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Nov 02. 2024

따뜻한 봄

시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모조리 쏟아 내었다. 시안은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다. 꿈이 현실에 있는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수한 장면들을 선사하듯, 부인이 누워 있는 그 공간이 시안에게 그랬다. 꿈과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 공간 역시 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 부인이 누워 있는 공간은 이용할 상대가, 그리고 이용할 마음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치명적이었다. 살을 파고들 날은 몸에 닿기 어렵고 힘들어지는 만큼 가늘고 날카롭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현재, 시안은 그것을 온몸 가득 품어 있었다. 고통을 달콤함으로 착각하고 있는 늑대 새끼처럼.


“…뭔가 후련하다.”


길었던 말의 끝에 시안이 방점을 찍으며 말했다. 두려움과 호기심밖에 없던 얼굴로 아늑하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시안은 말을 끝낸 이후에도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생김새에 눈길을 기울였다. 감긴 눈 위 눈썹의 형태, 코의 높이, 입술의 두께. 잠에서 깨어난 부인이 충격보다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시안은 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그들도 느꼈기에 이 일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걸까.”


시안은 말했다.


“그런 거라면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시안은 눈을 허공으로 옮기며 말했다.


“가현 아가씨에게 비밀로 하는 이유를 알겠어. 그녀에게 이분은 어머니니까. 나와 같은 평온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겠지. 분명 슬플 거야.”


시안은 가현을 상대로 한 자신의 태도를 속으로 다시금 후회했다. 그리고 이제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알지 못하는 기계들. 약품들. 공간의 구조들. 시안은 빨리 남현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모든 것들을 알고 싶었다. 하루빨리 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특히 시안은 노인에게 들었던, 그리고 남현에게 들었던 시작에 대해 알고 싶었다. 노인은 누구이며, 연희는 어떻게 이 일을 수락했고, 남현 자신은 어떤 목적, 어떤 감정으로써 지금까지 부인이란 여인을 보살펴 왔는지. 그 모두를 원을 그리듯 속으로 한 바퀴 감았을 때, 시안은 깨달았다. 지하에서 시간을 너무 허비했음을. 시안은 부랴부랴 공간을 정리했다. 시안은 부인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시안은 덥석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또 올게요.”


“그때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만 왕창 가지고서.”


시안은 뒷발을 물리며 젖혔던 막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덧없다면 덧없고, 막연하다면 막연한, 긴 공간. 시안은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 역시 마찬가지, 그 생각은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가 흐려질수록 또렷해졌다.


‘일어나지 마세요. 적어도 제 차례에서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 시안은 한 차례 손을 탁탁 털고서 바닥에 놓여 있는 덮개를 들어, 드러나 있는 버튼 부에 단단히 체결했다. 꺼져 있던 CCTV가 다시 켜졌다. 시안은 태연히 고개를 돌리며 그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안은 버튼을 눌렀다. 1층의 문이 열리고, 시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인기척이었다. 시안은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내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틈에 시안은 등 뒤의 빛을 빌려 빠르게 눈을 돌렸다. 상대는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시안은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시안을 불렀다.


“집사님?”


시안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린 자신을 집사라고 불러 줄 사람, 누군지 알았기에 시안은 더더욱 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여인은 정수기 앞에 서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과 함께 목도리를 둘러 있었다. 시안은 여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는 범위까지 들어가서야 입을 열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답니다. 그리고, 날이 추워지면 이렇게 잘 아프고요.”


여인이 손에 든 컵을 위로 들며 말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으셨나 봐요. 오후 내내 방에서 나오시지 않던데.”


다행이다, 시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시안은 움츠려 있던 몸을 펴며 대답했다.


“그제만 해도 걷기만 하면 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뜀박질을 하려니 쉽지가 않네요. 회장님께서도 자리를 비우신 상태이고. 오전에 보셨다시피 아가씨께서도 아직 저를…”


“편안히 기다리세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인생은 유한한 기다림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올겨울의 찬바람이 지나가면, 집사님께도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천사의 속삭임과 같은 여인의 말. 시안은 위로를 받았고, 당장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물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 그리고 시안은 그 물음을 내밀 때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했다.


“하나 여쭤봐도 돼요?”


“그럼요.”


“…왜, 왜 저를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아무런 요구도 없이.”


그런 시안의 말을 들은 여인의 얼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불쾌하다는 찡그림도, 불편하다는 물러섬도,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여인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 같았다. 심지어 여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건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일까요. 하지만, 집사님께서 걱정하는 게 뭔지 모르기에 그러는 건 아니랍니다. 누가 봤어도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사람이 누구든, 어떻든,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 자격이란 건 현재의 모습이 결정하는 거라고요. 저는 지금 집사님의 모습이 좋아요. 어린 몸에 상처가 생겼음에도 그저 나아가잖아요?”


여인의 말을 들은 시안은 다시 한번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말하는 건 내가 아닌, 허상일 뿐이라고. 나는 단지 급류에 휩쓸린 연약한 나뭇가지일 뿐이라고. 그러나 시안은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태어나 그렇게 따뜻한 말은 처음 들어 봐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안의 대답에 여인이 들고 있던 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시안은 그 행동의 의미를 잘 알았다. 손을 잡기 위해 그런다는 걸. 그래서 시안은 더 이상 여인의 앞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주무세요.”


시안은 살집 있는 여인의 옆을 억지로 밀고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시안에 여인의 목소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시안은 곧장 연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 주저앉았다.


“최악이다, 나. 정말 최악이야…, 왜 이렇지.”


“회장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현 아가씨도. 기대고 싶어. 그들에게.”


시안은 다시 고개를 무릎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