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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Sep 18. 2024

이런 더위라니.

여~~~~~~~~~름의 끝은 어디에

늦은 폭염이 지난하다. 추석에 이렇게 더웠던 적은 모르긴 몰라도 내 40 평생에 처음인 것 같다. 아파트 나무들을 보니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린 상태다. 찬란한 가을빛을 뽐내지 못하고 더위에 말라 사그라진 모양이다. 아파트 관리하시는 분들께서 가을에 낙엽 쓸어낼 때나 쓰시던 강풍기를 들고 뙤약볕 아래 낙엽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리신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올 가을 우리 아파트에는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보게 될 모양이다. 톤 다운된 빨강 노랑 주황의 찬란함. 사계절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을 올해는 가까이에서 볼 수 없으려나, 이렇게 슬프다가도 다른 여행지에 가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니 이렇게나 단순하게 지구온난화를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란 하고 혀를 끌끌 차게 된다.


나뭇잎이 없어진 나무

설상가상으로 집 에어컨이 고장 났다. 냉매가 부족하다며 찬 기운이 없는 바람만 빼내고 있는 중이다. 한 번 집안 전체에 냉기를 주고 에어컨을 27도 절전으로  두고 있으면 뛰어노는 아이들은 땀을 흘릴 때가 있지만 그럴 때는 물로 샤워 한 번 시키면 그만이라 선풍기를 따로 두지 않고 살고 있는데 달달거리는 선풍기마저 아쉬운 요 며칠, 뭐? 서비스 가능 일자가 9월 30일? 아이고 큰일이네. 냉장고에서 더치커피 원액과 우유를 꺼내 벤티 사이즈 컵에 라테를 말아서 마신다. 벌컥벌컥.


적당히 더웠던 시절이 있었다. (슬프지만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끽해야 보름 정도 아주 더웠고, 찬 물로 씻고 얼음 띄운 미숫가루를 먹으며 부채질을 하면 웃을 수 있었던 시절, 그때는 더위뿐만 아니라 추위도 뭐도 다 적당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모두에게 공평했다. 그 적당함과 공평함의 균형으로 한여름도 한 겨울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새봄에 움트는 생명을 보며, 천신만고 삼복더위 끝에 뽐내는 찬란한 색깔을 감상할 여유도 우리의 삶은 그렇게 지금보다는 다른 방향에서 조금 더 풍요로웠다.


마시는 커피도 둘둘둘, 셋둘하나, 그렇게 몸에 좋지 않다 하는 프리마와 설탕을 넣어 먹었지만 그 또한 작고 예쁜 커피잔에 한잔, 혹은 두 잔 적당히 마셨기에 괜찮았다. 어쩌다 한 번 먹는 소시지와 햄이었기에, 가끔 생기는 용돈으로 사 먹는 불량식품들이었기에 식품 첨가물과 식품 위생에 무지했지만 괜찮았다. 지금의 나처럼 벤티잔에 커피를 타 먹는 엄마도 없었고 뜨거운 물에 햄을 데쳐서 자주 반찬으로 내어 주는 집도 많지 않았다. 가공식품이 오히려 더 비쌌던 시절이었으니.


그 시절의 적당함으로 우리는 행복한 기억을 가지고 자랐다. 더위도 추위도 자연스러웠고 몸에 좋지 않다는 음식들도 가끔 먹을 수 있는 꿀맛 특식이었기에 금기의 기억보다는 행복에 기억에 가깝다. 그 적당함에 젖고 젖다 모자라 극단으로 치달은 지금, 9월 중순에 더위에 지쳐 잎사귀를 다 떨궈버린 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지나쳤구나. 너무나 지나쳤구나.


한국인들이 기후변화에 유난히 둔하다고들 한다. 집집에 한여름템과 한겨울템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더우면 에어컨 틀고 추우면 전기장판 꺼내고 패딩 꺼내 입으면 되니 9월 말까지 덥다가 10월 초에 갑자기 추워져도 우리는 대비할 수 있는 장비들을 갖추고 있어 그렇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까지 덥다가 내일당장 추워져도 에어컨을 끄고 보일러를 돌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내 집 앞에 사는 나무들 생각은 못 했다. 실외기 열기에 더 덥진 않았을까. 생전 처음 겪는 일, 이렇게 일찍 나뭇잎을 떨구며 어쩌면 지구의 종말을 느끼진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더워서 정신이 번쩍 들고, 벌써 앙상해진 나무들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드는 요즘이다. 나 더운 거야 뭐 며칠만 고생하면 될 일이지만 우리 나무들은, 이 지구는 어째야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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