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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01. 2024

온전한 하루란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는 것과 움직임이 없는 것. 성장이 드러나지 않음을 일관 혹은 정체, 둘로써 구분 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평소의 하루보다 한 걸음 물러난 데에서 결과가 이루어지는 날. 1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산보. 루트는 같은 길의 반복이었다. 공덕은 이미 속으로 부를 노래가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공덕은 생각했다. 자신의 실수가 겹쳐 허우적대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남현에게 있는 소폭의 망설임이 상황을 이렇게 조율한 것일까, 라고. 초겨울의 건조한 흙들이 거쳐 지나간 남현의 우산 꼭지에도 더 이상 갈려 나갈 곳이 없었다.


‘탁.’


우산이 땅에 멈춰 섰다. 공덕도 따라 발길을 세웠다. 등대 근처, 헬기가 착륙한 자리와 등대의 등이 어렴풋이 보이는 작은 언덕이었다. 언덕에 올라간 남현이 입을 열었다.


“몇 시냐, 공덕아.”


공덕은 전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습니다.”


“음.”


남현이 소리 내며 고개를 돌렸다.


“점심시간이 진작에 지났었구나.”


남현이 말했다.


“달리 기다리시는 거라도…”


공덕은 물었다.


“시간을 기다렸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시간을 잘 보지 않는다는 것을요.”


“아니, 말한 그대로야. 내가 네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 이 추위에 걸음 동무를 청하였겠니.”


“점심시간을요?”


공덕의 비아냥에도 남현은 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제 연희를 초저녁에 끌어내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 시간을 온전한 하루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덕은 그제야 갈피를 잡았다. 그렇구나, 공덕은 생각했다. 공덕이 남현의 의중을 간파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선이라는 작대기 위에 놓여 있는 보통의 생각을 악의 영역으로 한 바퀴 돌려, 생각 자체를 반대로 뿌리내려 버리는 것. 공덕은 자신이 그 같은 악함을 읽어 낼 정도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남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침묵이란 선택지는 없었다. 공덕은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을 더하는 걸까요?”


공덕의 말에 남현이 몸을 돌렸다. 얼굴에 만족의 기색이 역력했다.


‘탁.’


남현이 우산 끝으로 땅을 푹 찌르며 말했다.


“그래, 정답이야. 네 말대로 시간을 더하는 것이지.”


그리고 남현은 양팔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왜냐고? 이유는 간단해. 나는 연희에게 남은 마지막 하루에 한 움큼의 음식도 쥐여 주고 싶지 않거든. 심지어 물조차도 말이야.”


말을 마친 남현은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공덕의 오른 어깨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품에 있던 열쇠가 소리를 냈다. 남현은 소리가 들린 공덕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공덕의 옆을 지나쳤다. 남현은 우산을 손목에 걸고서 자물쇠를 풀었다.


“여기 있어. 소리가 날 때까지.”


“소리요?”


“알게 될 거야.”


남현은 등대의 문을 닫았다. 등대 안으로 들어온 남현은 밖에서 챙긴 자물쇠를 꺼냈다. 그리고 밖과 똑같이 생긴 안쪽의 고리에 자물쇠를 걸었다. 남현은 한 번 더 자물쇠를 당겨 잠긴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남현은 계단을 올랐다. 한 번에 세 칸씩. 금방이었다.


“역시 자네는 적응이 빨라.”


2층에 올라온 남현이 말했다. 연희는 계단의 입구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말하는 연희의 아래로 입가에 붙어 있던 접착제의 잔해들이 떨어졌다. 남현은 묶여 있는 연희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남현을 올려다봤다.


“나는 많은 것을 가져도 보았고, 또 잃어도 보았지. 한결같이 잃기만 한 자네 같은 사람하고는 결이 달라. 어디, 말이라도 해봐. 사람들이 자네 같은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나 할까.”


“회장님, 제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시지 않을 요량입니까.”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 생각하나. 애매한 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답은 이것이라지. ‘인생은 자신감이다. 자신감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다.’ 맞나?”


“제가 잘못된 생각의 늪에 잠시 정신이 홀렸었나 봅니다.”


“아니, 홀린 건 나야.”


“회장님, 제발…”


바닥을 기듯이 움직이며, 메인 목 위로 말을 끄집어 올려 내미는 연희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추했고, 또 비참했다.


“애석함뿐이 남은 게 없구나, 지금의 너는. 망가져 가는 몰골을 몰라볼 만큼 뒤에서 일을 작당하는 게 신이 났나.”


남현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계속해 이어졌다.


“비통하단 상판은 안으로 집어넣는 게 어때? 기로에서의 여흥이 아직도 선명하지 않은가, 안 그래?”


그리고 남현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보랏빛 칠이 된 리볼버가 조명에 반사되어 일순간 빛이 났다. 남현은 그를 빼내어 연희를 향해 겨눴다.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걸쳐 놓은 남현과 작지 않은 떨림으로써 그를 바라보는 연희. 그들의 시간이 길어졌다. 창밖의 풍경은 변화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해가 바다에 삼켜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등을 밝힐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등대지기를 꿈꾸는 마홈이 머지않아 등대에 모습을 나타내 보일 것이라는 예고를 의미하기도 했다. 망설임의 기로에 있는 남현이 결심으로 행보를 옮겨 놓는 소리. 연희는 그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 든 이의 환청일지도,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된 육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의 연희에겐 숨을 곳이 없다는 것.


“작금의 선택을 분명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제게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아니, 그렇지만도 않아. 적임자를 찾았거든. 그리고 방금 자네의 말은 대단히 어긋난 발상이야.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통제하는 법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나의 불찰이지. 그러니 내가 자네의 끝을 맺어 줘야 해.”


말을 마친 남현의 손가락이 눈에 띌 만큼 크게 움찔거렸다. 눈앞 광경이 연희에게 속삭였다. 이제 더는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고, 당신의 자유는 오늘로 끝이 났다고…, 연희는 크게 울부짖었다. 연희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등대 가득 퍼져 나갔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자신감의 정의를 어떻게 내린 것입니까? 이번 한 번입니다. 그 긴 세월을 충성한 제가 눈을 흘긴 것은.”


“한 번이란 건, 다른 의미로 시작을 가리키지. 그리고 자네는 이미 시인할 시기를 놓쳤어.”


“이번 한 번입니다. 한 번…, 단 한 번의 눈 흘김이 진정 죽음으로 갚아야 할 만큼의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연희의 호소는 거기서 멈췄다. 총구가 연희의 이마 앞으로 다가왔다.


“꼭 나의 인정을 바라는 말 같군.”


“아아. 내가 그를 인정해 주면, 자네가 좀 더 쉽게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뜻인가.”


“미쳤어, 당신은. 아주 단단히 미쳤다고.”


연희도 이제 말을 높이기를 포기했다.


“그것 또한 기꺼이 인정해 주도록 하지. 자네는 그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 주기만 하면 돼.”


“가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가현이라는 이름에 남현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내 딸이야.”


“계속 그렇게 딸을 얕보다간 코가 깨지는 날이 올 거야.”


“참고하지. 그럼, 잘 가게.”


남현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바다로부터 불어온 강한 바람이 등대의 오래된 창과 맞물려 불협한 소리를 뿜어냈다. 밀려온 파도가 표독스레 솟은 바윗덩이를 쓸고 내려가고, 그곳 위에 앉아 풍경을 관망하던 검은빛 영롱한 까마귀 떼들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을 부서뜨리는 단 하나의 총성이 등대서부터 길을 내렸다.


총구에 피어오르는 희미한 연기,

계단으로 흐려지는 육중한 소리.


연희는 아래로 떨어졌다. 남현의 발치서부터 등대의 입구에까지, 바닥은 온통 검붉은 핏자국들로 진을 이뤘다. 연희의 몸통과 계단의 쇠붙이가 부닥쳐 생겨난 굉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세 번. 세 번의 소리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창밖의 태양은 어느덧 한층 더 어두워진 바다에 잡아먹혀 있었고, 그 탓에 한 겹 더 어둑한 분위기가 덧씌워진 등대는 완전히 불빛이 필요한 시점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때, 계단 아래에서 공덕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회장님!!”


공덕의 목소리를 들은 남현은 총을 떼어 냈다. 그리고 소리쳤다.


“미안하군! 이곳에서 일을 치를 계획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남현은 옆으로 몸을 기울여 자물쇠를 겨냥했다.


‘탕!’


공덕의 다급한 발소리가 위로 올라왔다. 단숨에 2층으로 올라온 공덕은 남현의 총을 낚아챘다.


“주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위로 올라온 공덕이 남현의 손을 강하게 내리치며 말했다. 공덕은 연희를 보지 않으려 눈을 좁혔지만, 이미 연희의 시체를 지나쳐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와.”


공덕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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