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영강 Nov 04. 2024

식물인간

노인의 말을 들은 가현은 입을 벌린 채 그저 서 있었다. 가현은 주머니에 꽂은 손을 빼내 있었다. 이젠 숨길 필요가 없었다. 살기 위한 본능적인 호흡만이 가현에게 붙어 있었다. ‘지금의 너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무언가를 해야 해.’와 같은 속삭임들이 가현의 온 사방에서 그녀의 귓가를 쪼아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지점에서 맥없이 사라졌다. 노인은 입에 다시 담배를 물었다.


“나한테 하지 말았어야 했어.”


가현은 말했다.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그리고 가현은 소리쳤다. 소리친 가현은 그대로 노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가현은 노인을 탁자에 넘어뜨렸다. 넘어지는 중에도 노인은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왜 말한 거야, 왜 말해 주는 건데, 지금은 아니잖아. 수십 년이 흘렀어,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고.”


넘어진 노인은 말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가현의 말이 끝난 이후에도 노인은 넘어진 상태에서 입만을 뻐끔거렸다.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노인은 모두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아가씨께서 이곳에 오실 줄 몰랐으니까요.”


노인이 말했다. 말을 들은 가현은 힘을 실어 노인을 탁자 위에 내리찧었다. 부딪치는 소리가 컸지만, 노인은 신음하지 않았다. 노인은 다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때 가현은 깨달았다. 사안의 심각성과 그를 대하는 노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가현은 팽개치듯 노인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물러났다.


“비극이군요.”


노인이 탁자에 누운 채로 말하였다. 담뱃재가 노인의 얼굴로 떨어졌다. 노인은 가만히 있었다.


“비극이라고? 당신의 그 말 한마디로 내 인생이 변할 거 같아? 아니, 나는 돌파할 거야.”


“그렇기에 비극인 겁니다.”


“뭐?”


노인은 눕혀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가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의 얼굴은 알고 계십니까?”


“눈의 색깔은, 체형은, 좋아하는 음식은, 취미, 손의 감촉, 어느 것 하나 아시는 게 있습니까?”


노인의 물음에 가현은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고, 그런 가현을 노인은 계속해 말로 밀어붙여 왔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과 시작을 함께한 사람이거든요. 이제는 시작이 무엇인지 궁금하시겠지요? 시작이라! 정말이지, 이보다 양면의 뜻을 지닌 단어가 있겠습니까? 선의 시작, 악의 시작, 행복의 시작, 불행의 시작, 꿈의 시작, 현실의 시작. 오늘로써 아가씨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으십니다. 오늘의 제 말 때문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가씨 스스로 행하신 발길 때문도 아니지요. 아가씨의 비극은…”


“내 아버지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지.”


가현은 노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당신이 아버지와 합작한 범죄라는 건 알겠어. 기성 씨도 두 사람이 죽인 거잖아? 근데 정말 비참한, 정말 비참한 일이지만 말이야…, 나는 당신에게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들으러 온 게 아냐. 시작이라고 그랬지? 거기서부터 설명해. 그게 대체 뭐길래 내 아버지가 당신 같은 패거리들과 함께 사람들을 죽이게 된 건지.”


가현은 보지 못했다. 풀 죽어 있던 노인의 얼굴 위로 특유의 잔혹한 미소가 떠오르고 지나간 것을. 그렇다. 노인은 웃었었다.


“살고 계신 저택의 나이를 알고 계십니까.”


노인이 물었다. 가현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해로 정확히 30입니다. 아가씨와 한 살 터울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야?”


“저택이 곧 시작점이란 뜻입니다.”


“아가씨의 어머님이 살아 계신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네, 아가씨의 어머님 역시 그 시작점에 함께 머물고 계십니다.”


“…뭐?”


가현은 되물었다. 그리고 곧장 몸을 휘청거렸다.


“감정을 앞세우시면 안 됩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실 수 없으실 겁니다.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나갈 테니, 천천히 따라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부디, 부디 이 이야기에서 도망치지 마시기를.”


그리고 노인은 가현의 떨림을 살폈다. 흐릿한 노인의 눈에도 한계라는 것이 분명히 보일 만큼 가현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가현의 귓가에 울리는 단어들은 정해져 있었다. 시작, 어머니, 저택. 가현은 강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재채기로 발현되었다. 가현은 기침을 참을 수 없었다. 가현은 계속해 콜록거렸다. 가현은 주변을 이루는 멀쩡한 공간의 멀쩡한 물건들이 몸 안으로 들어와 사지를 비트는 것 같았다. 노인의 말을 들음으로써 가현은 오늘, 두 가지 모두를 보게 된 것이다. 산 사람의 죽음, 그리고 죽은 사람의 삶. 가현은 쓰러졌다. 가현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가현은 잡힐 리 없는 평평한 바닥을 움켜쥐고, 또 움켜쥐었다.


“아가씨.”


노인이 이름을 부르며 가현에게로 걸어왔다. 가현은 노인의 그림자가 커다란 괴물처럼 느껴졌다.


“꺄아아악!!!”


가현은 소리치며 앉은 상태로 몸을 물렸다. 가현은 노인의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자아를 잃을 것만 같았다. 가현은 몸에 재촉했다. 어서, 빨리, 제발. 제발 움직여 줘, 라고. 그리고 그때.


“아가씨!”


노인이 땅에서 꿈틀거리는 가현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가현은 노인의 다리를 손으로 때렸다. 노인은 비켜 주지 않았다. 가현을 가로막은 노인의 얼굴은 무엇인가 속으로 마음먹은 듯 보였다. 그리고 그를 반드시 행할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세요! 정신을 차리세요! 도망칠 수는 없으십니다. 양발을 들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 문을 열면요? 나가면요? 그 뒤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작이 궁금하다 하셨습니다. 제가 그 시작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밖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거기까지였다. 가현이 모가지를 비튼 새의 사체를 버리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은. 가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감정이 바싹 타 버린 사람처럼 가현은 행동을 멈췄다.


“모른다니?”


앞서 대화 속에서 노인이 듣지 못한 것이 있었다. 노인이 놓친 것이기도 했다. 부인이란 여인의 행방. 가현은 보지도 못한, 추억도 없는 어머니 따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섬세한 노인은 이제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가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째서? 어째서 모를 수 있지?”


대답 없는 노인을 향해 가현이 다시 한번 더 말하였다.


“아가씨…”


“그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당신하고 우리 아버지, 둘뿐이야? 그렇구나, 그렇겠지. 그 큰 사실을 감추려면 사람이 많을 수 없을 테니까, 입을 막아야 했을 거야. 그런데 어머니는 왜 그런 인생을 받아들인 거지? 이유가 뭐야? 그녀가 숨어 살기를 택한 이유, 이유가 없잖아. 죽을죄를 저질렀나? 자신의 남편처럼?”


“그럴 리가요. 아가씨. 아가씨의 어머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남 회장님과는 달리, 무척이나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이셨습니다. 제가 살면서 보아 온 그 누구보다도.”


노인이 말했다. 노인의 눈시울이 물들려 하고 있었다. 가현은 무시했다.


“그럼?”


“그럼, 뭔데?”


가현은 물었다.


식물인간이시니까요.”


노인이 대답했다.

이전 17화 따뜻한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