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소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 : <못>

by 한혜경



인생이 워디 책에 써진 대로만 돼가니요.




젊은 날엔, 내 앞에 펼쳐지는 시간의 도화지에 마음대로 색칠만 하면 멋진 그림이 완성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을 깨달으며 나이를 먹어 간다. 아름다운 그림과는 거리가 먼 형태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속수무책이란 말의 뜻을 절감하기도 하는 가운데 무심한 시간은 흐른다.

그리하여 한 세상 살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내 삶은 어떤 모양으로 기억될 것인가?



소설가 정지아에게 포착된 삶은 ‘짠허고 애달픈’ 것이다.

1990년 장편 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지아는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인물들을 창조하여 세월의 무정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엄연함을 그리고 있다.

한평생 양지를 밟아 본 적이 드문 인물들을 통해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살고 있는 민초들의 팍팍한 삶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다.


<못>, <봄빛>, <봄날 오후, 과부 셋>(모두 <<봄빛>>에 수록)은 모두 봄날을 배경으로 노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들이다.


9788936437046.jpg



노년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는 데는 가을이 어울릴 법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부신 봄빛 아래 펼쳐진다. 봄빛은 따스하지만,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자이건 불행한 자이건 누구에게나 "골고루 따스하게도 내리쪼이고" 있지만, 그 아래 벌어지는 인간들의 아픔이나 괴로움을 위무하는 것은 아니다. 봄날은 따뜻하지만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따뜻한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인생이 워디 책에 써진 대로만 돼가니요”


<못>의 주인공 건우 씨는 태어나서부터 예순이 넘은 현시점까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험한 삶으로 내몰린 인물이다. 태어나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어미 목숨을 잡아먹고 나온 자식’이 되어 버렸고, 다섯 살 때 병명도 모르는 병을 앓고 반병신이 된다. 일곱 살부터 작은 집에 맡겨진 그는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으려면 새벽부터 일어나 일해야 한다는 누이의 말을 신조로 삼고 살아온다.


부지런히 일을 해서 땅을 마련하고 결혼도 해서 아이도 낳았으나 여자는 백일 지난 어린것과 논문서를 들고 사라진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 "사방 천지에 웃음을 흘리고" 다닐 정도로 흐뭇했던 순간은 손으로 물을 움켜쥐면 금세 흘러나가듯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


행복이란 허용되지 않는 듯한 건우 씨의 삶에서 유일한 낙은 일 년에 한 번 자운영이 필 무렵 찾아오는 누이를 만나는 것이다. 새벽 단잠에 취한 일곱 살짜리 동생을 깨워 집을 떠나며 “오늘부텀 새복에 인나야 혀. 니가 젤 먼처 일나서 마당 씰고 군불 때고 그려야 혀.” 하며 호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 내야 하는 자의 수칙을 일러 준 누이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평생 멘토인 셈이다. 건우 씨가 장가 간 후에는 “남들맹키 식구 건사하고 살라먼 남들 보담 시배는 열심을 부레야 한다”라고 알려줬고, 나이를 먹은 뒤에는 “늘그막에 돈할라 없으먼 천덕꾸러기 되야.”라고 조언한다.


이처럼 동생을 걱정하지만 누이는 단 하루 머물고 시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 건우 씨는 누이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누이의 손과 자신의 손을 새끼줄로 꽁꽁 묶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눈을 뜨면 누이는 가고 없고 그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건우 씨는 매번 포악을 부려 왔다. 밥도 안 먹고 일도 안 하고 소주를 들이부으며 문짝을 걷어차고 횃대를 때려 부수기도 했지만, 그런 세월이 십여 년 흐르자 어떻게 해도 누이는 떠날 것이고 자운영이 피면 또 돌아올 것임을 알게 되고부터 더 이상 새끼줄로 손을 묶지 않게 된다.


'소주 됫병을 들이붓지 않고는 마음에 일렁이는 화증을 견딜 수 없던 시절’도 있었으나 자신이 쥘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빈손’ 임을 깨달은 그는 자신에게 부과된 삶의 무게를 감내하며 살아간다.

누군들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만 ‘그리 살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 시상지사 世上之事’(<세월>)인 것이므로, 밥을 먹고 기운을 차려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하찮은 것에라도 기대어 고단한 삶을 이어 가야 하는 것을 작가는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와 같이 팍팍한 삶을 몸으로 뼈아프게 겪어낸 자에게 인생은 책에 기록된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인생이 워디 책에 써진 대로만 돼가니요”라는 말은 뭐든지 책에 쓰인 대로 하려는 도시에서 귀농한 옆집 남자에게 건네는 말일뿐 아니라, 직접 몸으로 생의 굴곡을 견뎌낸 자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이라도, 기운 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keyword
이전 04화소설에 나타나는 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