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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05. 2024

받아 버린 호의

터벅터벅 힘겹게 끌고 온 다리를 멈추고, 둥근 모양의 쇠 문고리를 잡고서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이가 있었다.


“회장님이십니까?”


안에서 밀코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이 끝났어. 잠시 들어가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남현의 말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오늘 일이 늦어지는 줄 짐작하던 차이었는데, 제 착각이었군요. 날이 차갑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 차로써 몸을 녹이시지요.”


그리고 그의 외형이 두드러지는 장면이 이어졌다. 어찌나 왜소한지, 펑퍼짐한 남현과 옆으로 나란히 붙어 문 하나를 함께 지나가는 것이 가능했다. 무척이나 곱슬한 머리와 족히 190은 되어 보이는 키, 덩치만 좀 더 컸었더라면 보기 좋았을 골격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지금 그대로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색 마감이 좀 덜 된 화폭 하나를 본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차는 됐으니, 술을 주게. 아, 술이 없었지, 이곳엔.”


“그럴 리가요. 섬사람에게 술이란 것은 언제든 꺼낼 수 있어야 하는 존재인걸요.”


“그래? 내게 늘 차만을 내어 주기에 다도만 즐겨 하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군.”


밀코바는 금세 술을 내어와 남현에게 건네주었다. 남현이 건네받은 술잔에 입술을 적시고는 밀코바에게 물음을 건넸다.


“부인은 어디에 있나?”


“피곤하다 하기에 먼저 올려보내 놓았습니다.”


“그거 행운이군. 사실 지금 할 얘기는 듣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거든.”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밀코바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게 드러났다.


“원래와 같았더라면, 그럴 일은 없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오늘은 문제가 생겼다네. 마무리, 끝마무리에서의 차질이야.”


“그래서 항상 옆에 있던 그 사내분이 보이지 않는 거군요. 지금 그 사내가 일어난 문제를 처리하고 있는 거고요.”


밀코바의 그 말과 함께 둘 사이로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이 찾아오고 확실해진 것은 두 가지였다. 밀코바에겐 흔들림이 없고, 남현에겐 흔들림이 있다는 것. 밀코바에겐 연기자라는 가면이 있고, 남현에겐 가면이 없다는 것.


“총을 썼네.”


건조한 입안에서 나와 갈라지는, 거북하고도 불쾌한 남현의 목소리.


“등대의 안에서.”


밀코바는 두 번째 표정을 꺼내 들었다.


‘쾅!!!’


밀코바는 탁상을 힘껏 내리쳤다. 잡화들이 올려져 있던 탁상 위로 술과 뒤섞인 피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아래로 그의 손날에서 떨어져 내린 핏줄기들이 한길로 뭉쳐 남현의 발아래에 이르렀다.


“정말 미안하군.”


남현이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이며 손을 내밀려 하자, 밀코바는 소리쳤다.


“마홈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누가 말리지 않는다면, 끝나지 않을 분노처럼 보였다. 밀코바는 남현을 조각낼 듯 노려보았고, 남현은 반항 없이 그에 순응하였다.


“우선은 진정하게. 계획의 전부를 천천히 말해 줄 터이니.”


“피가 많이 나. 응급처치부터 하지.”


밀코바는 대꾸치 않고 옆의 휴지를 뽑아 남현의 잔에 담긴 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손을 에워쌌다.


“일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설명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요.”


그를 본 남현은 그 이상 상처에 관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가장 궁금해할 자네 아들은 지금 공덕과 헬기에 올라가 있네. 그 아이를 유난히 아끼는 사람이야. 아들의 안위는 보장함세.”


“아이에게 어설프게 말을 하진 않았겠지요?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밀코바의 세 번째 표정은 양 손바닥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남현은 손을 다시 내밀어, 또 한 번의 사과를 표했다.


“나이가 차 있는 아이였더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녀석은 아직 아이이니까.”


“힘든 밤이군요. 솔직히 회장님께 저희 섬을 괜히 빌려 드렸나 하는 마음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벌어진 일이야, 이젠 침착해질 필요가 있어.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네. 들을 준비가 되었나?”


“예, 시작하시죠.”


“내가 자네에게 그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사연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자네 성격상 아마 관심도 없을 것이고.”


“맞습니다. 저는 오늘 밤 이 섬에서 일어난 일의 모든 것들이 아이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게 하면 그뿐입니다.”


“그래. 그럼, 현 상황부터 시작하지.”


밀코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오늘 밤 등대의 정비를 할 예정이었던 자네의 아들은 헬기에 올라가 있다.”


“둘째, 내가 총을 쏜 건 총 두 발. 탄피들은 모두 정리했고, 그녀의 시신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셋째, 그녀는 등대의 전구가 있는 곳에서 계단과 사다리가 있는 쪽으로 떨어졌고, 그곳에는 핏물이 흩날려 있다.”


남현은 단 한 문장의 흐트러짐도 없이 공표하듯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밀코바, 그 역시나 처음의 얼굴 그대로를 유지했고, 끝까지 남현의 말을 경청했다.


“…예, 그렇게 된 거군요. 이해를 마쳤습니다.”


밀코바는 말한 뒤, 얼마간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 사연이 궁금한 것이라면 그조차도 말해 줄 수 있네.”


“아니요. 제가 궁금한 건 그쪽이 아니라, 회장님 감정에 관하여서입니다.”


“내가 계획을 뭉개가며 통제를 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한가?”


“예. 사실은 그도, 처음 회장님의 첫 안색을 봤을 때와 술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실 때, 이미 진즉에 떠올린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주기 이전에 나도 자네에게 하나만 물어보지. 자넨 평소 나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해 왔나?”


남현이 평소에 자주 쓰는 화법이었다. 상대로부터 정곡을 꿰뚫릴 만한 질문이 건네져 오면, 역으로 자신도 상대를 향해 불편해할 게 뻔한 질문 하나를 고스란히 건네주는 것. 그러나 밀코바는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밀코바는 남현에 쉽게 말려들어 주지 않았다.


“글쎄요. 제게는 모든 이들이 동등합니다.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 모두가 손님, 혹은 귀중한 인연이죠.”


“하지만 만약 회장님께서 저 둘 중 하날 택하라고 제게 말씀하신다면, 저는 후자에 회장님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현은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술잔 위를 돌아가는 남현의 가운뎃손가락에서 시작됐다.


“나쁘지 않군.”


“이제 회장님께서 답변해 주실 차례입니다.”


밀코바가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내 대답을 들으면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란 인간에 정나미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은가?”


“정은 이미 오늘 밤에 떨어진 것 같아서요.”


“알겠네. 말해 주지.”


남현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말을 시작했다.


“나는 충의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야. 소년 시절부터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저를 잘 지키는 사람들과 늘 함께이었기에 내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지.”


그를 들은 밀코바는, 지금, 이곳에서 꺼내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가면을 걸치며 남현을 향해 물었다. 그리고 그를 말하는 밀코바의 발음은 어눌하게 바뀌어 있었다.


“충의가 무슨 뜻입니까?”


밀코바의 말을 들은 남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두 가지를 말하는 걸세. 하나는 신뢰, 또 하나는 자신이지. 여기의 자신은 나를 뜻하는 게 아니야. 자신감을 뜻하는 것이라네.”


“신뢰와 자신!”


“그래. 집에서의 대화는 여기까지 함세.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이젠 저도 상황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럼, 회장님께선 먼저 등대에 가 있으시겠습니까?”


“음? 필요한 물건이 많을 터인데, 같이 들지.”


“등대엔 도구함이 있으니 크게 들고 갈 것은 없습니다. 커다란 자루와 끈, 그런 것만 몇 가지 챙기고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가시라는 것은, 한 명이 가서 순서를 미리 좀 정해 놓으면 수월할 것 같아서 한 말이었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밀코바는 집의 안쪽, 욕실로 보이는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현은 그가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본 다음,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진 거실은 조용했다. 화장실에서 달그락달그락, 뭔가를 꺼내고 넣고, 넣고 꺼내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밀코바가 한 손에 커다란 자루와 끈을 움켜쥔 채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조용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던 그때, 위쪽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길게 거실로 이어져 내려왔다. 방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의 얼굴은 처참했다. 못해도 3일 이상은 잠자리에 들지 못한 모습이었다. 눈두덩이는 칠을 한 듯 붉었고, 양 볼과 입술은 홀쭉하고, 메말라 있었다. 방에서 나온 여자는 밀코바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 모두 듣고 말았어요. 차라리 일찍 잠이 들어 버렸다면 좋았을걸. 그러지 못한 결과가 이러한 것일 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우리?”


밀코바는 여자를 본 순간 손에 쥔 물건들을 내팽개치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여자의 앞으로 달려온 밀코바는 여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긴 여자는 굵다란 눈물을 아래로 뚝뚝 떨궜다.


“다 내 탓이에요. 다 내 잘못이에요. 우리 마홈이도, 등대에서 벌어진 일도. 정말 이렇게 일이 흘러갈 줄은 몰랐어요. 내가 모든 걸 다 예쁘게 매듭지어 놓을게요. 그러니 그만 방으로 가 잠을 청하도록 해요.”


“나는 너무 불안해요. 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멀리 데리고 가 버리진 않을까, 아이를 핑계 삼아 우리의 입막음을 요구하려 들진 않을까.”


말을 하는 여자의 입술은 그녀의 눈에 비하면 비교적 온전한 편이었다. 어느 한 곳으로도 맞춰져 있지 않은 초점과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는 눈. 거기다, 흐르고 있는 굵은 눈물방울까지.


“당신은 지금 안정을 취해야 해요. 저 사람들이 오기 전부터 잠들지 못한 게 벌써 며칠이 지났잖아요. 일은 그와 내가 다 해결해 둘 테니…”


여자는 그의 품을 밀치며 크게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 섬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아니, 사람을 죽였다잖아. 처음부터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됐어요. 이 상황을 내게 그냥 보고만 있으라 말하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알아요. 하지만 우린 저 사람들에게 빚이 있잖아요. 나는 그게 너무 무거웠어요. 그래서 이번 일로 그것을 마음에서 덜어 내 버리고 싶었어요.”


“그까짓 헬기! 여보, 나는 병원이 없는 곳에서 아기를 낳을 각오도 없이 이곳으로 오지 않았어요.”


“알아요. 하지만, 이미 받아버린 호의잖아요. 나도 이런 결과를 바란 게 아니에요. 그를 모른다고 말하진 말아 줘요.”


밀코바의 얼굴이 슬픔으로 가득했다.


“아까 당신이 그 사람에게 귀중한 인연에 포함되는 사람이라 했던 말, 그는 진심이었어요?”


“진심이었어요. 우리의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당장이라도 돌아설 수 있는 진심.”


여자가 그 말을 믿고 싶다는 듯 밀코바의 양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놓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제 그만 가요. 당신이 늦으면 혼자인 그가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요, 이해해 줘서. 편히 올라가, 깊이 잠들어요. 다녀올게요.”


“조심해요.”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밀코바는 바닥에 팽개쳐져 있는 자루와 끈을 다시 손에 쥐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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