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떠오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땅으로 가라앉는 어른들의 한숨 소리. 도시의 우울한 색에 찌든 인간들의 눈엔 혐오스럽게 보일 찬란한 형광 색상들. 두말할 것 없이 영락없는 놀이공원의 풍경이었다. 한 손에는 헬륨이 가득 담긴 풍선, 다른 한 손에는 땀이 몽글몽글 맺힌 누군가의 손. 아이들의 양손 중 남아 있는 손은 없었지만, 그들은 자기네 한쪽에 매달려 있는 것이 고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자의 없는 발굽들의 무질서한 흔적. 그리고 그때, 그들 중 유난히 덩치가 큰 말을 곁에 두고 있던 아이 하나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홈이었다.
“아저씨! 이쪽이요, 이쪽!!”
“늑장부리다간 긴 줄 속에 파묻히게 될 거라고요!”
공덕의 허리에 채 미치지 않는 키를 가지고서 연신 폴짝폴짝 뛰며 그를 재촉하는 마홈. 소년은 영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동양의 동그란 얼굴형에 서양 특유의 굵직굵직한 선, 그리고 빛이 나는 금색의 머릿결까지. 겉모습만 가지고 신분을 말하는 시대였더라면, 그의 지위는 말할 것도 없이 귀공자에 속했을 것이다.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헬기에서 내린 공덕의 얼굴은 퀭했다. 공덕이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소리를 내며 마홈을 뒤따라 들어갔다. 그 스스로 지칭했던 휴가의 첫발이 내디뎌진 셈이었다.
“빨리, 빨리요!”
마홈의 눈과 발이 앞쪽으로 팽팽히 앞당겨져 있는 것을 본 공덕은 속으로 조용히 각오를 삼켰다.
‘그래. 고작 하루야, 불사르더라도 괜찮아. 침착해.’
그리고 그런 그의 눈으로 비쳐 오는 마홈의 모습. 마홈은 어떤 유리 벽 앞에 몸을 세워놔 있었다. 공덕은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걸음을 내밟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말을 하는 공덕이 괜한 긴박감을 조성했지만, 마홈은 조금도 그에 휘둘리지 않았다. 마홈은 공덕이 말을 마치길 기다렸다가, 말없이 그의 앞으로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응? 유리? 유리가 왜?”
공덕의 반응에 마홈이 답답하단 듯이 재차 손을 휘저었다.
“마홈아, 아저씨는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하단다. 말로써 얘길 풀어서 해 주면 안 될까?”
“적혀 있어요.”
“적혀 있다고?”
공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놓인 유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떨어진 접착력에 팔랑거리는 테이프, 그곳에 마홈이 가리킨 무언가가 담기어 있었다.
“양생? 저 단어의 뜻이 궁금했던 거니? 저건 일종의 기다림을 뜻하는 말이란다.”
“아니요. 그거 말고, 옆에 날짜요.”
마홈이 글자 옆, 괄호에 담긴 숫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짜?”
“기한이 지나 있어요. 정해 놓은 시간이.”
공덕은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
아이의 이 같은 말에 어른인 나는 어떤 대답을 내놔야 하나.
“그렇구나. 그러네, 공사를 기한 안에 마무리 하기 어려웠나 보다.”
두루뭉술한 말이었지만, 마홈에겐 그렇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마홈의 입에서 시큰둥한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정말 싫어해요.”
“그렇게 하기로 정해 놓았다면, 지켜져야 하는 거라고요!”
몇 초 남짓한 짧은 시간. 공덕은 생각했다.
‘맞아, 시간. 역시 시간을 강박의 대상으로 삼는 아이가 맞군. 그를 처음 들었을 땐 크게 와닿는 감이 없었는데, 이제야 알겠어. 하고많은 것 중에 시간이라니. 나였다면 돌아도 벌써 진작에 돌아 버렸을 거야.’
“아저씨? 아저씨!”
마홈의 목소리에 공덕은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공덕은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단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그래. 좀 괜찮니?”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생각 정리는 끝마치셨어요?”
“미안하구나. 이젠 됐단다.”
“그래요? 그럼 가요!”
놀이공원 입구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길 위의 하늘에는 만국기가 지저분하게 전경을 헤치고 있었다. 아래에는 크게 두 갈래의 대기열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매표소의 몫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프트아이스크림 트럭의 몫이었다. 열의 구성은 부모와 아이가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개중에는 그네들끼리 뭉쳐 안전을 꾀하고 있는 무리도 존재했다.
“저기 있는 애들은 하나같이 관대한 부모를 가졌나 봐요.”
매표소의 차례를 기다리던 마홈이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뱉어내었다.
“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야.”
마홈의 의중을 눈치챈 공덕은 괜한 비아냥을 실어 말했다.
“왜요?”
“네가 말한 관대를 물론 믿음이라 좋게 해석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방치라는 나쁜 해석 쪽이 맞는 경우가 훨씬 더 많거든.”
공덕의 말을 들은 마홈의 표정이 썩 밝지 못하였다.
“어렵지?”
공덕은 피식하는 웃음으로 옆의 마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어른들은 잘 나가다가 꼭 한 번씩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뭐, 이해가 아예 안 가진 않아요.”
“정말? 머리가 비상한데?”
“제가 다른 건 없어도 말귀 하난 밝거든요.”
그리고 마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끝맺었다.
“아마 섬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럴 거예요.”
그러는 사이, 줄은 줄고 줄어들어 이윽고 공덕과 마홈의 차례가 되었고, 그에 발맞춰 공덕은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손에 쥐어 들었다.
“환영합니다! 몇 분으로 도와드릴까요?”
직원이 밝은 목소리로 둘을 반겼다. 길지 않은 머리를 뒤로 돌려 꽁지처럼 싸맨 여직원이었다. 설익은 말괄량이처럼 보이기 쉬운 머리였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단정함이 더욱 돋보였다.
“어른 하나, 아이 하나요.”
공덕이 돈을 쥔 손을 여직원에게로 내밀며 말했다.
“네, 어른 한 분, 아이 한 명. 결제 도와드릴게요!”
직원의 손놀림은 놀라웠다. 군더더기 없이 필요에 따른 움직임만을 째깍째깍 실행해 나가는 것. 그 일에 있어 그녀는 프로였고, 기계였다.
“손이 정말 빠르시네요.”
공덕은 창구 속 여직원에게로 말을 건넸다.
“아, 하하. 아니에요. 이제 막 일이 손에 익어 갈 참인걸요.”
“설마?”
“정말로요. 오늘이 출근한 지 3일째 되는 날이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덕의 왼쪽 팔꿈치가 창구 앞으로 날아가 얹혔다.
“세상에. 저는 당연히 오래 일하신 분으로 생각했어요. 전에 무슨 일을 했길래 손이 그렇게 빠른 거예요?”
그때, 공덕의 왼팔이 아래로 끌려갔다. 옷자락의 끝에는 마홈의 손이 부둥켜 있었다.
“아저씨.”
마홈의 부름에 공덕은 이유를 되묻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털보인 사내와 그의 손을 꼭 붙잡은 가녀린 소녀가 모든 정황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죄송합니다.”
공덕의 사과에도 털보는 불쾌하다는 눈빛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덕은 다시 눈을 창구 쪽으로 되돌렸다.
“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가는 탄식 소리. 그 속에서 공덕은 생각했다.
‘명함을 줘 버릴까?’
공덕의 왼팔이 계속해서 들썩였다. 이제는 소녀의 가시 같은 눈초리도 그와 함께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싶은 공덕과 그로 인한 체증이 눈꼴신 사람들. 공덕은 떠올린 것 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덕은 재빨리 손을 밀어 넣었고, 넣은 손을 황급히 다시 빼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매표소를 지나쳤다. 마홈은 공덕이 빠져나간 자리 뒤로 놓인 여직원의 표정을 보고는 펄쩍 뛰며 물었다.
“아저씨, 몇 살이에요?”
“네 나이의 5배는 될 거야.”
그를 들은 마홈이 깨나 진지한 얼굴로 앞을 보며 걷더니,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공덕을 향해 말했다.
“도둑놈! 저 누나는 제 나이의 3배도 안 돼 보였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