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이 뱉은 말 한마디의 여운은 대단했다. 컴컴한 유리병 속에 농축시켜 놓은 메아리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뜯은 것만 같았다. 전혀 예상 못 하고 있던 시안의 말에 가현은 어떤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을 못 하는 순간은 길어졌고, 벌어진 시간 사이로 가현과 동행한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들고 있었다. 가현은 그 순간, 다시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기댈 곳이 없으면 서 있을 줄 모르는 무지렁이와 같은 사람으로, 옅게 깔린 미소 뒤의 두꺼운 멸시를 보지 못한 척 지나쳐야 하는 장님과 같은 사람으로. 가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둥글게 몸을 웅크려 호흡을 가다듬고, 억지로 주위를 둘러봤다. 우연에 불과했던 그러한 가현의 행동은 그녀에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이는 마음, 그는 현실이 아닌 상상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들이었음을. 가현은 기뻐했다. 가현의 이마 옆으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입술에 힘을 가하자, 얼었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가현은 그 힘을 유연하게 배분시켰다. 그리고 자신 있는 목소리가 1층에 퍼져 나갔다.
“아니.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돼.”
시안의 말을 아직 떨쳐 내지 못한 사람들의 위로 목소리가 덮였다. 주변이 빠르게 식어 갔다. 그들 중 가장 빠른 사람은 노인이었다. 애초에 홀로 달아오르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버섯을 떠나는 순간부터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노인은 계속 그랬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같은 노인의 얼굴이 지금서야 최고조에 다다른 듯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가씨, 이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누구 한 사람이 말릴 겨를 따윈 없었다. 노인은 선 자리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곧바로 머리를 찧었다. 그들 가까이에서 목소리를 듣지 못한 멀리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노인이 시안을 향해 조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니요.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단단히 말씀드렸어요. 제 사람을 데려간 몫은 받아야겠다고.”
“빌겠습니다. 제게 남은 인생의 모든 시간을 아가씨께만 바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그것은 별개예요.”
노인의 편, 아니, 시안의 편은 없었다. 노인은 엎드린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빌어 봐야 달라질 것이 없단 걸 아는 듯 기는 소리를 잇지도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살 수 없는 건가요?”
시안이었다. 눈에 바닷물이 맺혀 있었는데, 찰랑이는 위치가 달랐다. 대해의 한가운데에서 빠뜨린 노를 내려보고 있는 선원의 눈이었다.
“응, 너한테서 필요로 하는 건 열쇠뿐이야.”
가현은 대답했다.
“저는요?”
“필요하지 않아. 조금도.”
“필요하실 거예요. 연 집사님 다음으로 아가씨의 어머님과 대화를 튼 사람은 저니까.”
노인의 손이 시안의 발목으로 뻗어 나간 건 그때였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감각에 시안은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노인에 잡힌 시안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시안은 겁에 질린 얼굴로 노인을 내려다봤다.
“…왜, 왜 이러세요.”
그에 대한 대답은 가현이 대신했다.
“네가 고통스럽게 죽는 걸 바라지 않아서 그래. 그리고, 방금의 말은 내게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어.”
그리고 가현은 노인의 팔목에 왼발을 살포시 얹으며 말했다.
“그렇게 붙잡고 계셨다간 따라가세요. 이제 결정을 하셔야죠. 저희를 따를지, 이 소녀를 따를지.”
말을 들은 노인은 여전히 시안의 발목에서 손아귀를 풀지 않았다.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것처럼, 혹은 모종의 눈치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가현은 그것이 불쾌했다. 가현은 노인이 손을 펼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힘껏 팔목을 눌렀다. 노인의 손은 그제야 벌어졌다.
“이미 끝난 상황이에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작당이 있다면 맘껏 해요. 나는 더 이상 여기에 묶여 있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가현은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갔다. 가현의 등 뒤에서 가현은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소리가 오갔다. 절반은 대화였고, 절반은 절규였다. 가현은 사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내의 손 옆으로 봉지가 펄럭대고 있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을 모두 꺼낸 듯했다.
“슬슬 시작하죠?”
가현은 사내에게 말했다.
“시간이 나왔습니까.”
사내가 되물었다. 대답 후에 사내는 밖을 보는 듯한 시늉을 보였는데, 그 모습을 누가 보았든, 그에게서 자연스러움과 진심 어린 마음을 느끼긴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시작해야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예요. 수행비서의 말대로라면 밤이 늦어서야 도착할 거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불은 누가 붙이기로 했어요? 그쪽인가요?”
“일단은 저를 포함한 7명 모두 불씨를 지니고 있긴 합니다. 최종 결정은 아가씨께서 해 주시면 되는 거고요. 그게 아니면…”
“그쪽만 붙이기로 결정이 났다고 말을 돌리세요. 나머지 분들은 모두 밖으로 내보내시고요. 그리고, 불은 제가 직접 붙일 거예요.”
“아가씨께서 직접요?”
“네. 이따 제게 불씨를 건네줘요. 그쪽은 옆에 있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사내가 가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가현은 표정 없이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이 사내는 대화를 거기서 멈췄다. 그를 본 가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냉정을 보여야 그쪽답지.’
사내는 들고 있던 집게를 뒤집어 가까운 벽에 세우고서 허리에 찬 무전기를 쥐어 들었다. 크기는 그의 손바닥에 조금 못 미쳤다. 사내가 무전기의 다이얼을 돌리며 말했다.
“1층 1번 준비 끝났습니다. 다른 층 상황 어떻습니까.”
가현은 귀를 기울였다. 아담한 사이즈에 걸맞게 음질이 좋진 않았지만, 하나둘 돌아오는 답변을 알아듣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지저분한 소리 속에서 들리는 말들은 맥락이 거의 다 비슷했다. 끝이 났다, 아직은 움큼 정도가 남아 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불은 저 혼자 붙이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작업을 마친 분들은 저택 밖 사람들에게 합류하셔도 좋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여러 소리 이후 무전기의 소리가 잠잠해지자, 가현은 말했다.
“통이 참 커요.”
“저희 어르신 말인가요?”
“네. 저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삼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가씨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와는 다르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까요.”
“좋은 모습?”
“말을 조금 들었거든요. 끌려간 아드님과의 주선? 그와 엇비슷한 이야기들을요.”
그를 들은 가현은 속으로 조용히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얼마 뒤, 사내들이 한 명씩 1층으로 내려왔다. 내려온 그들은 한 번씩 노인과 시안을 바라봤다. 자리에 있어서 본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갈 앎으로써 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가현과 사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재차 확인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가현이 있는 자리를 쳐다보고서 가벼이 인사를 건네고 저택을 빠져나갔다. 남자 여섯이 모두 나가자, 가현은 옆에 있는 사내의 어깨를 툭 친 다음, 노인과 시안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붙일 거예요.”
가현은 노인을 보며 말했다.
“아가씨, 아이가 열쇠를 드린답니다.”
노인이 시안을 보며 말했다.
“그래요? 잘됐네요. 우리가 하려는 일도 말해 줬어요?”
“전부 말했습니다.”
시안은 고개를 숙인 채 터벅터벅 가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속치마를 잠시 주섬주섬하더니 그곳에서 만년필을 꺼내 보였다. 시안은 아주 반듯한 자세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현에게로 그를 내밀었다.
“이게 열쇠야?”
시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 한번 지랄 같네. 그래, 뭐. 그 인간으로서는 알맞긴 하다.”
가현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만년필을 꽉 움켜쥐었다. 남현의 손을 거쳤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바닥에 내던져 부러뜨리고 싶다는 감정이 솟구쳤지만, 가현은 온 힘으로 그를 참았다. 가현은 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노파로부터 기성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아까 여기를 돌아선 순간부터 계속 생각했어. 내가 널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 걸까, 라고 말이야.”
딱딱히 얼어 있는 시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현은 말했다.
“심란해. 지금의 나도. 나 역시도 굉장히 불안하고 아니꼬운 상태야. 너를 어떻게 하는 게 옳은 선택인지 정말로 모르겠거든.”
대놓고 비추는 흔들림, 그리고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가현의 말에도 시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니.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괜찮으니,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시안은 또 한 번 가현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노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께서 가신 사이에 아이에게 모두 말해 주었습니다. 아가씨께 말씀드린 그 모두를요.”
가현은 못마땅하단 듯이 노인을 꼬나봤다. 그러나 이내, 잘됐다고 생각했다. 가현은 시안을 내려다보며 질문을 이었다.
“그래, 현실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기분이 어때? 네가 어르신을 대신해 죄를 덮어쓰게 된 거야. 나의 사람을 앗아간 죄를 말이야.”
끝까지 시안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조금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요. 전에 말씀드린 비극이란 게 지금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와 보니 지금을 말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슬픈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극은 원래 서로 짝을 지어 다니는 법이죠. 기왕 이렇게 벗겨진 김에 정말로 솔직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요. 나는 이 아이의 손에 불을 쥐여 주고서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내려보내려 했어요.”
가현의 말에 시안을 제외한 두 사람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맞아요. 둘이 같이 불길에 휩싸이라고. 그렇게 해야 내가 느낀 것과 맞먹는 분노를 그 인간한테 안겨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가만히 놓고 보니, 그렇게 되면 결말이 다를 것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걸로 막이 내려진다는 게 말이에요. 나는 나 스스로 그 인간이 짜놓은 수렁으로, 그 인간이 살아온 전철 속으로, 나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말을 마친 가현은 시안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서 나가.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