 나가며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애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모두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학부모들이 각성할 일이다.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스승을 많이 만들어 주어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할 것, 우리 부모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