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에 올라선 피크가 소리쳤다.
“약속의 날입니다!”
피크가 말을 시작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도망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도망자가 아닙니다!!”
큰 목소리로 말한 피크는 확성기에서 입을 떼, 목소리를 가다듬는 시늉을 몇 차례 보이고는 이어 말했다.
“오늘로 스물아홉, 그곳에서 벗어난 우리가 이 마을을 건립하고 오늘로써 스물아홉 번째 약속을 이행하게 되는 날입니다!! 결과가 어떻습니까? 우리가 아사한 존재가 되었습니까?!”
피크의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예상대로 우리가 버티지 못하였습니까?!”
단상 아래의 사람들이 또 한 번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피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소리가 그치자, 말을 이었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죽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약탈, 살인, 분쟁, 그 모두를 방임하는 어리석은 우두머리. 그 모두를 수긍하고 사는 어리석은 인간들. 우리를 깔보던 그들 모두는 멍청한 역사를 여전히 되풀이하며 생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피크는 오른팔을 길게 뻗어 단상 계단 쪽을 가리켰다. 도살장에서 갓 뛰쳐나온 듯한 푸짐한 남자와 머리에서 발까지를 합하여도 그의 다리 하나 크기가 채 안 되는 꼬마 숙녀.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니, 남자가 아이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손을 뻗은 피크가 말했다.
“저들의 참상이 보이십니까. 빛이 사라진 저들의 안색이 보이십니까.”
피크는 집게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찔러, 삐져나온 눈물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그를 본 아래의 사람들은 동조의 소리를 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과거의 우리인 채로!! 저 역시 저러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저들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크는 단상 계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를 본 남자는 덤덤한, 혹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계획한 듯한 표정을 내비쳤지만, 아이는 아니었다. 아이는 흰색 바탕에 남색 무늬가 섞인 땡땡이 드레스와 빨간색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남자와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아이는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이를 따라 움직였다. 아이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무관심도 냉정함도 아닌, 단순하지만 엉켜 있는 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일곱도 안 돼 보이는 아이의 갑작스럽고도 어른스러운 등장에 북돋아 줄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피크를 지나쳐 단상 앞쪽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소형 확성기도 아이는 무심히 비켜나갔다. 분위기를 단숨에 주저앉히는 고역이라기보단, 서서히 아려 오는 서늘함에 가까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녀의 첫마디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그녀의 모습에 누군가는 경탄을, 누군가는 눈총을, 누군가는 연민을 꺼내 들었다.
“저는 퓨티라고 해요. 저기 있는 사람은 저의 아빠, 포. 아빠는 입을 다쳐서 말을 못 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해서 말을 해야 해요. 말하는 법은 엄마가 가르쳐 줬어요. 근데 엄마는 같이 오지 못했어요. 동그란 빛이 엄마를 비추려 할 때 제가 소리를 쳤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로부터 10년, 퓨티는 이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둘은 도망자, 그리고 반역자였다. 둘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사는 모두가 그랬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곳은 시티라고 불렸다. 퓨티는 그 단어가 과거에는 도심을 부르는 단순한 명칭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무의식이 건네주는 그 순간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뒤따라 느껴지는 기름 냄새에 퓨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 오늘은 좀 어떠세요? 몸을 일으킬 수 있으시겠어요?”
답답하지도 않은 듯 턱밑까지 이불을 올린 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는 결국 다친 입을 회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혀였다. 시티에서 뜨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바에 들리겠다고 나선 다리가 화근이었다. 시티에서 바텐더는 사라진 직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블렌딩은 버드나무의 가지처럼 굵다란 기계들이 도맡았다. 바텐더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하는 일은 해 봐야 레몬이나 올리브를 완성된 술잔 위에 꽂아 손님에게 건네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기생 같은 남자나, 환락가의 여자들이 손님 유치를 위해 얼굴마담으로 서 있는 게 고작. 포는 그들 중 수전증이 있는 바텐더를 보러 갔었다. 그리고 그날 가더에 의해 혀가 지져졌다. 포가 좋아한 바텐더가 특별히 도덕심이 투철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센터에 납부해야 할 빚이 있는 어중이 신분에 불과했으니까.
“아랫집 민트 씨께서 먹을거리를 조금 나눠 주셨어요. 지난번 양보에 감사를 표하고 싶으시다면서요.”
퓨티의 말에 포는 몇 없는 입 주변의 근육을 늘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퓨티도 따라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이곳에서 자라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밤이 돼도 어두워지지 않는 시티의 모습이 아직도 선해요.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 잠을 잘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평생 평화롭다는 게 어떠한 감정인지 깨닫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날 테니까.”
“……”
포가 대꾸를 하고 싶은 듯 입을 움직였다. 퓨티는 이제 포의 입 모양을 보고도 그의 의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수화를 배워 보는 게 어떻겠냐고 과거에 퓨티가 물었었지만, 포가 거절했다. 퓨티는 짐작했다. 포의 의지가 꺾인 것이 비단 혀를 잃은 것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드실 수 있겠어요?”
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살장에 어울리던 풍채도 이제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산골짜기 판잣집에서 끼니를 죽으로만 때울 듯이 나약한 모습이었다. 포는 고갯짓 외에 다른 것은 하지 않았다. 고갯짓이 그가 하는 최대한의 의사표시였다. 퓨티는 포가 그럴 때마다 싫증이 느껴졌다. 퓨티는 예의,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누가 배려를 해주는가, 누가 희생을 하고 있는가, 퓨티는 10이면 10,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자못 단단했다. 혈육이란 이유, 딱 그것 하나로써 말이다. 소리가 없는 둘의 거리는 금세 다시 벌어졌고, 대화에서 멀어진 포는 입을 다물었다. 입이 멀쩡할 당시에도 포는 말재간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말을 뿌리는 사람이라기보단 말을 수집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남들이 대신해 주는, 모두가 다 할 법한 말들, 포는 그것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그 행위를 자신이 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어차피 누군가가 하려던 말을 대신하여 줄 테니까.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오늘은 마토 씨가 나무 자재들을 다듬는다고 하셔서 밭 일에만 도움을 주러 가면 될 것 같아요.”
“……”
포는 퓨티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퓨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따스함이 내리쬐는 4월 중순, 마을은 녹지 비슷한 땅을 끼고서 동그랗게 늘어져 있었다. 마을 중앙에는 커다란 폭포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물을 기워다 썼다. 겉으로는 풍성해 보이는 곳이었지만, 없는 것들이 많았다. 뭐, 없는 것들이라고 해 봐야 시티와 견주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퓨티는 현관문 바로 옆, 신발장에 뉘어 있는 삽과 호미를 챙겨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발길이 멈춰 섰다. 눈에 들어온 건 피크의 아내, 워블이었다. 마을에서는 좀처럼 구경키 힘든 스카프, 그것도 베이지색이었다. 퓨티는 기왕 발을 세운 김에 그녀를 관찰하기로 했다. 스카프가 부러운 것도 물론 이유에 들어갔다. 팔짱을 낀 워블은 가슴과 팔꿈치를 난간에 올려놓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에는 계급이 나뉘어 있는 시티와는 달리 계급이 없었다. 하지만, 계급이 없는 마을이라고 해서 단상에서의 확성기를 잡는 피크처럼, 즉, 권력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래를 향하고 있던 워블은 시선을 느낀 듯 퓨티가 서 있는 곳으로 고개를 틀어 왔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거의 동시에 확인했다. 퓨티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 워블은 한 손을 올려 스카프의 끄트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빙글 던지며 숙인 듯 만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퓨티는 속으로 속삭였다.
‘재수 없어.’
그리고 퓨티는 삐걱대는 계단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마을의 집들은 모두 같았다. 지붕면은 바닥과 수평을 이루는 직선 구조였고, 너비라든지 색이라든지 창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모두 자연과의 일관된 방치처럼 형태가 일정했다. 차이점은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얼굴, 성별, 나이, 그따위 것들뿐이었다. 숲속에 숨어 직육면체 형태로 좁아지는 모양의 집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없었다. 각각이 표출하고 있는 그들만의 고유한 흠집이나 꾸밈으로써 대중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역시도 쉽게 자리 잡힌 불문율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 차별성을 두자는 의견으로 대문 아래에 명패를 매달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반대한 이가 딱 한 사람 있었다. 피크였다. 그가 숲속 마을의 제작자였다. 창립 멤버로서 시티의 때가 묻어 있던 피크는 12년 전에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강경했다. 사는 데에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시티와 다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피크의 철학과도 같은 심보였다. 사람들은 소극적이었고, 겁에 질려 있었다. 함께 도망쳐 나온 피크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크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는 것. 욕망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티에선 가누지 못한 것들을 도망자들 사이에서만큼은 쟁취하고 싶다는 욕망. 절대적 지도자를 잃은 사람들은 자신들 가운데에서 리더십을 내비치는 피크에 이끌렸다. 말 그대로, 단상에 올라 확성기를 잡는 것은 피크만이 할 수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레드 할아버지!”
거리로 나선 퓨티는 길을 걷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퓨티의 활기찬 인사에 레드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레드는 마을 사람 중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키와 그 키에서도 비쩍 마른 몸, 무시당할 만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누구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사람이 노인에 레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도 피는 빨갛다는 것.
“변함없이 부지런하구나, 퓨티. 오늘은 밭일을 나가는 게냐?”
레드가 양손 가득한 퓨티의 짐을 보며 말했다. 레드의 목소리는 중후를 넘어, 깊었다. 퓨티는 레드와 말을 나눌 때면 시원한 동굴에 발을 들인 것 같아 기분이 좋곤 했다.
“네. 오늘은 마토 씨가 자리를 비우셔서요. 아, 왜 자리를 비우시냐면 어제 마토 씨가 그토록 바라던 조각칼을 교환하시는 데 성공하셨거든요.”
교환, 일명 약속의 날이었다. 약속의 날은 마을에서 유일하고도 공식적인 거래 수단이었다. 유일하고 공식적이라는 건 장사와 같은 행위를 금기시하는 데 의의를 둔 명목이었다. 교환은 달이 시작하는 날인 1일,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횟수엔 달리 제한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일시에 맞춰 재료를 준비하거나 준비한 물건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가늠해 보기만 하면 됐다. 대신 교환 장소는 정해져 있었는데, 단상이었다. 다시 말해, 화폐, 마을에는 화폐가 없었다. 화폐를 사용치 않는다는 행위는 그 어떠한 것보다 마을에 많은 변화를 안겨 주었다. 황토색 토지 위로 붉은빛의 사형대를 세워 올렸고, 세상을 떠난 이의 숭고한 무덤 옆으로 조롱의 말뚝을 박아 넣었다. 굵직하게 일을 치르거나 삐뚤게 구는 사람들은 이제 마을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현재까지 마을에 박힌 말뚝은 총 셋. 하나 같이 악취가 심하고 흉물들로 득실대는 장소였다. 셋 모두 죄목은 살인이었다.
“그래? 그 귀한 걸 무얼 주고 얻었을꼬.”
레드는 상상하듯 아련하게 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매일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 봐 왔는데. 대단해요.”
“왠지 궁금하구나, 퓨티. 다음에 만나면 한번 물어봐 주겠니? 내게 구경시켜 줄 수 있는지도 말이야.”
레드는 부탁의 말을 끝으로, 가던 곳으로 걸음을 내려놓았다. 퓨티는 레드의 그 행동이 대화에 지겨움을 느꼈을 때 보이는 행동임을 잘 알았다. 퓨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레드는 이미 자신의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스러운 거리가 나타났다. 안전모 아래로 땀 내음을 가득 머금은 사내들이 복판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퓨티는 깊이가 얼마 되지 않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서, 곁눈질로 그들을 살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소리치는 대부분이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을 추켜세워 있었다. 그들과 똑같은 손 모양을 주머니 속에서 흉내 내며 시선을 따라간 퓨티는 끝에 선 사람을 확인한 순간, 땅을 차고 내달렸다.
“마토 씨!!”
마토가 주인공이었다. 마토는 자신 앞의 모두를 상대할 심산인 듯 상의를 거의 다 풀어 젖혀 있었다. 퓨티는 사람들 사이를 뚫고 마토의 곁으로 몸을 날렸다.
“무슨 일이에요? 왜들 이러시는 건데요?”
사람들은 여전히 상기된 호흡을 내쉬었지만, 그나마 말이 통할 상대가 나타났다는 데에 대한 안심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했다. 첫마디부터가 그러하였다.
“퓨티! 때마침 잘 와 주었다. 마토 씨가 또다시 약속을 어겼어. 여기 있는 모두가 속아 넘어갔다고. 아니, 그는 다시 말장난을 펼친 거야. 타고난 못된 머리로 말이지.”
그에 퓨티의 뒤로 몸이 가려진 마토가 헝클어진 옷깃을 정리하며 대꾸했다.
“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벚꽃이 질 때까지가 기한이라고요.”
“벚꽃이 남아 있잖은가! 자네 눈에는 저 꽃잎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가 검은 자루를 붕붕 뒤흔들며 말했다. 태어나 웃음이라곤 지어 본 적 없을 듯한 생김이었다.
“마토 씨,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지난번처럼 중재를 놓아드려도 될까요? 상황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퓨티는 재미없는 밭일을 미룰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기쁘게 한 것은 시티 흉내를 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물론 무엇을 한들 가벼운 역할 놀이에 불과했지만, 퓨티는 그래도 좋았다.
“지금 제 선에서 보기에는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기로 한 것 같은데, 맞나요?”
퓨티는 마토를 보며 물었다.
“그래요, 퓨티. 나는 저들에게 종자를 나눠 주기로 약속했어요. 시간은 공식 석상에서 물건으로 작용하지 않으니까요.”
시간은 물건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 다시 말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노동을 물건으로 대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답한 마토는 옷맵시를 정돈했다. 다혈질적인 행동거지와는 다르게 늘 안정된 톤 위에서 격식이 갖춰져 있는 말투, 마토의 특징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토의 그러한 이중성을 좋은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은 마을 내에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종자요? 지난해에 수확한 종자라면 올봄에 배급하였잖아요.”
“머저리들.”
“뭐라고, 이 새끼야?”
마토의 중얼거림을 들은 연장자가 낡은 주먹에 힘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봄비와 꽃샘추위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종자를 나눠 주니 이 사단이 나는 겁니다.”
“올해는 봄비도 꽃샘추위도 오지 않았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래요? 그럼, 여러분들은 여기 왜 있는 겁니까? 그 귀한 종자를 왜 썩힌 겁니까? 금기에 가까운 인력을 왜 교환의 대상으로 들고 왔습니까?”
마토는 자신의 말 음절 하나하나에 맞추어 사람들 얼굴에 깃든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였다. 열댓 명 남짓한 사람들 모두가 한 번씩 어깨를 들썩거렸다. 마토가 뱉은 방금의 말은 마을 사람들의 심기를, 그리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대단히 위험한 문장이었다. 화폐가 없는 마을에서 인력이란 건 곧 물건을 뜻했고,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도구로 격하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꼴이 되었으니까.
“먹어야 하니까요!!!”
중년들의 배꼽 위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었다. 키가 160인 퓨티의 배꼽보다도 아래에서 난 소리였다.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그라들어 갔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자기들의 입에서 나와야 했을 이야기였다고.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남자 하나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아이를 감싸며 말했다. 아이는 흙먼지투성이인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뭐라 말을 중얼거렸는데, 그 길로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마토 씨.”
퓨티는 마토를 불렀다. 마토는 말없이 퓨티를 향해 눈썹을 들어 보였다. 역시, 라고 퓨티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꽃잎으로 장난을 치신 건 너무하셨어요.”
“재밌지 않니?”
“정량의 보수를 받는 저야 재밌죠. 하지만 저들 역시 마토 씨를 믿고 이곳까지 와 시간을 들이는 거잖아요. 아직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투르더라도요. 다른 것도 아닌 인력이에요. 지금이 벌써 두 번째고요. 사람들이 웃어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거예요, 마토 씨.”
“알고 있어, 그리고 적어도 오늘이 그날이 아니라는 것도.”
“어떡하실 거예요?”
“어떡하긴, 약속대로 해야지.”
“처음 말씀하신 꽃이 지는 날이라면, 오늘은 지지 않았는걸요.”
“아니, 잎은 졌어.”
마토는 손가락을 뻗어 나무의 휑한 가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을 쫓아간 퓨티는 어이없다는 입꼬리로 빈 곳에서 가득한 곳으로 시선을 훑어 내렸다.
“보통은 이파리가 남아 있지 않을 때를 가리켜 꽃이 졌다고 표현하지 않나요.”
마토는 피식하더니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상기돼 있는 다섯을 향하여, 나머지 열을 향하여 말했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다음, 시기가 좋을 때 저 개인으로 다시 한번 거래의 장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돌려 드릴 종자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