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한순간, 소소한 나만의 생각의 세상.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나는
평범한 장면 속에서 작은 주제를 가지고,
나도 모르게 ‘생각의 세상’으로 잠시 빠져든다.
때론 장난스럽게, 어쩌면 매우 무겁게?
때는 마포 서울살이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지내는 곳은 마포역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당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마음먹고, 영어를 써보고자 외국인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다.
숙식을 해결하는 대신, 오후 2시까지 게스트하우스 청소나 간단한 업무를 해야 하는 조건,
이는 지방에서 올라와 지내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수입이 없기에, 나를 비롯해서 이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요소처럼 여겨졌다.
이 때문에 나는 공덕에 위치한 이탈리아 레스토랑 홀 매니저로 일을 했었고, 오늘의 이야기는 레스토랑 출근길에서부터 이어진 이야기다.
내가 지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레스토랑까지 거리는 도보로 30분 정도, 버스를 타면 세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다.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걸어 다녔었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피로가 쌓인 나는 출근길의 대부분을 버스를 이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포역 부근에서 나는 버스를 기다린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7000번대 버스.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도착하는 버스라 나 역시 비슷한 시간에 맞춰 버스를 기다리고는 했다.
추운 겨울이었던 그날, 이날만큼은 평소와 달리 버스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던 그날.
걸어서 출발했다면 벌써 근처까지 갔겠다는 후회를 할 때쯤, 내 버스를 제외한 다른 번호의 버스들만 내 앞에 정차하기 바쁘다.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던 때 5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버스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본능적으로 내 눈앞의 파란 버스를 타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곧장 나는 눈앞의 파란 버스에 발 한쪽을 걸친다.
‘기사님 홍대 쪽 가나요?’
갈 리가 없다. 지방에서 올라온 초보 서울살이지만, 홍대로 가는 방향정도는 아는 사람이다.
‘안 가요 반대편에서 타세요’
머릿속에서 그리던 대답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하지만 나의 목적은 이게 아니었으니,
내가 그럴싸한 이유로 기사님의 닫힘 버튼을 지연시킨 순간에 하얀 얼굴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는 버스에 무사히 탑승했다.
숨을 헐떡이며 교통카드를 찍고 탑승한 여학생은 곧장 밖에 서있는 나를 쳐다본다.
어떤 의도를 갖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내심 뿌듯함이 들었다.
여학생은 나의 행동의 의미를 알지 못하니 아리송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기분 좋은 순간을 간직하지 못한 채 나는 이날 지각을 하고 말았다.
이 추웠던 날, 내가 처음으로 지각했던 날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로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예쁜 여학생을 위해 버스를 잡아줬다는 사실조차 잊힐 때였다.
그 추웠던 날과 비슷한 상황, 나의 7000번 버스는 평소와 다르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날의 추위만큼은 아니었지만 고약한 서울 추위를 패딩 속에 숨어 견디며 버스를 기다리던 그런 상황.
이날 역시 걸어서 출발할 것을 후회하던 날이었다.
매번 이런 생각 속에서 이상한 보상심리에 빠져 기어코 버스를 타고 출근하고는 했다.
머릿속이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찼을 때, 또다시 내 눈앞에 파란 버스가 멈춰 선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순간이다라고 생각이 들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데자뷔 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일주일 전 그 하얀 얼굴의 여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 눈앞의 파란 버스를 향해.
이날의 나 또한 눈앞의 파란 버스를 멈춰 세운다.
그날의 나처럼.
‘기사님 합정 가나요?’
바뀐 거라곤 겨우 홍대에서 합정이라는 단어일 뿐 사실상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어보는 상황은 같았다.
나는 그저 이 기사님이 일주일 전의 동일한 기사님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이후 상황 역시 비슷하게 흘러간다. 기사님은 반대편에서 타라는 말을 건네고, 그 하얀 얼굴의 여대생은 무사히 버스에 탑승한다.
나의 기분 또한 비슷한 시간을 되풀이하듯 뿌듯함을 머금는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같은 시간에 놓인 것만 같다고 느낄 때 버스를 탄 여학생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아니? 정확히 나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감사를 전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믿기로 하고 그녀의 감사를 품고 이날만큼은 지각하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든다. 참으로 묘한 날이다.
다시 며칠이 흘렀다.
역시나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그 여학생 생각이 난다.
사실 얼굴이 하얗다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얼굴도 그녀에 대한 정보도 없다.
그도 그럴게 매번 그 여학생은 죽을힘을 다해 뛰고, 나는 기사님을 바라보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기 바빴다.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은 그 여학생이 버스에 무사히 탑승 한 뒤이다. 그것도 많은 버스 승객과 버스 창을 사이에 둔 채로 보는 게 전부인.
다시금 드는 생각은 그 여학생은 왜 매번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놓칠까?라는 것 정도였다.
우연히 내가 그 사람의 어느 순간에 닿아있는 사람인가 라는 생각과,
나와 마주치지 못한 날의 그녀는 뛰다 지쳐 다음 버스를 타는 건가 라는 생각.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흘러가는 하루 중 얻게 된 작은 행운정도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말이다.
그렇게 이 날은 이런 생각들 속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10분 정도를 일찍 나왔던 나는 걸어갈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내심 그 여학생과의 만남을 기대했는지 버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의 이런 기대를 누군가가 실현시켜 준 날이기도 하다.
그 여학생을 생각하며 버스 정류장에 서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그 여학생의 생각을 한다.
그러자 내 옆에 그 여학생이 다가와 나란히 섰다.
‘이게 현실이 되네?’
못 본 척 시선을 앞에 두고 있지만, 온 힘을 다해 나의 옆에 있는 그녀를 의식한다.
상대 또한 힘이 잔뜩 들어간 느낌이다.
그렇게 서로를 성실히 신경 쓰다 보니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더해졌다.
5분 정도가 흘렀다.
나의 답답함을 못 이긴 건지, 인연을 맺기 위한 그녀의 용기인지,
무엇이 되었던,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이와 동시에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느낀 누군가의 장난이 더해졌다.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하고 말았다. 여학생이 건넨 말 한마디, 그리고 다가오는 나의 7000번대 버스.
나는 찰나의 순간에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위에 놓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버스를 타는 쪽을 택했다.
이후에 이 선택에 대한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다.
그 시절의 나는 운명, 인연 등의 단어에 대한 소중함보다는 아르바이트 지각이 더 무서운 그런 사내였다.
이날을 끝으로 그 여학생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환 폐렴이라는 이름의 전염병이 시작되면서 나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관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종종 이 여학생과의 스토리가 생각이 난다.
아쉬움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 이야기 아닌, 인연이라는 단어를 얘기하기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부터 꼬리를 무는 나의 생각 세상.
인연
-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의미.
-일반적으로 우연과 필연이 맞물려 형성되는 인간관계.
철학적인 관점에서 인연은 단순한 만남에 끝나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영향을 끼치는 관계로 본다.
이 처럼 수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과의 인연 속에서 살아간다.
위의 여학생 스토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인연에 대한 생각을 하고는 한다.
우연으로 시작된 상황이 필연처럼 반복되다가 아무것도 아닌 나의 순간의 선택으로 인연이 되지 못한 관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인연이 닿지 못한 관계가 얼마나 많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너무나도 많다.
그 속에서는 미처 다가가지 못해, 관계 자체가 성립이 안된 사람도 있고,
순간에는 서로의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뜨거웠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 즉 현재는 존재하지 않은 인연도 존재한다.
불과 어제까지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인 사람이, 오늘은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는 것 또한 인연이라 부른다.
철학적 관점에서 얘기하는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영향을 끼치는 그런 관계를 우리는 끝없이 맺고 끊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나는 매번 인연이라는 단어를 방패막이 삼아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첫사랑 같은 친구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이 되어 서로 정말 가까운 사이로 지내 왔지만, 이는 내가 원하는 관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작은 키에 귀여운 외모, 거기다 활발한 성격을 가진 그 친구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그 시절의 나 또한 겁이 정말 많은 사내였기에 친구라는 이름에 숨어 그녀의 옆에 있고자 했다.
아니 그렇게밖에 그 친구 곁을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는 차고 넘쳤다.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면 매번 나를 찾아왔던 그녀에게, 나는 단 한 번의 용기만 냈다면 원하던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느 날, 그녀가 가족문제로 힘들어 하며 나를 애타게 찾았던 그날,
나의 휴대폰 배터리가 갑작스럽게 방전되어 그녀의 연락을 받지 못했던 그날,
평소처럼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면 또 우리의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어느 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서로 고민하며 같은 학교 진학에 대해서 고민하던 그날,
내가 야구를 하고 싶다며 야구 명문고인 남고로의 진학하는 선택 대신, 그녀와 함께 고등학교를 갔었다면,
또 우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가족이 아닌 타인 중 처음으로 나를 가장 아껴준 친구였다.
나 역시 가족이 아닌 친구가 아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마음을 알게 해 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 겁 많고 어리석었던 그 시절의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준 귀인이다.
나의 평생의 첫사랑이자 나에게는 그저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로 밖에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내가 용기 내지 못한 순간들에 대한 후회를,
내가 그 친구에게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저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로 변명할 수 있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과의 인연은 끝내 닿지 못하였고,
나도 모르게 닿은 인연과 더 깊은 인연이 되어 있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필연과 우연의 맞물림이라니,
한없이 작은 존재인 인간에게, 광활한 우주보다 더 큰 세상 속을 살게 해 준다.
그런 인연이 나는 참으로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