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선 즐기기에 능한 유혹이었다. 누구라도 의심하지 않고 넘어갈 만한 둥글둥글한 말. 어조, 몸짓, 표정, 드러난 모든 게 그랬다. 방심도 아니었다. 어디서든 완벽에 가까운 능청스러움을 나타내 보이던 그녀였으니까. 그녀의 잘못이라곤 첫 경험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너무 신뢰했다는 점뿐일 것이다. 대화를 마친, 그러니까 페리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의 군은 재빨랐다. 군은 소식을 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서둘러 불러들였고, 과거의 페리가 가드였었다는 사실을 마을 곳곳으로 내돌렸다. 이유는 글쎄. 군이 저렇게 행동한 데 장황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가 얻을 수 있는 항목에 볼거리가 늘었다는 점과 그로부터 오는 어중간한 포만감. 딱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집으로 돌아온 페리가 후련한 얼굴로 문을 닫고, 잠시 숨을 돌린 시간과 같은 정도. 그 시간은 채 한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창밖에서 뜨거운 소리가 들끓었다. 멀리서 들리던 소리는 금세 조여 왔고, 거리가 좁아질수록 더욱 과격해졌다. 과거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소년의 살인범 지목이 확정됐을 때. 2층에서 소리를 들은 페리에게 처음 든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창으로 간 페리는 조금의 준비도 없이 곧장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얼어붙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광활한 떨림이 머리까지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유일하게 눈동자가 요동쳤다. 창밖의 그들은 늑대 떼처럼 뭉쳐 있었다. 늑대는 발에 불을 지펴 있었고, 늑대는 없는 허기를 갈구하듯 바닥에 몸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페리의 오른 어깨 옆으로 뾰족하게 깎인 나무 막대 하나가 지나갔다. 인지할 겨를도 없는 짧은 시간 속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대가 페리 너머의 바닥에 떨어지자, 관통당한 유리창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방 안으로 쏟아졌다. 페리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더러운 년!”
뚫린 창 안으로 욕설이 날아들었다. 바람 없이 고요히 나부끼던 나뭇잎이 흔들리자, 그때서야 페리는 작금의 순간이 현실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페리는 뒤로 물린 걸음을 다시 앞으로 되돌리며 잘은 파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창으로 걸음을 가져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페리는 직감으로 알았다. 자신은 마녀이고, 저들은 마녀를 태우러 온 신자들이라는 걸.
“잠시만요. 지금 내려갈게요.”
페리는 평소에 잘 입지 않던 연녹색의 블라우스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걸음을 내밟았다. 그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자갈 같은 작은 알맹이들이 페리의 얼굴로 끊임없이 날아왔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람들 앞에 선 페리는 한쪽 팔을 감싼 채로 허리와 고개를 동시에 숙였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던지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고위층의 옷을 만졌다는 게 이거였어? 그래, 네가 쌓은 공적으로 몇몇 사람들이 아주 편하게 살았겠네.”
“자네 같은 사람 때문에 목숨을 잃은 가족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 있나. 차마 세지도 못 할 걸세.”
“가더인 걸 알았다면 넌 마을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페리를 향해 말을 던졌다. 비교적 똑똑히 들린 게 저 세 문장이었다. 흥분한 그들의 목소리는 겹쳐서 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게 몇 있지 않았다.
“저도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에요.”
페리는 말했다.
“도망칠 자격은 있나?”
가족을 잃었다는 노년의 남자가 대꾸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그것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넌 자격도 없는 년이야.”
그 말은 크게 울렸다. 페리도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직후 페리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겉으로 보이기에 퍽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하려는 말을 해도 될지, 굉장히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손에 뾰족한 막대를 치켜든 여자가 페리를 향해 그 끝을 겨눴다. 페리는 눈을 하늘로 올렸다. 그리고 안으로 말아 넣은 아랫입술을 바깥으로 튕기며 말을 뱉어내었다.
“그런 여러분들은 무슨 자격을 갖추셨어요?”
말을 한 페리는 호흡을 유지하려 애썼다. 목소리가 흔들리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페리는 굵고 긴 숨을 의식적으로 이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자존감을 지키고 있기에 한순간에 지지에서 폭력으로 돌아설 수 있는 걸까, 라고 끊임없이 속으로 질문하며.
“우리? 우리는 자격이 있지, 있고말고. 적어도 여기의 우리들은 천박하게 살진 않았으니까. 네년처럼.”
여자는 막대의 끝을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세게 흔들어 페리의 얼굴 앞을 조준했다. 막대에 가려 티가 나진 않았지만, 그녀의 손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가더로 일하는 사람은 천박하단 말씀이신가요?”
페리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자의가 아니었다. 페리는 앞으로 내려지는 자신의 발을 공포스럽게 내려다봤다. 여자 역시 보이는 떨림과는 다르게 물러서지 않았다.
“너흰 세뇌된 족속들이잖아. 시티를 벗어나려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찌르고, 또 쏴 버려. 끝난 일에 감정을 갖지도 않지. 네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한 번이라도 뒤돌아본 적 있어? 없을 거야.”
“그게 문제가 되나요?”
“뭐?!”
“여러분들처럼 저 역시나 노력을 한 것뿐이에요. 자리가 다르긴 했지만, 그게 진정 잘못됐다고 생각하세요?”
“도망자들을 살해한 네년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거야? 진심이니? 정말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네가 죽인 사람들의 가족이 꾸린 마을이야.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지?”
“그건 과거의 일이니까요. 지금의 저는 이곳 마을 사람이에요.”
“아니. 너는 감정 없는 짐승에 불과해. 짐승? 하, 짐승이란 단어를 너한테 붙이기도 아까워.”
페리의 편은 없었다. 사람들은 전적으로 여자의 말에만 수긍하는 고갯짓을 보였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맨 처음 그들이 보였던 분위기와는 확실히 달랐다. 흰색의 덩어리 위로 놓인 회색 실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제가 짐승이면 여러분들은 뭐죠? 가더가 반인륜적인 직업이란 사실에 토를 달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이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킬 정도는 전혀 아니죠. 또 알다시피 가더는 시티에서 유일하게 기준선이 없는 직종이에요. 미천한 선에서 두드리든 괜찮은 선에서 두드리든 시험만 통과한다면 동등하게 일할 수 있죠.”
페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여자가 막대를 내리며 대꾸했다.
“지금 우리더러 폭력적이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라는 거야?”
그리고 페리는 자리에서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내려놓았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그 의미가 맞을 거예요. 저도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받았던 과거의 직업에 대한 물음이 그런 뜻으로 다가왔거든요. 하늘에 눈이 있듯이 말 한마디에도 눈이 달렸죠. 그리고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가더는 죄 없는 사람들을 벌 주진 않았어요.”
페리가 마지막 문장까지를 그치자, 집 주변은 아주 조용해졌다. 당장이고 내려칠 듯 쥐여 있던 무기, 혹은 흉기들이 더 이상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페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내미는 말에 몰두한 나머지, 도망칠 구멍을 찾는 것도 잊어버린 그녀였다. 모두가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기서 누군가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오늘 하루의 침묵 이어가기가 자신 일생의 숨쉬기를 대신 할 대체재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넨 몇 사람이나 죽여 본 건가? 그것만 말해 주게.”
사방의 비아냥과 욕설 사이에서 동정을 바라던 노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페리는 한쪽 팔을 그에게로 길게 뻗으며 말했다.
“제가 직접 숨을 끊은 사람은 없어요. 총기류를 휘두를 수 있는 건, 경험과 담력이 쌓인 선배들의 몫이었으니까요. 저는 단지 운반 일을 거들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무리의 누군가가 대답했다.
“마을에 발을 담금과 동시에 거짓을 달고 살던 자네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
그에 페리는 우물쭈물하는 틈 없이 맞받아쳤다.
“믿음의 여부는 상대방의 몫이에요. 제가 오늘 이런 상황에 몰리게 된 것도 똑같은 이유겠죠. ‘믿어선 안 될 상대를 믿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하지만 또, 막상 닥쳐 보니 그렇게 후회스럽지도 않네요. 타이밍이 엿 같긴 하지만, 어차피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이제 저는 온전히 여러분들 몫이에요. 선택하세요. 저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죽일 것인지.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