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개학식이다. 2월 18일부터 수업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홍콩한국국제학교 첫 학기 출근일인 샘이다. 아들과 손을 잡고 함께 등교하는 길은 유쾌했다. 아이와 나 그리고 아내는 모두 홍콩의 삶에 만족했다. 음식점 옆을 지나다가 길가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매미만 한 끔찍한 날개 달린 바퀴벌레만 만나지 않는다면 이곳의 삶에서 방해받을 것은 별로 없어 보였다.
아이는 홍콩한국국제학교의 국제부에 다녔다. 이 학교는 국제도시인 홍콩의 특성에 따라 한국정부에서 세운 세계 30여 개 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별도의 국제부를 운영한다.영국교육과정에 따라 외국인 교장이 운영하는 학교이다. 영어 교육 자체로만 평가한다면 홍콩에서 더 좋은 학교로 이동하기 위한 교량적 역할을 하는 학교, 소위 '브리지스쿨'이었지만 홍콩에 거주한 기간이 짧은 학생들에게는 좋은 학교였다.
학교 환경은 비교적 완벽했다. 건물 1층에는 수영장이 있어서 1년 내내 수영 수업이 있고 우레탄 축구장에서 늦은 오후까지 공을 차고 옥상에서는 농구를 하다가 날마다 땀에 흠뻑 젖어서 집에 왔다. 꾸중하거나 눈을 부릅뜨거나 종아리를 치는 선생님은 찾아볼 수 없으니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물론, 남자아이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동일한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서열싸움이다. 표현이나 접근의 방식이 다를 뿐이지 남자아이들의 갈등의 목적은 같다. 상대의 기를 꺾어서 서열을 확인해 보는 과정은 어디서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같은 학급에는 10여 국에서 온 2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몇 명의 한국 남자아이들은 한국에서 살아 본 경험이 없었다. 한국 남자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영어로만 말하고 무리를 지어 아들을 따돌림했다. 나는 다시 긴장했지만, 아들은 이번에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친절한 영국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의 자신의 책을 아들에게 빌려 주었다.
" 이 책 '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레오니스니켓) 은 아주 재미있단다. 열심히 읽기만 하면 영어 공부는 절로 된단다. 잘 참고 끝까지 읽어보렴. 한 가지 더, 책은 네 몸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구기거나 접거나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이 시리즈는 총 13권으로 보들레어 남매의 불행한 삶을 흥미진진하게 다루며 악당 올라프 백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선생님의 선언이 기적을 나았다. 아들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매일 한 순간도 책을 놓지 않았다. 포스트잇으로 모르는 단어를 찾아서 책 가득히 붙여 넣다가 나중에는 포스트잇의 도움을 별로 받지 않았다. 책도 몹시 소중히 간직했다. 이 책 13권을 다 읽을 무렵 아들은 다음 학기 분반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다른 교과도 공부로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잘 적응했다. 이후로 나는 '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레오니스니켓)의 책 13권을 샀다. 그리고 틈 나는 대로 나도 이 책을 읽는다. 재밌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아들은 성큼성큼 크고 있었고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대부분의 홍콩 교민 자녀들이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서 토요학교에 모인다. 유치원부터 고3까지 400에서 500여 명은 되니 학생들이 모인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까지 뒤섞여 학교는 북새통을 이룬다. 바자회, 놀이마당, 체육대회, 소풍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가 자주 펼쳐진다. 토요일이면 흥성스러운 장터 같은 분위기이다. 이 날이 되면 아이는 약간의 흥분 상태가 된다. 무수한 아이들이 모여서 신나게 노는 게 즐거워서 금요일 저녁이면 잠을 뒤척이기까지 하는 듯하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때였다. 나도 토요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토요학교 아들 담임 선생님의 상담 요청을 받았다. 선생님은 4층 창가의 외벽 창가로 나를 데려가더니 빗물을 흘려보내는 홈통을 가리켰다.
“선생님 아들과 몇 명의 아이들이 이 빗물 홈통을 타고 아래층의 창고와 위층의 골프 연습장을 쉬는 시간마다 오르내려서 정말 위험해요.”
라고 하는 것이다. 4층 외벽에 연결된 홈통은 옥상에서 1층까지 약 10여 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안전장치도 없었다. 혹시라도 떨어지기라도 하면, 하는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우리 아이가 이 위험한 행동을 실행하는 몇 명의 남자아이들 중에 리더 격이니 주의를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이때의 아이들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들은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땅에서 조금만 높이 떨어진 놀이기구를 타지 못했다. 유치원시절 롯데월드에서 '개구리 놀이기구'를 태운적이 있었다. 약 2~3미터 남짓되는 높이에 아주 단순한 놀이 기구였는데 아들은 타는 내내 곤혹스러워했고 얼굴이 노래졌었다. 그 후로도 높은 놀이 기구는 아예 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10여 미터 되는 건물 외벽 물받이 홈통을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려 오르내렸다고 한다. 맙소사!
선생님의 얼굴에 긴장이 풀리지 않은 것을 보니 이게 다는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을 따라 옥상의 골프 연습장에 올라갔다. 그물망이 쳐진 잘 정비된 두 타석의 소규모 골프 연습장이 있었다. 선생님은
“선생님 아드님이 저 골프채를 가지고 여기서 공원을 향해 골프공을 날렸어요.”
라고 하고는 몇 장의 사진을 내어 밀었다. 공원 입구 쪽에 있는 세탁소 계단 타일이 몇 장 깨진 사진과 공원에 떨어진 골프공 사진이었다.
“늘 사람들이 오가는 주택 가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오가는 공원이어서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어요. 다행히 운이 좋았어요.”
라는 말을 하고는 뒷말을 아꼈다. 나는 사진을 받아 들고 최대한 공손한 표정과 말씨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를 데리고 타일이 깨진 세탁소를 찾아가서, 주인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수리비 영수증을 받아 들고 수리비를 지불했다. 보통 홍콩은 이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경찰에 신고한다. 예를 들어 위층에서 쿵쾅거리고 시끄럽게 굴거나, 누수가 되어도 직접 올라가서 항의하지 않는다. 반드시 관리실을 통해 민원을 해결하는 것이 관례이다. 만일 세탁소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다면 복잡한 순서를 밟아야 한다.
공원에 한쪽에 아들을 데리고 갔다. 화가 났지만 최대한 감정을 다스리고 얘기했다.
“네가 날린 골프공에 누군가 맞았다면 중상을 입었을 것이고, 너는 감옥에 가고, 비자 갱신은 되지 않아 추방돼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아빠는 평생 그 사람의 병원비를 대고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이 너를 도우셨다. 아빠 생각에는 이 놀이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과장했다. 논리도 없는 확대된 나의 호소가 효과가 있었다. 아이는 그 후로 옥상 배수 홈통을 타는 놀이와 골프 놀이를 끊었다.
* 이 글은 2000년대 초반 제가 근무했던 때의 일을 적은 것 입나다. 지금의 학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먼 옛날의 일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