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크는 아버지 30화

에필로그

by 순례자

이제 연재의 종착력에 다달았다. 아들 얘기를 해야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들의 진학진로지도에 대한 이야기로 이 연재를 마무리하려 한다.


나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이며 업무의 대부분은 진학과 진로를 담당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한국을 떠나 중국 그리고 홍콩에서의 10여 년의 교사 생활 동안 학사일정과 입시 지도를 담당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몇 년 동안 진학부장을 했고 그 이후에도 대학 수시면접을 지도하고 있다.


이렇다 할 경력도 아니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교사 생활의 전 기간 동안 진학지도에서 손을 놓은 적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건 한 분야에서 30년쯤 일하면 그 일에 대해 일말의 통찰력을 갖는다. 유명한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은 이러한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숙련의 법칙'으로 설명하며,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다. 이 법칙은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능력을 달성하려면 적어도 1만 시간의 집중적인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약 34개월 정도 시간을 투자하면 어떤 것이든 일가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적어도 이것의 10배는 되는 시간을 입시와 함께했다. 그래서 학생을 만나서 상담하고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보면 나름대로 직관과 통찰력이 작동된다. 보면 안다. 상담이 시작돼서 생활기록부를 잠시 들여다 보고, 성적을 확인하면 어느 대학에 합격할지 대략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측이 별로 벗어나간 적이 없다.


다시 나의 아들 얘기로 돌아가자. '숙련의 법칙'에 의해 훈련된 나의 가장 주된 관심은 내 아들이었다. 육아의 원칙을 세웠다. '책을 사랑하는 아이', '땀 흘리며 뛰어노는 아이', '악기를 2개쯤 연주하는 아이'로 기르자는 자녀 양육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삶을 즐겁게 누리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우리에게 아이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임신을 확인한 후에는 모든 행동을 삼갔다. 듣고, 보고, 말하는 일에 품위를 지키기로 아내와 마음을 정하고 대중문화, 오락의 부류에 속하는 모든 일을 끊었다. 임신 기간에 클래식을 듣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 보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서 양육하는 동안도 이 원칙을 지켰다. 함부로 눕거나 TV를 켜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았고 폴더폰만 썼다. 가족 모두가 교양 프로그램 혹은 선별된 영화를 보거나 함께 책을 읽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축구, 농구, 수영 등을 오랫동안 가르쳤다. 이 중에서 바이올린은 고3 때까지 배웠고 바이올린 ABRSM grade 8을 획득해서 유럽음악대학 입학 시에 유리한 조건을 갖출 만큼 열심히 했다.


나는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산과 들과 강과 바다를 다니며 야영과 캠핑을 했다. 곤충채집, 곤충 기르기, 각종 만들기, 운동 등을 함께 했다. 정적인 독서와 동적인 다양한 활동과 균형을 맞춰서 일상을 보냈다.


부모의 바람대로 아들은 책을 사랑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하고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긴다. 용돈의 대부분을 책을 사는데 쓴다. 운동과 악기와 레고블록을 좋아한다. 에너지가 많아 매사에 의욕적이다. 여기에 자존심과 경쟁심도 강하다. 그래서 이따금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공부 얘기를 해야겠다. 언어습득 능력과 암기력이 뛰어났다. 수학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 같았다. 문제를 빠르게 풀고 이해하지만, 마지막 합산을 실수(?)할 때가 여러 번인 것으로 봐서 그렇다. 아이의 강점은 공부한 양에 비해 범위가 넓은 통합시험에 성취도가 높았다. 아들은 평소에 책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공부를 따로 하지 않는 편이다. 하루 이틀에 몰아서 벼락치기로 공부한다. 아들이 중학교 과정을 국제부에 다닐 때 그곳 교장이 전화해서 잠시 보자고 한다.


그는 GCSE(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 시험 결과지를 손에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중등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이다. 한국의 중학교 졸업 자격시험과 유사하며, 10학년과 11학년, 즉 2년 동안의 과정을 마친 후 치르는 시험이다.


GCSE 시험은 9점부터 1점까지의 숫자로 등급이 매겨진다. 최고 등급은 9점이며, 이전 A~G 등급 체계에서 A에 해당하는 성적이 8점, A에 해당하는 성적이 7점이다. 여기에서 아들이 대부분 8~9점을 받았다.


고등학교를 한국어 과정으로 넘어와서는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약 1달 정도 대학생 과외를 하고 SAT1을 두 차례 보았다. 2400점 만점에서 2340, 2360점을 받았다. 아들은 이 점수를 근거로 유학을 보내달라고 몇 주를 우겼다. 나는 연 1억이 넘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고 한국인은 한국대학을 가는 것이 나중 인생을 위해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근거 없는 고집을 세워서 결국 한국대학에 진학시켰다. 이 성적은 학교생활기록부에 올리는 것으로 끝났다.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의 진로를 정할 시기가 왔다. 아들과 의논해 보니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없었다. 책을 읽고 공을 차는 자유가 있는 직장인이 되었으면 좋겠단다.


그 주간에 선교사 한 분이 교회를 방문했다. Y대 치대를 나와서 50세까지 의사로 일하다가 은퇴해서 세계 오지를 찾아다니며 의료 선교를 하는 분이었다. 아들은 예배를 마치고 선교사님을 만나고 난 후에 진로를 의대 혹은 치대로 정했다. 그분과 같은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해외학교에서 가장 취약한 과목은 과학이다. 교사 수급이 어려워서 물리, 화학, 지학, 생물 선생님을 모두 채용하기 어렵다. 보통 두 과목 선생님만 채용하고 물리 2, 화학 2, 생물 2 과목 개설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은 '1'과목도 능통하게 해내지 못했다. 수학도 탁월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이 진로를 치대 아니면 의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내 직업적 통찰력과 직관으로는 불합격이다. 결국 적정선에서 타협을 했다. 아들은 3년 특례의 자격을 갖었다. 한국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총 6장의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2장은 특례로 의대와 치대를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4장은 한국의 학생들과 경쟁하는 대학 수시전형으로 K대 사회학과, Y대 언더우드국제학부 생명공학과와 아시아학부, S대 사화과학부에 원서를 넣었다. 오랜 입시 경력을 가진 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진학 전략이었다. 이유는 아들이 지닌 학업적 특성 때문이다. 인문, 사회 능력이 뛰어나고 수학과 과학 능력은 어느 정도 잘하는 정도 수준이었으니 문이과를 모두 쓸 수밖에 없었다.


초기 결과는 참혹했다. 2장의 치대, 의대는 모두 떨어졌다. S대 사회학부도 떨어졌다. 게다가 보험이라고 들었던 K대 사회학과도 떨어졌다. 다행히 수시전형 해외고 졸업자 전형으로 Y대 언더우드국제전형 생명공학과와 아시아학부가 맨 나중에 붙었다. 아들은 생명공학과에 등록했다. 그해 해외고 졸업자 2명을 선발했다.


이제 대학 입학은 해결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생명공학을 선택한 것은 만일 치대와 의대를 떨어지면 생명공학과를 졸업해서 의전원이나 치전원을 가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에 아들은 개구리와 쥐를 해부하고 나서 내게 전화했다.


"아빠! 안 되겠어. 쥐를 해부를 할 때 거부감이 느껴지고 빨간 피를 봤는데 심장이 떨렸어."


아들은 그것을 혈액공포증(Hemophobia), 해부공포증(Anatomephobia)이라고 했다. 내가 평생 하는 일이 학생의 적성에 따라 진로를 찾고 진학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컨설팅한 내 아들의 진로 선택은 최악이었다.


진로를 다시 찾는 중에 아들이 언더우드 국제학부 경제학과 수업을 들었는데 아주 재밌었다고 했다. 그래서 경제학과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다행히 이 두 번째 선택은 성공했다. 생명공학과 성적이 반타작을 하는 동안 경제학과 성적은 아주 좋았다.


나는 3학년을 마치고 아들을 반강제적으로 설득해서 군대를 보냈다. 군대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아들은 용산국방부에 영어 통역병으로 근무했다. 큰 어려움 없이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졸업을 했다.


아들은 생명공학과 경제학 복수 전공을 했고 한학기 일찍 졸업했다. 곧바로 홍콩으로 갔다. 글로벌 투자 은행에 취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힘겹고 어려운 수고를 거듭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홍콩의 직업 현장은 한국보다 훨씬 경쟁이 심하다. 노조가 없기 때문에 노동자의 노동권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노동자나 사용자 모두 2개월 전에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면 언제든지 자르거나 그만둘 수 있다. 이것이 때로는 장점으로 때로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몸 값을 올리면서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메뚜기처럼 옮겨 다닌다. 아들은 미국계 글로벌 플랫폼 회사를 거쳐서, 미국계 글로벌 금융투자회사를 3년 다니다가 지금은 미국계 글로벌리서치 회사에서 기업 국가 신용평가를 하고 있다. 몇 년 커리어를 쌓고 나면 다시 이직해서 자신이 최종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내가 아들을 도울 수 있는 지적이고 기술적 측면의 도움은 줄 수 없다. 아이가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때로 지치고 힘겨울 때, 큰 나무처럼 바위처럼 말없이 하는 말을 받아주고, 쉴만한 물가나 그늘을 만들어 주고, 기댈 수 있도록 몸을 내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 두서없이 써나가다 보니 어느새 30화 연재가 끝났습니다. 그동안 긴 글을 읽고 공감하고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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