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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Nov 09. 2024

연희가 남긴 것

자리를 안정되게 잡았다, 하녀들에게 집사라고 불린다, 심지어는 아가씨조차도 오늘 나를 그렇게 불러 주었다, 와 같은 망상들은 샤워로 젖은 시안의 몸에 묻은 물기가 달아날 때까지였다. 복도에 서 있는 하녀 한 사람의 인사를 들은 직후의 일이었다. 시안은 몸에서 다른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심히 신경을 기울여 맡지 않으면 맡을 수 없는 냄새, 그렇다고 맡기 싫은 냄새는 아니었다. 다만, 지상에서는 밸 수 없는 특유의 냄새였다. 좋게 말하면 온실의 냄새, 나쁘게 말하면 부인의 냄새.


“앞으로 주의해야겠구나. 이렇듯, 회장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은 부분도 있는 것 같으니까.”


시안이 욕실 앞에 놓인 수건에 발을 탁탁 털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 시안의 아래쪽에서 설탕 가루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얏!”


소리를 낸 시안은 직감했다. 단순한 쥐나, 스쳐 가는 통증이 아닌, 무언가에 발바닥을 찔렸다는 것을. 시안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붙여 발을 확인했다. 생각한 대로였다. 좁쌀 한 톨 같은 피가 둥글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지?”


시안은 조심스럽게 조각을 건드렸다. 조각은 깊게 파고 들어가 있지 않았다. 톡, 검지에 스쳤을 뿐인데, 조각은 시안의 발에서 손쉽게 빠져나왔다.


“단면이 날카로운 게 꼭 무슨 파편 같은데…”


평소였더라면 그냥 지나칠 사소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시안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현실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하녀들에게 욕을 들을 때만큼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시안은 수건을 발에 감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무언가가 있을 거야, 연희가 쓰던 방 안에 이런 흠집 될 물건이 이유 없이 있을 리 없어. 시안은 수건이 발아래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한 뒤,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가장 가까운, 퀸사이즈의 침대가 있는 곳부터였다. 시안은 스탠드 옆에 조각을 내려놓고서 아래에 있는 수납장을 모조리 열었다. 열리는 것도 있었고, 잠겨 있는 칸도 있었다.


“수첩들이 왜 이렇게 많아?”


어느 한 칸을 연 시안은 말했다. 그리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수첩들은 시안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연희의 필체는 읽기 어려워 보였다. 칸 구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색 구분 역시 되어 있지 않았다. 시안은 그들 중 눈에 들어온 하나를 들어, 소리 내 읽었다.


“12월 7일. 가현 아가씨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부터 들려왔다. 늘 그랬듯 목소리서부터 나는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또 한 명의 이상형을 발견하셨구나, 라고. 그런데 오늘의 아가씨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풍겼다. 확실히 달랐다. 내게 방법을 물으셨다.”


“일기? 12월 7일이면 바로 얼마 전 일인데. 아니지, 올해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시안의 말처럼 날짜엔 연도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시안은 계속해 그 뒤를 읽어 나갔다.


“아가씨는 그 사람을 열차에서 만났다고 했다. 급했거나, 첫눈에 다가왔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나를 붙잡고 물으셨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무엇일까. 또 왜일까. 어떻게 생긴 사람이길래 아가씨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셨던 걸까. 말을 들은 나는 그래 왔듯, 당연한 말을 태연스레 내뱉었다. 전화를 끊은 뒤, 자책할 걸 알면서, 아가씨의 그러한 결핍이 무엇 때문인지를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며. 또한 그렇기에, 나는 그분에게 전달해야 한다. 아가씨께서 또다시 사람을 찾았다는 것을.”


연희의 휘갈긴 필체는 거기가 끝이었다. 시안은 종이를 넘겼다. 그 장이 끝이었다.


“손때가 거의 없어. 이걸 읽은 건 내가 처음일까. 하긴, 누가 감히 이곳에 들어와서 뒤져 볼 생각을 가졌겠느냐마는.”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시안은 말했다.


“괜히 봤나. 기분이 이상하네.”


“꼭 내 미래의 모습을 본 것 같잖아.”


그때 시안은 다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수납장 속에 들어 있는 연희의 수첩들을 모조리 읽겠다고. 그럼으로써 연희의 전철을 최대한 밟지 않으리라고. 시안은 덮은 수첩을 다시 안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빼냈던 칸을 다시 밀어 넣었다. 행동에 불쾌함이 실려 있었다. 시안은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은 이것부터.”


시안은 헝클어진 수건을 다시 동여맸다. 수건이 희지 않고, 무채색 계열인 덕에 적나라한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시안의 손길은 세심했다. 베개부터 이불의 아랫목까지, 시안은 침대를 그저 침대로만 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시안은 침대의 기둥목을 잡고서 발길을 돌렸다. 연희의 방은 넓었다. 게다가 자리해 있는 물건들의 가짓수가 많았다. 그리고 그 물건들이 놓인 자리는 종류별로 배정돼 있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만 가지런했을 뿐, 자세히 들여 보면 수첩에 날린 필체만큼이나 어지러웠다. 기둥을 돈 시안은 생각했다. 이대로는 시간이 오래 걸려, 범위를 좁혀야 해. 유리가 나올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시안은 팔짱을 낀 채로 다시금 방 안을 훑어보았다.


‘유리…, 유리….’


“너무 많아.”


진열장에 눈이 닿은 시안은 말했다. 이름 모를 상패, 출처 불명의 장식품, 그를 받치고 있는 선반. 그러다 시안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왜 가방이 하나도 없지? 가방이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가방이 없어. 그러고 보니, 어딜 가시든 늘 빈손으로 나셨었던가.”


‘한번 찾아볼까?’


시안은 장롱을 열었다. 장롱 안 역시 깔끔했다. 보기에는. 강박까지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정돈된 모습이 연희가 보였던 행동거지와 어울리는 편이기에, 약간은 이질적이었다. 시안은 손을 넣어 걸린 옷가지들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나무상자 하나가 있었다. 시안은 망설임 없이 그를 꺼냈다.


“뭐지 이건. 무슨 단지처럼 생겼네.”


시안은 조심히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주저앉았다.


“열어 봐도 되겠지? 예의는 이미 저버린 지 오래니까.”


원래 있던 녹슨 자물쇠는 걸려 있지 않았다. 시안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 천천히 상자의 덮개를 들어 올렸다. 상자 안은 어디론가 치워진 자물쇠와는 달랐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종이봉투 하나. 시안은 거기서 잠시 멈칫거렸다.


“음…”


“이건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인데.”


시안은 망설이면서, 조심스레 왼쪽에 놓인 사진부터 집어 들었다. 흑백의 사진 한 장. 시안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안은 또래와 같은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시안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여인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바라봤다. 그리고 시안은 속이 데일 듯한 뜨거움을 느꼈다. 겨울의 추움이 가시고, 따스함이 고개를 내미는 봄의 첫날. 홀로만 추위를 느끼고 있는 연약한 소녀처럼. 시안은 사진을 눈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사진을 떨어뜨렸다. 시안은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이유도 모른 채 시안은 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시안은 옆의 봉투 안에 든 것이 무엇일지 예상이 갔다.


‘저건 편지겠구나.’


생각을 떠올린 시안은 또 한 번 자책했다. 보지 말걸. 시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봉투로 손을 가져갔다. 접어져 있는 두 장의 종이. 시안은 편히 있던 다리를 불편하게 바꿔 앉았다. 그리고 꺼낸 종이를 펼쳤다. 반듯하고도 작은 글씨체로 한 획, 한 획, 공들여 쓰여 있는 글귀. 시안은 소리 내 읽고 싶지 않았다. 시안은 아주 느리게, 글의 첫 문장을 조용히 읽었다.


‘저마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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