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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4. 2024

피크의 등장과 홈, 그리고 사형대

마을에는 특정한 종교가 없었지만, 믿음 아닌 믿음이 존재했다. 산 사람의 길은 고요하지만, 죽고 난 이후로는 시끄러워진다는 의미로써. 예컨대, 피크의 아들이 그랬다. 소년은 몹시 조용했다. 말수도 그랬지만, 색이 없었다. 활발하지도 않았고, 소심하지도 않았다. 소년은 반딧불의 꼬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좋아했다. 어느 것보다 많은 애정과 관심을 소년을 향해 내밀었다. 아이가 드문 마을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랬었다.


“오늘따라 더럽게 쳐지는군.”


지킴이 키가 정오의 태양을 달 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지킴이는 마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력이다. 마을에 머무는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지킴이에게 지불할 대가를 마련해야 했다. 예외는 없었다. 그들의 대우는 하나의 갑옷 같았다. 우선 그들은 식수 운반에서 제외되었다. 식수를 운반하는 일은 마을에서 제일가는 중노동에 속했다. 폭포가 떨어지는 강줄기에 다다르는 길은 가파르고 험했거니와 내려간 길을 다시 어마어마한 무게를 이고서 되돌아와야 성립한다는 전제가 따랐다. 열외가 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가가 따르는 모든 일에서 그들은 열외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선발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공식 대회는 1년에 한 번. 발이 빠른 사람, 눈이 좋은 사람, 힘이 센 사람으로 각각 한 사람씩을 선발했다. 대회에는 기존에 올라 있는 지킴이들도 참가했다. 나태와 노화의 정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공식 대회 날을 제외하고서 4개월에 한 번씩, 기존의 지킴이에게 패하였거나, 도전자에 의해 떨어진 지킴이를 위한 자리가 열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의 장이라고 불렀다. 키는 지킴이가 도입된 무렵부터 지금껏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인물로 유명했다. 나아가 그의 종목은 귀하디 귀한 눈이었다. 키는 태양을 보며 지난밤을 회상했다.


“쾌락을 위한 노력과 가치 없는 숨소리를 위하여!”


요란한 건배사였다. 제대로 된 술이라고는 있을 턱이 없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깨나 유행하는 행위였다. 근래 새로이 마을로 들어온 신참이 퍼뜨린 것이었는데, 그는 자신을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꽃집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어느 자리에서든 검은색 모자를 썼다. 연식이 된 마을 사람들은 그런 청년이 신경 쓰였지만, 차마 모를 사연에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한 반면, 키는 용기를 냈다. 마을 내의 허름한 술집에서 술자리가 잡혀 있던 날 저녁으로, 키는 날을 잡았다.


“이봐, 홈. 날도 슬슬 풀렸는데, 보고만 있어도 갑갑해 보이는 그 모자는 언제까지 쓰고 있을 속셈이야?”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홈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 모두는 시티의 라이선스를 버리고 오는 경우가 태반이라, 누가 본명을 대었고, 누가 가명을 대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홈이란 이름은 특히 그런 경우였다. 고향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이거요? 꽃을 팔 때 줄곧 쓰고 있던 놈이에요. 어두운 걸 걸치고 있어야 꽃의 색감이 그나마 볼만해지거든요.”


키는 그 자리에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빌어먹을. 물어본 내가 다 뻘쭘해지는 대답이군.”


“왜요? 거슬렸어요?”


“그게 아니지, 이 사람아. 다들 걱정했다고, 네 그 모자에 무거운 사연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해서 말이야.”


“사연이요?”


“그래, 인마. 모두가 네 머리에 얹힌 그 검은색 모자를 흘겨봤을 텐데, 장사를 했다는 놈이 그런 눈치도 없어 어째.”


“저야 생긴 게 좋아서 보는 줄 알았죠.”


“어이가 없군.”


그리고 키는 참지 않았다. 술자리에 있는 모두에게로 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모자의 비밀을 떠벌렸다. 웃음소리가 한쪽 구석에서 시작되더니, 순식간에 홈의 주위를 가득 둘러쌌다. 홈은 평소와 같은 능글맞음으로 사람들을 쉽게 쉽게 대처해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키는 그의 입꼬리에 달린 버거움이 보여 흡족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을에는 중앙의 거대한 폭포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홈은 땀에 젖은 채로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자, 딱딱한 나무 침대가 아침 기지개를 함께 켜고 싶다는 듯이 삐걱대며 신음했다. 한정된 장소, 비슷한 무렵, 한결같은 사람들. 홈의 꿈은 매번 엇비슷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홈은 꿈이 과거, 자신의 가게에 진열돼 있던 꽃들의 피사체만큼이나 생생히 떠올랐다.


“휴…”


꽃향기와 일생을 보낸 남자답게 홈은 거친 언행을 쉽게 쓰지 않았다. 홈은 그대로 머리맡의 창을 열어, 몸을 말렸다. 입을 벙긋대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절반을 진행할 수 있었던 시티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지만, 홈은 적당히 만족했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하늘, 맑은 공기 속에 절묘히 뒤섞인 향긋한 풀내음, 책에서만 보던 원시인이 실제로 되어 버린 듯한 아찔함까지도. 홈은 대충 웃옷을 걸쳐 입고서 집 밖으로 나갔다. 홈은 눈을 감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처마 아래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홈이 숨을 뱉을 때, 앞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꽃집 총각!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꼭 50줄은 된 듯한 말투를 내뱉는 여자는 홈의 맞은편에 사는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페리. 페리는 마을에 들어온 지 여덟 달쯤 되어 가는 사람이었는데, 나이를 밝히지 않아 아무도 그녀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오로지 액면가로써, 마을 사람들은 페리를 대충 서른셋에서 여섯 사이의 인물로 의식하고, 그녀를 대하곤 했다. 마을에서 페리는 입담꾼인 한편, 어느 자리에서건 시티에서의 무용담을 빠뜨리지 않는 인물로도 유명했다. 노상 시티 고위층들의 옷감 물색과 디자인 관련된 일을 했었다며 떠벌리곤 했는데, 허세였던 것인지 그녀에게 소중히 건넸던 옷을 되받았다가 절망의 소리를 내뱉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연하게도 이제 페리에게 수선을 교환의 대상으로 찾아가는 이는 없었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페리 씨.”


그리고 홈은 비를 뚫고서 페리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일찍 일어난 게 아니라 잠과 가까워지는 중이란 걸 놀리는 그녀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서.


“어때요, 제 옷?”


“응? 뭐가?”


“지금 이거요. 제가 시티에 있을 때 최고로 아끼던 옷이거든요.”


홈은 어디 대답해 보란 듯 자신의 늘어진 브이넥 반팔 티셔츠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글쎄. 오일을 듬뿍 바르고서 태닝 중인 남미 여자 옆에서 병맥주와 함께 낭만을 즐기는 용도로는 제격이라고 봐.”


페리는 작은 돋보기라도 꺼낸 것처럼 유심히 홈의 상체를 한 바퀴 돌아보고서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들은 홈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랄.


“이야, 역시. 디자이너는 표현 방식부터가 다르네요. 저는 그냥 소파에 누워 배때기나 긁을 때 쓰던 옷이었는데. 생화와 바다는 영 어울릴 수 없는 존재인지라, 조화라면 모를까.”


“어머, 그랬어? 참 좋은 옷인데. 아쉽네.”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욕구가 생기는데요? 조만간에 폭포 옆 바위에라도 앉아 낭만을 즐겨 봐야겠어요.”


그제야 페리는 홈이 자신을 비꼬기 위해 비를 뚫고 날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한 얼굴을 내비쳤다. 붉게 달아오른 페리의 표정을 본 홈은 피식 웃음 짓고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내달렸다.


“디자이너는 개뿔. 어디 하수도 근방에 누워 있다가 시인 행세나 했겠구먼.”


홈은 발의 물기를 종아리의 마른 부분에 대충 문지르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입구에서 침대까지는 세 걸음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홈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시티를 왜 도망쳐 나왔는지, 바닥에 가까울지언정 편의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왜 뿌리치고 나섰는지, 홈의 감긴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딱히 뼈 있는 계기도 아니었다. 생화 장수만의 다소곳 한 자존심을 누군가로부터 불태워졌다던가, 하는. 어떤 날, 교통 가더 둘에 둘러싸인 여자를 보았고, 바로 이어서 들어가는 게 불가능할 짐을 트렁크에 넣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거야 원,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으니 때를 알 수가 있나.”


홈의 눈이 텅 빈 벽을 향했다.


“철쭉이 피는 무렵이랬지. 이제 라일락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지금부터 한 마흔 밤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되겠다.”


홈은 지킴이에 도전할 생각이었다. 시티에서 도망쳐 나온 밤, 마을 입구에서 키의 부릅뜬 눈과 자신의 떨리는 눈이 마주쳤을 때가 끓어오름의 시작이었다. 횃불의 머리가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발작과 같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키의 깊고도 고독한 눈망울. 홈은 그때 깊게 다짐했다. 저 뜨거운 불꽃 옆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안녕하세요!”


페리는 아닌데, 목소리를 들은 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도토리를 닮은 동그란 코, 고무 끈으로 묶은 검은색 생머리. 얼굴을 확인한 홈은 침대에서 내려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퓨티 씨.”


그에 퓨티는 홈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오늘도 잠을 잘 못 주무셨나 봐요.”


“예, 뭐. 아직은 적응 중이라서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셨네요. 거리가 멀어 비를 많이 맞으셨을 텐데. 어서 들어오세요.”


“흐흥.”


이어지는 홈의 말에 퓨티는 이까짓 것 문제없어요, 라고 말하듯 콧소리를 냈다.


“이런 장대비가 내릴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부탁을 잡을걸.”


“아니에요. 맑은 날에 가 볼 만한 곳도 아니잖아요?”


모자의 비밀이 들통 난 술자리가 있던 바로 그날, 주변의 웃음소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 홈은 건배를 하며 퓨티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다. 홈은 자신과 나이가 같음을 알게 되었고(생일은 퓨티가 조금 더 빨랐다.), 퓨티가 자신보다 얼마나 이른 나이에 시티를 떠나 마을에 정착했는지를 그녀로부터 듣게 되었다. 둘은 말이 제법 잘 통했다. 홈은 마을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고, 퓨티는 시티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거기서 서로가 서로의 흥미를 돋우던 중, 퓨티의 입에서 무덤 이야기가 나왔다. 홈은 그에 이끌렸다. 시티에서는 장례라는 것도 없거니와, 수명이 다한 인간을 더 이상 생물로 취급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다릴까요, 출발할까요?”


홈은 퓨티의 젖은 옷을 보며 말했다.


“출발하죠. 그칠 비도 아닌 것 같은데. 근데, 그쪽은 왜 젖어 있는 거예요? 지금 봤어요.”


퓨티는 홈의 목을 기점으로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 이거요? 그냥…, 그냥 한번 맞아 봤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모자 좀 챙기고요.”


“그놈의 모자.”


소리 내 비웃은 퓨티는 먼저 집을 나섰다. 폭포까지 묻어 버린 비가 무서운지 마을의 거리에는 나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짧은 대화 몇 차례 이후, 말을 나누지 않았다. 퓨티를 뒤따르던 홈은 문득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긴장감도 아니고, 일체감도 아닌, 모종의 떠 있는 기분과 비슷한 감정이라고 홈은 홀로 단정 지었다. 그리고 다시 홈은 묵묵히 퓨티 걸음 뒤를 따라 밟았다.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둘은 키 차이가 나는 편이었지만, 퓨티의 다리가 평균 이상으로 긴 탓에 걸음의 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의 다 와 가요. 슬슬 보이죠?”


20분간을 말없이 걷기만 하던 퓨티가 처음으로 홈을 향해 반쯤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홈은 보았다. 그녀의 몸통 너머를. 홈은 처음에 땅이 흔들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만큼 머리가 강하게 덜컥하고 주저앉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네, 보여요.”


줄곧 퓨티의 뒤에만 서 있던 홈은 처음으로 그녀를 추월해 앞으로 나가며 대답했다. 그리고 홈은 모자챙을 바로잡았다.


“어때요? 무덤이란 걸 처음 본 기분이?”


퓨티는 홈의 옆에 나란히 발을 붙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비가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홈은 갈래에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서 박혀 있는 세 개의 말뚝을 두 눈에 담듯이 뚫어지게 바라봤다. 죄수들의 언덕은 그의 발목 아랫부분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리고 그 옆의 말뚝은 어떠한 글귀도 쓰여 있지 않은 채,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문양과 냄새나는 토사물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반복에 반복인 것이다. 뒤에 남은 이웃들이 물, 그리고 바람으로써.


“살인이라고 했죠?”


홈은 말뚝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네. 여기 아래 세 사람 모두요.”


퓨티의 말에 홈이 감탄을 뱉어냈다.


“완벽하네요.”


“뭐가요?”


“시티엔 이런 게 없거든요. 평평한 질서와 주름진 규율이 있고, 사람들이 빽빽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미안한데, 뭐가 없다는 건지 이해를 못 했어요.”


“과한 배려와 상충되는 경적. 완벽한 듯 보이는 시티의 민낯이라고나 할까요. 죽은 인간을 짐승 취급하는 곳이에요, 그곳은. 생전에 어떠한 위대한 업적을 쌓아 올렸든, 생전에 어떠한 죄질의 죄목을 선고받았든, 그 인간이 죽어 버리면, 죽어 버리기만 하면,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죠. 더 웃긴 건, 시티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서 살고 있다는 점이고요.”


“…말을 곱씹어 보게끔 만드네요. 그러니까 홈 씨의 말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아니, 당장에 죽은 사람에게도 이런 취급이란 걸 해 준다는 거에 대해 감탄을 한다는 거죠?”


“그래요. 적어도 이 마을엔 제가 좇던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리고 홈은 말뚝에서 시선을 돌렸다.


“무서운 말을 쉽게 내뱉네요.”


“그쪽은 말이 잘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홈은 퓨티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빗방울이 더욱 굵어졌다. 퓨티는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홈의 발걸음이 이미 사형대를 향하고 있었다. 흙바닥은 이제 두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는 상태로 변해 버렸다. 붉은빛의 사형대는 나무 한 그루 정도의 높이에 단단하고, 냉철해 보였다. 땅을 적시는 빗물이 사형대의 다리로 스며들 듯 파고들었고, 그로 인해 땅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향취까지 모조리 흡수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검은 구멍과도 같은 곳이었다.


“물감 냄새가 아니네요.”


홈이 사형대 기둥에 코를 대 보고는 퓨티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식물 상징주의 놀이뿐만이 아니라 화가 흉내도 줄곧 내었던 과거가 있던 터라, 홈은 그림에 있어서도 남들 따라 할 정도의 조예가 있었다.


“그런 물건이 여기에 있을 리 없죠.”


퓨티는 말했다.


“피인가요?”


“네.”


“누구의 피죠?”


“가해자, 그리고 그 사람의 일가족 전부.”


퓨티는 홈이 조금이라도 놀랄 줄 알았다. 아니, 그럴 거라고 확신했었다. 자신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그러나 홈은 아니었다.


“돌겠네.”


퓨티는 사형대에 오르려는 홈을 보며 말했다. 홈은 위로 세워져 있는 사다리를 체중을 실은 양손으로 누르며 탄성을 가늠했다. 사다리는 꽤 만듦새가 있었다. 간격도 일정했고, 잡는 부분도 거칠지 않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고정 방법이었는데, 아래는 허수아비의 다리처럼 땅속 깊숙이 박혀 있었고, 윗부분만 덩굴과 같은 질긴 줄기들로 수없이 감아져 있었다.


“구경만 하고 올게요.”


홈이 사다리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거길 꼭 올라가야겠어요? 찜찜하지도 않아요?”


“궁금한걸요.”


홈은 대답과 동시에 왼발을 사다리의 첫 마디에 올렸다.


“같이 가요, 그럼.”


퓨티는 홈의 다음 발이 오르기 직전에 말을 뱉었다. 홈은 눈치가 좋았다.


“뭐야, 설마 처음인 건 아니죠?”


“처음은 당신이에요. 다들 여긴 듣고도 외면하거나 오려고 들지 않는다고요.”


홈은 대답 대신 희열을 느끼듯 얼굴을 부르르 떨어 보이고는 위를 향했다. 홈은 능숙히 위로 전진했다. 퓨티는 사다리에 올라 보는 것이 처음이라 두려웠지만, 기에서 밀리기는 싫어 홈의 엉덩이만 응시하며 발을 내렸다. 먼저 도착한 홈이 팔을 내밀며 말했다.


“힘내요. 한 발만 더 뻗으면 돼요.”


올라선 퓨티는 네발로 바닥을 짚고서 숨을 골랐다. 빗물에 바닥이 꽤 미끈거렸다. 사형대의 바닥은 대략 5평 남짓되었다.


“죄를 심판하는 데치고는 운치가 좋네요.”


홈이 등을 똑바로 펴고서 사방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퓨티는 쭈그린 채 고개를 돌렸다. 홈의 말 그대로였다. 굵다란 나무줄기에 가리는 것만 빼면 끝에서 끝까지, 모든 게 보였다. 마지막 집, 입구 옆의 첫 집, 그리고 산맥 꼭대기부터 내려오는 폭포의 입술과 자락에서 튕겨 올라온 물이 만들어 낸 은하수까지. 퓨티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풍경이 그녀가 주저앉아 있게끔 내버려두지 않았다.


“신세계의 야만인들이 이런 삶을 누리고 있다는 걸 알면 너도나도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홈이 저 멀리 반대편에 있는 하나뿐인 출입구를 보며 말했다.


“신세계의 야만인? 그게 뭔데요?”


퓨티는 자존심이 센 여자였지만, 모르는 걸 아는 척할 만큼 몽매하진 않았다. 홈이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답하였다.


“아주 오래전에, 뛰어난 작가가 쓴 책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마치 시티의 시민으로 살아 본 것처럼 휘갈겨 놓았죠.”


말을 한 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퓨티의 질문이 이어졌다.


“오, 재밌어 보이네요. 그 책, 결말이 어떻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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