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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11. 2024

식물인간2

밖으로 뛰쳐나가지도,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지도, 이전처럼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노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무런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가현의 모습이. 한겨울의 아지랑이처럼 보였을까. 노인에게서 부인의 사실을 들은 가현은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을 띄고 있어서, 먼저 말을 건네기 미안할 만큼. 시간이 가고, 오지랖 넓은 누군가가 왜 그리 진지한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는 물음을 건넬 때쯤, 가현이 입을 열었다.


“시작. 그것이 시작이군요. 제가 태어나고, 어머니께서 세상에서 잊힌 그때부터가.”


그리고 가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저를 낳을 당시, 쇼크로 인해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식물인간이라…, 어르신이 생각하기엔 어때요?”


가현은 노인의 눈을 바라봤다.


“근 30년을 그렇게 살아온 우리 아버지가, 그 일에 30년 가까이 죄책감에 시달린 제가, 그리고 지금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내가. 얼굴? 온기? 감촉?”


“아가씨…”


“솔직히 말해 볼까요. 저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모면하고 싶어요. 핏줄…, 자식…, 그런 굴레 속에서 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아요. 원래부터 없었으니까. 원래부터 내겐 없던 존재이니까. 어르신은 어땠어요? 그런 집을 짓고, 이곳에서 지샌 긴 시간이?”


비가 내리지 않지만, 꼭 창밖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가현이 말을 마친 그 순간엔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죽어서도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노인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가현은 고개를 떨궜다.


“…죽어서.”


“아뇨. 저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요.”


“그 일은 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은 오늘, 내 사람을 데려간 것만 나에게 용서를 빌면 돼요. 그 사람은 정말로,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고개 숙인 가현의 아래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간 둘의 사이에는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기었다. 나무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이 있는 곳으로 노인은 기었다. 물고 있던 담배를 속으로 삼키며 노인은 기었다. 그리고 가현의 눈물자리로 얼굴을 처박으며 노인이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노인의 모습을 가현은 보지 않았다.


“가만 보면 시간이 제일 탐욕스럽죠. 모든 순간순간이 그들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같고요. 시간은 대체 뭘 바라기에 붙잡은 우리를 이렇게나 돌려대는 걸까요.”


“…”


노인은 바닥에 엎드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들에 반항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제가 어르신과 만나게 된 것처럼. 어쨌든 제가 이곳에 와 버렸고, 그로 인해 어르신도 돌아선 듯 보이니까.”


가현은 노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어나요.”


노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린아이에게 외면하고 있던 교훈을 듣는 순간의 수치심처럼 노인은 무게를 느끼고 있는 듯 보였다. 가현은 이제야 노인을 보았다. 지긋한 세월의 주름진 머리로 눈물을 맞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현은 연희가 떠올랐다. 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노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현은 말했다.


“자, 어서.”


평소와 반대로 움직이는 사람들. 노인은 어깨에 얹힌 가현의 손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노인의 눈에는 붉은 충혈이 만개해 있었다. 뽀얀 얼굴에 그의 눈은 더욱 도드라졌다. 속내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적어도 가현은 진심으로 그 모습에, 그리고 서로의 모습에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가씨.”


고개를 든 노인이 말했다.


“말해요.”


“혹시 저택의 바뀐 집사를 보셨는지요.”


“알아요.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어요. 그 꼬맹이도 한패라는 걸.”


“만나셨군요. 실은 그 친구, 제가 천거하였습니다. 남 회장님께. 이곳에 들렀었거든요. 두 사람 모두.”


“그래서요?”


가현은 날 선 목소리로 답했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은 하나의 결심을 가졌고, 그에서 뒤따르는 무력감이 무엇이 됐든 결국은 끝이 난 것이라고. 말하자면 잔여물과 같은 것이었다. 아기 새의 모가지를 비틀고 남은 몸통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처럼.


“…부탁이라는 말로 운을 띄웠지만,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두고 무어라 표현해야 맞을지. 그 아이의 놀라 하는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심부름만 하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나이 든 제가 원망이라는 감정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아이의 길엔 제가 서 있으니까요.”


“오늘의 제 걸음 하나가 많은 걸 바꾸는군요. 아니, 모두가 만든 걸음이겠죠. 돌고, 또 돌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함에도 그 친구를 살려줄 순 없어요.”


말을 들은 노인이 고개 숙였다.


“그렇게 해야 타산이 맞잖아요?”


목숨은 목숨으로 때우라는 가현의 말에 노인은 침묵했다. 각기 다른 모양이 붙고 붙어서 이루어진 지금의 가현은, 그 모습처럼 통일된 하나의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다. 가현은 기성을 보기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했고, 또 진화했다. 가현의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시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노인은 가현에게 방향을 물었다. 그리고 가현은 미리 고안하고 있었다는 듯이 상세하게 노인에게 답을 했다. 목표로 삼은 것이 무엇이며,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것들, 마지막으로 당신과 시안의 안위는 이러이러하게 행할 것이다. 가현의 일방적인 말들과 식은땀에 맞춰 최대한 그에 호응하는 노인. 대화는 길어졌고, 창밖엔 태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둘의 대화는 일출에서 40분가량이 더 지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시계가 8시를 조금 넘겨 있었다. 대화를 끝낸 노인은 부리나케 담배를 물었다. 턱을 괸 가현이 그를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담배를 문 노인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난 그 더러운 곳에서 더는 지내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아가씨…”


“단추가 어긋난 걸 알았으면, 실을 풀고, 다시 옷을 짜야죠.”


“손이 많이 필요하실 겁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진정으로 그리하실 생각이라면, 제가 작업자들을 섭외해 드리겠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녀석들로만요.”


“아뇨. 사람은 제가 모을 거예요.”


“아가씨께서요?”


“제가 말한 물건들만 준비해 줘요. 일각을 다투는 일인 만큼 최대한 신속히, 그리고 조용하게요. 아버지조차도 알지 못하게끔.”


그리고 가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노인이 말했다.


“회장님은 알지 못하실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죠?”


가현은 물었다.


“섬에 나가셨거든요.”


노인이 담뱃재 속으로 담배를 짓누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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