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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14. 2024

저택으로부터

달라진 상황 하나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편을 만들고자 길을 나섰던 가현에게 둥지조차 등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들키지 않아야 하는, 기필코 지켜야 하는 마지막 한 사람, 노파. 그녀만이 가현에게 남아 있다. 제집을 도둑처럼 도망쳐 나오라는 전화 너머 노파의 마지막 말이 가현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닫힌 전화를 양손에 꼭 쥔 채 가현은 생각했다. 밤이 오길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지금 당장 집 밖으로 빠져나갈 것인지를. 가현이 고민에 잠겨 있는 찰나,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너무도 공손했고, 너무도 예의 바른 두드림이었다. 가현은 문 앞으로 와 있는 사람이 시안이 아님을 알았지만, 순간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


가현의 고함이 계단을 타고 1층까지 그대로 뻗어 나갔다. 가현의 목소리를 들은 1층의 모두가 손을 멈추고서 2층을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 때문이 아니라, 밖에 세워 놓으신 차량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여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목소리까지 상냥한 여인. 여인의 목소리에 가현의 얼굴 위로 드리우고 있던 창백함이 일순간 자리를 물렸다가 돌아왔다. 가현은 문을 열어 상냥한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여인이었다. 저택에 있던 여인 중 처음으로 시안에게 사과를 건넸던, 또, 오늘 아침 처음으로 시안을 향해 고개를 조아려 보였던, 바로 그 여인.


“아가씨?”


여인이 몸을 살짝 내리며 가현의 이름을 다시금 불렀다.


“아.”


여인과 눈이 마주친 가현은 '연희'라는 이름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연로했다는 것 하나 이외에는 모든 게 연희와 딴판인 사람. 그렇기에 가현은 빠르게 거짓된 유혹을 쳐낼 수 있었다.


“그냥 자리에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가현은 자연스러운 손짓을 곁들여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일러두겠습니다.”


그리고 복도로 돌아서는 여인. 바로 그때, 가현은 그녀의 뒤통수로 물음을 던졌다.


“연희는 어디 갔어요?”


기성과 함께 있으며 가현은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말보다 행동에서 상대의 대답을 먼저 엿들을 수 있는 방법, 눈치였다. 물음을 건넨 가현은 여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목 부위와 어깨 위의 들썩임부터, 떨림을 숨기기 위해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앞치마의 안쪽으로 밀어 넣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본 가현에게 여인의 대답은 더 이상 필요에 속하는 것이 되지 못했다. 가현은 얼어 있는 여인의 등을 강하게 밀치고서 힘이 들어간 손목 그대로를 활용해 문을 쾅 닫았다. 여인은 쉽사리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고, 양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한참 동안 여인은 선 자리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저택의 아가씨가 돌아왔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문 닫힌 방안, 겨울 햇빛이 직선으로 들어오다시피 한 창가 자리에서 가현은 영혼 잃은 얼굴로 왼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평생을 쥐락펴락해 보일 것 같이 굴더니 이게 뭐야. 연희, 너도 그냥 이렇게 잊히고 말 존재에 불과했어?”


그리고 가현은 연희를 향한 나머지 말을 속으로 삼키며 창가에서 떨어졌다.


"할 일이 많아."


“차 키, 있고. 전화, 챙겼고. 지갑, 지갑은 차 안에 있어. 오케이.”


가현은 문을 열고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1층은 하녀들로 가득했다. 때를 노리고 있던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여인들은 더 이상 가면을 숨기지 않았다. 가현이 1층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비웃음 가득한 시선과 목소리가 더해졌다.


“어라? 아가씨?”


누군가 시작을 끊었고,


“어머머, 아가씨!”


누군가 그것을 돋구었으며,


“어, 아가씨. 오시자마자 나가시는 거세요?”


누군가 가면을 채 벗지 못한 상태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현은 여인들의 말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달린 카메라들처럼 느껴졌다. 1층을 밟은 가현은 눈을 질끈 감고서 빠르게 현관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몸이 거의 ‘ㄱ’자 형태가 된 상태가 되어서야, 가현은 손잡이를 돌려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압살에 가까운 상태로 집을 나온 가현은 달아오른 숨을 골랐다. 문이 닫힌 저택은 어두워 보였다. 가현은 숨을 고르며 하늘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없이 푸른색 배경만이 펼쳐져 있는. 그리고 가현은 그와 동시에 끓어오르는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집을 빠져나오는 데 겁을 먹었다는 것, 또, 그 시간조차 잠시에 불과했다는 것, 연희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의의에 얼마나 많은 관여를 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 역시도.


“이럴 시간 없어. 어서 가야 해.”


가현은 차 문을 한 번에 잡지 못했다. 찬바람으로도 달아나지 않을 만큼 손에 땀이 흥건히 맺혀 있었다. 그러하길 서너 차례. 가현은 가까스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가현의 머릿속으로 트렁크에 있을 기성의 캐리어가 지나갔다.


“그럴 시간 없다고.”


그리고 가현은 가방을 앞으로 던지며 뒷좌석 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오른 가현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후진에 맞추고서 가현은 백미러로 저택을 주시했다. 그리고 차를 출구로 몰고 갔다. 핸들을 쥔 왼손은 그대로, 가현은 오른손으로 전화 덮개를 들어 올렸다. 신호음이 이어졌다. 신호는 지난번처럼 다섯 번이었다.


“네.”


전화 너머 노파의 목소리도 다르지 않았다.


“어르신, 저예요. 지금 집에서 나왔어요.”


“숨이 가쁘구나. 우선 숨부터 고르렴.”


가현은 노파의 말대로 했다. 전화를 떼어 내어 오른 창가 가까이 가져간 다음, 풍선을 불듯이 길게 호흡했다. 그리고 가현은 다시 전화를 귀에 붙였다.


“아들이 오지 않았단다.”


노파가 말했다.


“공덕 씨가 오지 않았다는 말씀이세요?”


“가현아, 잘 들으렴. 그리고, 냉정해져야 한다.”


“맨 처음 네 전화를 받고서 나는 내 아들이 그 아이와 얽혀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도 한 사람의 어미에 불과하더구나. 어떻게든 아들을 끼고돌 생각부터 했어.”


노파의 말엔 솔직함뿐, 사과는 없었다. 가현은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참는 것 동시에 노력이었다.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한, 자식을 둔 한 어미의 순수한 모성애를 이기심으로 오해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가현은 말했다.


“계속해 주세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내 아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남 회장 역시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인데, 네 아비는 본 적도 없는 그 아이를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그리고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은평.”


“은평이지.”


가현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그리고 가현은 거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그때의 노파는 은평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는 것. 가현은 스스로 따질 겨를도 없이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놔두었다.


“6층 사내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가현은 노파가 솔직하지 못한 대꾸라도 내뱉길 바랐다. 하지만 노파는 가현의 기대와는 달리 반대를 택했다. 전화 너머의 노파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현은 답답했다. 갈증이 들끓어 올랐다. 가현은 전화를 든 팔의 팔꿈치로 핸들을 누른 뒤, 왼손을 빼내 황급히 차의 창문을 내렸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순식간에 내부의 온기를 모조리 앗아 갔다. 가현은 다시 왼손으로 핸들을 붙잡았다. 그리고 개운해진 머리는 그녀에게로 한 발 앞에 있는 것을 보게 해 주었다.


“그 사람이군요. 일러바친 인간이. 어르신의 아드님이 아니에요. 그렇죠?”


노파는 침묵으로 가현의 말이 맞음을 대신했다. 그 무렵, 가현의 옆으로 버섯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딱 그 지점에서 전화 너머의 노파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전에 말한 그 액자를 운반하는 사람이더구나.”


“액자요? 무슨 액…”


가현은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그래, 네가 그 아이와 가서 보았다던 그 커다란 액자.”


가현은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전화로 잡음이 넘어왔다. 그리고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가늘고 힘없이 뭉개진 목소리가 전화에서 흘러나왔다.


“사람을 넣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액자라 하더구나. 우습지도 않지. 당최 무슨 얘기인지. 오해 말 거라. 내 아들은…”


“사람? 액자에다 사람을요? 그 말 누구한테 들었어요? 그 사람이 은평의 거처를 알아낸 사람이죠? 그렇죠?”


쫓기는 듯한 물음들이 길게 늘어뜨려졌지만, 가현은 이미 그에 대한 답에 충분히 가까워져 있었다.


“내 아빠가 액자에 사람을 왜 넣느냐고 묻잖아!!! 말해!!!”


차가 멈춰 섰다. 가현은 급하게 멈춰 세운 차량의 덜컹거림에도 손에 붙든 전화만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전화 너머의 노파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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