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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12. 2024

나방의 날갯짓

“저는 미리 가 있겠습니다.”


눈치 빠른 노인이 황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말이 없는 사내를 향해 은평의 목소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나는 용서를 고깝게 내밀 만큼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오세요. 제가 얼굴을 맞대는 대화를 청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란 말도 함께 전해 주시고요.”


짝눈 사내는 다문 입을 열어 얕게 숨을 들이마셨다. 처참하게 굳어 있는 사내에 덩치가 위로의 눈빛을 보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친구를 부디 너그러이…”


“회장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해 두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문외한의 눈을 가진 그 사람에겐 우리의 일들이 성의 없는 따분함에 불과했던가 봅니다.”


“보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그저 겁에 질려 있는 것입니다. 일에 사명감이 있는 아이입니다. 이번 일에 있어 말보다 행동이 앞선 것 역시…”


짝눈 사내의 말이 멈췄다. 덩치가 붙든 것도, 은평이 손을 올린 것도 아니었다. 육체적 직감이었다. 사내의 눈이 자를 댄 것처럼 은평의 눈과 맞닿아 있었다. 짝눈 사내는 마른침을 삼켰다.


“잘하셨습니다. 말을 계속 이어 끝마치셨더라면, 당신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따분함을 느끼는 종자구나, 하는 저의 실망과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요.”


들쭉날쭉한 호흡으로 흘러나오는 은평의 말은 폭우 같았다. 집 안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창밖의 빗방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은평을 바라보는 짝눈 사내의 눈빛이 창문 앞의 사람, 그처럼 무기력했다. 그리고 그때, 기성이 실실 쪼개며 그 둘 사이로 소리를 집어넣었다.


“큭큭큭, 어제오늘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만 만나는군.”


그에 은평이 말했다.


“기성 씨.”


“애당초 이상하다는 말이 역설인 건가? 그렇다면 정상이란 단어는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게 되는데…”


계속되는 기성의 혼잣말. 그리고 줄곧 대화에 끼지 못하고 있던 덩치가 오랜만에 말문을 열어젖혔다.


“이봐, 형씨. 상황에 집중하지, 그래.”


그리고 한마디의 말을 내뱉은 덩치는 곧장 은평의 눈치를 살폈다. 은평이 치켜든 팔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기성 씨의 눈에는 우리들이 이상해 보이나 봅니다.”


“그래요. 당신들과 같이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저의 정신이 제게 애원을 할 태세입니다. 인제 그만 끝내 달라고.”


“재밌군요.”


“기성 씨가 제 부하직원으로 태어날 운명이었더라면 우린 꽤 어울리는 짝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기성은 대꾸했다.


“신을 믿지 않던 나로서도 지금은 신을 믿을 수 있겠어. 신이라면 까짓 인간 한 명의 생사 따윈 눈 깜짝할 시간도 걸리지 않아 처분했을 테니까. 바로 여기서.”


기성과의 대화에서 은평의 얼굴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기성은 은평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이 새끼가!!!”


덩치가 막으려 나섰지만, 그는 느렸고, 그전에 이미 은평의 괜찮다는 만류의 신호가 그에게로 뻗어 나와 있었다. 기성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아가씨께서 왜 우리 가이드 씨를 택하였는지 이제 좀 알겠습니다. 눈치가 좋군요. 거기다, 보기와는 달리 화를 내는 방법도 알고 있고요.”


등을 툭 밀면 눈알을 파고들 듯한 짧은 거리.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같이 간 그녀와 당신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어.”


기성은 은평을 향해 뻗친 두 손가락을 주먹 속으로 거두어들였다. 기성이 손을 거두자, 은평의 입꼬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갔다.


“그건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입니다, 기성 씨. 완벽하길 포기하면 되죠.”


“뭐?”


“사람들은 왜 두서없이 덤벼 오는 상황에 놀란 모습을 보이는 걸까요. 자신의 인생이 보다 완벽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굴곡. 사람들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존재이죠.”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런 그들도 행운이라 불리는 놈은 양팔 벌려 환영하거든요. 굴곡은 마주하기 싫어하지만, 이가 되는 굴곡은 환영한다. 우습지 않습니까?”


은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성의 몸통이 덜커덕거렸다. 말을 듣는 와중에 무게중심이 다친 발목 쪽으로 치우쳐진 것이다. 기성은 철저히 신음을 숨기면서 무게를 왼편으로 옮겨 보냈다.


“저런.”


은평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말을 멋스럽다는 듯이 해 봤자, 당신 역시 사람이야. 다를 게 없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


“하하하! 기성 씨, 저는 제 가치를 그리 높게 매겨 놓은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 저는 그저 완벽하기를 포기했을 뿐이에요. 완벽은 모두가 이룰 수 없지만, 포기는 다르죠.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쓸데없는 입씨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타의로써 입을 다물고 있던 덩치, 한 사람뿐이었다. 덩치의 두 눈이 틈을 채기 위해 또 한 번 은평의 분위기를 훑어 내려갔다. 그가 볼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었다.


“보스, 불필요한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하루의 운수가 제일 없는 사람 역시 덩치였다. 강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아주 짧은 시간 속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성의 등을 보고 있던 덩치의 눈망울로 은평의 시뻘건 얼굴이 비쳤다. 순간 눈을 감아 버린 짝눈과 바닥에 고꾸라진 기성. 그 둘을 지나, 덩치의 왼손이 은평의 오른 팔목과 함께 강하게 떨리고 있었다. 덩치에게서 여러 갈래의 피가 흘러내렸다. 목을 관통당한 덩치는 더 이상 말을 뱉을 수 없었다. 덩치의 팔심에 밀려 목에 박힌 칼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은평이 손잡이를 잡은 오른손을 위쪽으로 힘 있게 밀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제 관할입니다. 이전서부터 참 오랫동안 눈엣가시였어요, 당신은. 원체 말귀가 어두운 사람이겠거니, 하고 넘어가 주곤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냥 머리가 안 좋은 사람에 불과했나 봅니다.”


떨림의 세기가 빠르게 꺾여 갔다. 기성은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을 감았던 짝눈 사내가 은평의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덩치와 은평의 팔 떨림이 멎었다. 은평은 덩치의 목에 박아 넣은 나이프를 빼내어 피가 흥건히 묻어 있는 그 채로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시간이 지체됐군요.”


은평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의 눈빛이 묘했다. 큰 눈은 슬퍼하고 있었고, 작은 눈은 화를 내고 있었다. 짝눈 사내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는 침묵했다. 은평은 대꾸 없는 사내를 문책하지 않았다. 사내의 목젖에 매달려 있던 나방의 날갯짓 소리가 사라졌다. 사내는 작은 눈으로 은평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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