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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지 Sep 16. 2023

가계부, 넌 누구냐?

맞벌이인데 연 3천도 못 모은다면

한창 재테크 열풍이 불고 있던 2021년 2월 어느 날이었다. 이제라도 투자에 관심을 갖고 뭐라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종자돈을 모으나, 고민이었다. 맞벌이를 하고 있지만 좀처럼 남는 게 없는 가계 지출을 관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혼한지 20년이 지났지만, 매월 생활비를 대략 얼마쯤 쓰고 있는지, 도대체 어디서 돈이 줄줄 새고 있는지, 아낀다면 얼마나 아낄 수 있는지, 전혀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매월 되는대로 신용카드를 긁다가, 월급날 청산하고 ‘무'에서 다시 시작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무력감이 들었다.


어느 날 구독중인 블로거 한 분이 자기가 특별 제작한 가계부 템플릿을 공유해주겠다고 했다. 바로 신청했고, 며칠 후 그 분의 메일이 도착했다. 총 7장의 엑셀시트로 구성된 그 가계부 양식은 정말 대단했다.


1. 월 현금흐름표 : 월 수입, 지출, 저축, 예비비, 대출 등을 표로 정리

2. 월 고정지출 : 건강유지비, 공과금, 학원비, 구독료 등 자동이체 내역을 표로 정리

3. 월 변동지출 : 식료품, 생필품, 아이들, 자동차, 반려견 등 지출 항목별 분류

4. 연간 행사 일정 : 각종 명절과 기념일, 세금 관련 비용을 연간 일정표로 정리

5. 대차대조표 : 자산, 부채, 대출내역(금리, 이자, 만기 등)

6. 가계부 달력

7. 식단 달력


이런 대단한 가계부를 공유해주시다니 정말 복받으실 분이다, 생각하면서 한 장, 한 장을 채워보았다. 각 시트마다 연동이 되어 있어 사실 2-5장을 작성하면, 종합분석표 1번은 자동으로 짠~ 완성되는 구조였다. 2박 3일에 걸쳐 완성한 가계부 엑셀시트는 보기만 해도 뿌듯했다. 월 수입, 자산 부분이 너무 휑~한 것 이외에는.




문제는, 가계부 엑셀시트를 다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1-5번 시트까지는 잘 써놓았지만 6번 시트를 잘 쓰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실컷 카드를 긁다가 월급날 청산한 후 남는 찌끄레기를 저축하는 행태는 계속되었고, 어쩔수 없는 무력감도 지속되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엑셀시트 대신 가계부 앱을 다운받아 써보기로 했다. 월 예산과 고정비용을 등록하고, 변동지출 항목을 분류했다. 돈을 쓸 때마다 귀찮지만, 앱을 켜서 지출내역을 기록했다. 그런데 아직 2주도 안지났는데 지출내역이 예산을 초과한 것이다. 아, 이번 달에 아이들 여름옷 샀구나...이번 달만 예외겠지 생각했지만, 다음 달은 남편의 치과치료비, 그 다음 달은 내 휴대폰 수리비, 아이 보충과외비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은 신기하게도 매달 참신한 아이템으로 계속 생겨났고, 지출이 예산을 초과하는 일은 반복되었다.


그래, 이쯤에서 그만두자...내가 졌다.


어짜피 빤한 소득과 빤한 지출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명품백을 사는 것도 아니고,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닌데...뭘 얼마나 아끼겠다고! 그냥 편하게 살자.




그렇게 중단한 가계부 쓰기에 다시 도전을 하게 된 건 그 해 연말이었다. 우연히 알라딘 앱을 켰다가 한창 연말 마케팅 중인 '6년 연속 1등, 국민가계부' 광고 배너를 보게 된 것이다. 초간단 구성에다가, 수기로 지출내역을 꾹꾹 눌러 적다보면 절약효과 만점이라는 문구에 나도 모르게 주문을 했다. 만원도 넘는 돈을 내고서.


배달된 가계부는 솔직히 실망이었다. 별로 특별한 것도 없고, 부록인 <냉파 레시피>는 요리를 안하는 나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돈 아끼려다가 돈만 버렸네. 돈이 아까워서 한 달 정도 쓰는 척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아, 나는 태생이 가계부를 못쓰는 사람인가?

가계부, 도대체 넌 누구냐?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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