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한국국제학교의 한국어부 중등과정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나뉜다. 뻔한 얘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근무를 시작한 첫 해에 중학교 입학생의 숫자가 적어서 중1학년 2명, 2학년 1명과 3학년 8명뿐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1, 2학년을 묶어서 한 반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래도 각 학년의 학생이 24명 내외로 작지만 탄탄했다. 홍콩에 주재원 등으로 나온 한국 학부모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는 해외에 나와 있는 동안 영어 공부할 기회를 갖으려 한다. 누구가 가고 싶어 하는 영국국제학교는 선발인원도 적고 시험을 치러야 해서 홍콩에 온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입학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옆에 있는 캐나다 국제학교나 미국 국제학교를 보내거나 한 캠퍼스 안에 있는 국제부과정에 보낸다.
한국대학 진학을 결정하고 나면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 홍콩의 여러 국제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온다. 내 주요 업무 중에 하나가 어느 시기에 한국국제학교로 전학 올 것인가를 상담하고 1년에 두 차례 식 공개 입학설명회를 한다.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지역 신문에 한국 입시 관련 칼럼을 게재한다.
교육과정은 교육부에서 정한 학년별 필수 이수 과목과 시간을 설정한 후에 영어 시간을 확대하고 중국어 교과도 이수한다. 교사수가 부족해서 심도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는 전 세계한국국제학교에서 선호지 1순위였다. 한 캠퍼스 안에 한국부와 국제부를 운영하는 유일한 학교이며, 좋은 환경과 영어 공부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리라. 싱가포르한국국제학교가 홍콩한국국제학교를 벤치마킹해서 1993년에 첫 고등부를 개설했다.
기존에 근무하던 현지 채용 교사들의 구성은 훌륭했다. 주재원으로 나왔던 남편이 현지에 사업 등으로 정착한 후에 휴직 교사 등의 신분으로 현지 채용교사로 근무했다. 좋은 이력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가득 찬 교사들로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역할뿐 아니라 이모나 엄마의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학교는 그래서 마을 공동체 학교와 같이 분위기가 좋았다.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해외 명문대 출신으로 미국 혹은 홍콩 교포였다. 수준 높은 영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 혹은 개나다에서 온 원어민 교사가 있었다.
한국에서 온 교사들의 역할은 최근 한국대학입시의 동향과 정보를 분명하고 긴밀하게 학생들에게 적용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현지 교사들과 한국에서 온 교사들 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다행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잘 지냈다. 작은 학교의 특성상 학생들의 개별적 특성과 학력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고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 그래서 과도한 수업 준비에도 불구하고 학교 생활은 활기차고 즐거웠다.
내 경우에도 중학교 2학년,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국어교과를 담당했고 방과 후 논술 수업을 개설했다. 중국 T시의 한국국제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은 규모의 중등학교 교사는 한국과 달리 수업과 교재 연구에 시달린다. 이곳에서도 역시 4개 학년의 교재 연구와 시험 출제 그리고 방과 후 수업 준비로 학기 내내 정신이 쏙 빠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보여준 열정과 일상에서의 애정이 이 모든 것을 잊게 했다. 특례시험의 특성상 대학별 고사가 입학의 당락을 좌우했기에 학생들 사이에 내신 점수를 쟁취하기 위한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수업 분위기뿐 아니라 수행평가나 정규고사의 성적이 나올 때도 웃으면서 성적표를 배부한다.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을 교사와 학생이 서로 의논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여서 가르치는 즐거움이 컸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다양한 교육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에 교장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고 교사 간의 협의도 잘 이루어졌다. 학부모들이 대부분 금융계, 외교부에 근무하고 그리고 현지 사업을 했기 때문에 방학중에 진로체험으로 '금융계', '외교부', '한인회' 등의 인턴십을 할 수 있어서 자신의 진로를 미리 경험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것도 홍콩만의 기회였다. 지금의 나이스 시스템이 없었던 때라 각종 공문이나 사무 행정업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과도한 수업 부담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학생’이라고 말한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이것은 평생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변하지 않는 일관된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교사로서 한 가지 원칙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학교는 한 가정의 자녀가 공교육, 공동체 교육의 첫발을 내딛는 곳으로 사회로 내보내기 전에 지적, 정서적, 사회적인 적응 훈련을 하는 곳이다. 또한 학교는 우리 아이들이 진로를 선택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지식을 연마의 장이다. 잘 가르쳐야 한다.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지를 수 있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수와 말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소통을 통해 성숙한 사람으로 세상에 내보내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학생을 보호하는 마지막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저지르는 어떤 행동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으로 인해 생긴 갈등으로 부모가 어떤 행동을 보여도 납득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간에 갈등이 생기면 많은 시간을 두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 만일 소통이 되지 않아 서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론이 날지라도 내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한 학생의 잘못에 대해 처벌하는 것을 피하자는 주장이다. 스스로 잘못을 깨닫도록 하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물론 교칙과 학칙이 있으니 누구에게나 형평성을 갖고 적용되는 일이지만 논의 과정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전혀 통제되지 않아서 퇴학에 처한 학생과 학교를 설득해서 전학을 보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퇴학은 학교교육의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없는 박탈의 의미다. 전학은 새로 시작하면 된다.
그런 학생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결혼해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버지로, 건실한 사회인으로 제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연락하고 찾아 온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내 신념이 일관되게 지켜질 수 있었다. 원칙대로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칠 수 있도록 기회와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나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