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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6. 2024

대회 3일 전, 디케이의 부상

대회 3일 전, 거리는 고조된 사람들로 가득했다. 번들거리는 무테안경을 눌러쓴 디케이가 주인공이었다. 흰색 가운을 펄럭이며 사람들 가운데를 뚫고 지나친 디케이는 그대로 길을 질러 단상으로 걸음을 내려놓았다. 달아오른 군중들 사이로 눈동자가 굴러다녔다. 한 명에서 두 명, 두 명에서 네 명…, 그들은 아주 오래전 꿈을 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래된 것이라, 그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자각할 만한 척도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때마침 군중에 섞여 있던 ‘그’가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들은 혼란 속에서 영영 눈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약속의 날이 아닙니다, 디케이 씨! 거기서 내려오세요!”


혀가 풀린 목소리였다. 또, 검은 모자에 덮여 있음에도 취한 얼굴이 외관에 드러났다. 홈의 손에는 술이 담긴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찰랑이는 율동이 보이지 않는 걸 보건대, 이미 병을 거의 비운 모양이었다. 디케이는 홈, 그리고 그의 옆에 붙어서 자신을 엿보듯 힐끔거리는 사람들 쪽으로 파먹을 듯한 시선을 던진 다음, 헐렁한 가운에 넣어 있는 팔을 좌우로 벌려 몸집을 부풀렸다. 어느 틈이었는지 단상에 있던 확성기가 디케이의 오른손에 쥐여 있었다. 그를 본 홈이 다시 구시렁거렸지만, 이제는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디케이의 손을 응시하며 어서 확성기의 전원을 켜라는 무언의 눈길을 보냈다.


“실례하겠습니다.”


디케이가 특유의 굵은 목소리를 아래로 깔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본래의 성량으로 되돌아와, 참았던 감정을 모두 분출하듯이 목을 잔뜩 긁으며 꾸짖음 가득한 목소리로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눈이 가려진 채 살고 있습니다!”


“저 디케이는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밝힐 것입니다! 그간에 행한 거짓과 농락을 여러분들로부터 모조리 뿌리 뽑을 것입니다!”


수선하던 단상 아래로 일순 적막이 찾아왔다. 술에 젖은 홈 역시 찢어진 눈초리로 디케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망자들은 눈치가 빨랐다. 머물던 어둠으로 자극적인 빛이 들어오는 때면, 그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육체적 신호보다는 정신적 신호가 우선이었다. 언제고 곤두서 있는 이라면 오늘 하루가 시작되면서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마을의 단상에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과 그곳에 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디케이의 아래 서 있는 이들은 모두 그를 알고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말해 보시오.”


군중의 제일 좌측, 끝부분에서 핀 목소리였다. 중년 남자의 오른팔에는 고개를 꾸벅이며 졸음을 참는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기존에 아는 지킴이라는 틀부터 거짓이라고 부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제가 지금서부터 하려는 말들은 저만이 알고, 혼자만이 상상하여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닌, 진실에서 비롯된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은 진정한 즐거움과 진정한 행복의 차이가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에, 오늘의 제 말뜻을 잘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디케이의 서두가 끝나자, 졸던 아이의 고개가 완전히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털썩.’


말을 꺼낸 남자에게서 난 소리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를 앞으로 껴안고서 평지를 골라 몸을 앉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마을에 머문 기간이 짧은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짙었다. 그리고 이내 그곳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뻣뻣했던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좋습니다.”


단상 아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리에 주저앉기를 마치자, 디케이가 말했다. 그리고 디케이는 손에 쥔 확성기를 입술에 바짝 붙이고서 말을 이었다.

     

“마을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마토 씨가 등장하고부터일 겁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그가 저만큼 학식이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부정일 테죠. 애초에 마토 씨는 마을이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숨은 가장 큰 오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를 포함한 모두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디케이가 남은 숨을 내쉬며 단상 아래를 보는 때는 이미 검고, 낯선 자리로 변한 뒤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 덮여 있었고, 이미 일그러짐을 예상했다는 사람처럼 눈을 감은 이도 있었다. 제일 앞자리의 한 여인이 디케이를 향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보내왔다. 디케이는 그녀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했다.


“본디 지킴이는 이름 그대로의 일을 도맡는 직책이었습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있는 존재. 시티의 창을 막아 세울 지주와 같은 존재. 하지만 시티에서 도망친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속 삶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위안거리에 불과하며, 특수한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나 우리는 모른 척했습니다. 그로써 투지라는 감정을 유지하고, 그로써 도망자라는 신분을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홈이 찢어진 눈을 디케이를 향해 옮기며 입을 열었다.


“지킴이가 하는 일이 겨우 위안거리라고요? 제가 들었던 사실과 다른데요, 디케이 씨.”


“그래, 홈. 지킴이는 네 머릿속의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디케이는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디케이의 말을 들은 홈은 앉은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 경련하듯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홈의 손에 들린 유리병이 그를 따라 비틀거렸다.


“그런 거짓말이 어딨습니까?! 저는 마을이 눈에 보인 그 순간부터 지킴이가 되겠다는 목표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게 다 헛꿈이었다고요? 그 말을 하는 겁니까? 디케이 씨?”


“그래.”


“그럼, 지킴이는 왜 있습니까? 그들을 왜 뽑는 겁니까? 그날 밤 제가 본 불꽃 옆의 키 씨는 무엇이었던 것입니까?”


홈이 말을 마치자, 그의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홈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듯 눈을 피했고, 폭주하는 감정에 그대로 자신을 실어 올렸다. 꿈을 속은 취한 양의 몸부림은 격하게 나타났다. 솟구치는 괴성과 그 위로 얹히는 목소리, 그 둘의 묻고 묻히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마음이 여려진 양치기들은 화가 난 양을 달랬지만, 양은 그것이 있음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홈을 살피러 내려왔던 디케이는 그의 어깨에 얹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손도 뒤따라 내려갔다.


“정신이 드나, 홈?”


디케이가 홈의 양쪽 눈을 한 번씩 살피며 말했다. 홈의 눈은 절반쯤 감겨 있었다. 디케이의 말소리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크게 다른 말도 아니었다. 홈은 귀찮은 듯 한쪽 어깨를 크게 돌려 주변을 뿌리쳤다.


“알겠네, 그만하지.”


디케이는 몸을 뒤돌려, 모인 사람들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안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이 있으신 분은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하세요. 그리고 필요치 않은 말은 건네지 마시고요.”


디케이는 한 번 더 홈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왼손을 가운에 밀어 넣고 다시 단상으로 올라갔다. 주위는 썰렁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연한 반응일 겁니다. 저 또한 느끼는 바가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 또한 같은 줄기에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그간 이어져 내려오던 마을의 근간을 배신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이야깁니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른다는 느낌이 표정에 강하게 묻어났다.


“저는 여러분에게 투표의 개최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내용은 지킴이의 완전 폐지 여부입니다.”


그리고 탄성들이 퍼져나갔다. 홈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지킴이를 없애자고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지킴이는 마을에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디케이는 말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가 반발을 꺼내 든 것은 아니었기에, 시간이 길게 소요되진 않았다. 그러나 입을 연 사람들의 목소리는 나머지를 더한 것처럼 강경했다. 그리고 디케이를 따라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한 여인이 일순 잠잠해지려는 찰나, 단상으로 말을 던졌다.


“저희 남편은 경작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디케이 씨, 지금 하신 말씀을 저희 남편의 노동을 부정하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경작지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안이며, 마을에 있어서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저는 부인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케이는 한 번 숨을 끊었다가 길게 들이쉰 뒤 다음 말을 이었다.


“지킴이는 여전히 시티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한마디였다. 디케이는 연설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단상 바닥이 찍히는 소리와 함께 확성기가 땅에 떨어졌고, 소리 너머의 디케이가 크게 휘청이며 그 옆으로 쓰러졌다. 투명한 유리 파편 하나가 단상이 파인 깊이만큼 박히어 디케이의 이마 옆으로 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홈의 목소리가 군중을 에워쌌다.


“개자식.”


세 사람 정도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들은 제일 먼저 벗겨진 안경을 챙겼고, 다음으로 쓰러진 디케이를 들어 올려 가까운 집을 향해 서둘러 이동했다. 질서를 유지하던 군중들의 간격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단상 주변은 마치 연무처럼 자취가 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이 일은 당일을 포함한 다음 날 아침까지도 조용했고, 이틀밖에 남지 않은 4월임에도 쨍한 햇살이 무성히 내리쬐는 오후 무렵이 되어서야 마을 곳곳에서 머리를 들어 올렸다. 자리에 있지 않았던 삼자 중,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사람은 피크 내외였다. 아들의 죽음을 전달받았던 그날처럼 피크는 발작을 일으키는 워블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머리가 둘 이상 모인 거리면 변함없이 주절대는 사람들로 북적댔지만, 부활의 장 건에 관하여 말하는 무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마을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떠드는 무리의 부류는 정확히 둘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자들과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지닌 자들로. 목소리의 크기로만 놓고 봤을 때, 후자 가 전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디케이!”


얼굴에 닿는 발을 신경질적으로 헤치며 머리를 내민 피크가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연한 핏빛이 감도는 붕대를 머리에 감은 디케이가 손을 올려 화답했다. 똑같은 나무 침대였는데, 등받이 구조 자체를 새로이 조립한 듯 상체가 수직에 가깝게 들려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요량으로 온 건가? 아니면, 죽어 있기를 기도하면서 온 건가?”


“무슨 소리! 의사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크하하하. 그래, 그래야 자네답지.”


“상태는 어때?”


“상태?”


디케이는 대꾸와 함께 다친 부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픈걸.”


그에 피크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좌우로 늘어뜨리며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앉혔다. 무언갈 집요하게 파우칠 듯한 표정이었다.


“필요한 걸 말해 봐.”


“에탄올과 스킨 스테이플러. 두 가지가 있으면 좋으려나.”


“가지고 있는 게 없는 건가?”


“아니지. 그보단 시티의 병원 카운터에 서 있는 간호 로봇이 더 유용하겠어. 이왕이면 여성 모델로 말이야.”


그리고 디케이는 홀로 킥킥댔다.


“이봐, 난 진지해.”


“피크, 지금 사람들이 내뿜는 분위기를 몰라서 그러나. 이야기를 다 들었을 거 아니야. 어제 내가 단상에서 무슨 말을 떠벌렸는지.”


“이미 벌어진 일에 감정을 소모한다는 게 얼마나 병신 같은 행위인지를 경험으로 배웠을 뿐이야.”


“자네의 입지도 위험할 텐데?”


순간, 피크의 촘촘한 검은 눈썹이 들썩였다. 그러고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참은 사람 같은 어색함이 낯빛에 드리웠다.


“우리는 지금 같이 있으면 안 될 사이야.”

     

디케이는 말했다. 그에 피크가 고개를 천장으로 젖히며 답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야.”


“오해는 말게, 피크. 내 생에 그런 착한 척을 행할 줄은 나 역시도 몰랐으니까.”


“그저 행복하면 되는 사람들 아닌가. 자네가 모두 불행하게 만들었어. 사람들을 불행히 만들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말이야.”


피크는 여전히 고개를 쳐든 채로 입을 벙긋거렸다. 적잖이 아니꼽다는 자세였다.


“그 행복이 거짓에 투영된 것이라도 괜찮단 소리로 들리는데.”


디케이는 높이 올라간 피크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정말 왜 그래? 디케이. 까놓고 말해, 자네도 이득을 본 건 사실이지 않은가. 설마하니 자네 집의 이 모든 걸 도망칠 때 들고나온 물건들이라고 말할 요량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그리고 자네의 또 다른 타박을 받기 전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내 발언에서 발을 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모두 지고 갈 생각이야. 결과를 미리 맛보기도 했고 말이지.”


디케이가 다시금 손을 올려 붕대를 가리켰지만, 피크는 쳐다보지 않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투표 장소가 마련될 걸세.”


“그럴 테지. 마토하고는 벌써 얘기가 끝났나?”


“그자는 별로야. 자네처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거든.”


디케이의 대꾸를 들은 피크는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리곤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내걸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래, 그럼, 이제 우리는 투표 날 마주하면 되는 건가?”


디케이의 집 입구에 달린 나무 발이 옆으로 넘어가며 소리를 냈다. 집을 나서는 피크의 뒤로 디케이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이야,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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