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추억으로 자리한 식당.
한순간, 소소한 나만의 생각의 세계.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던 나는
평범한 장면 속에서 작은 주제를 떠올리고,
어느새 ‘생각의 세계’로 빠져든다.
때론 가볍고 장난스럽게, 때론 깊고 무겁게.
나의 도쿄에서의 주소지. 도쿄도 키요세시.
키요세역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10분이 걸린다.
집으로 향하는 10분 중 정확히 반쯤 도달했을 때 매번 나의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으니, 큼지막한 간판에 적힌 ‘とんかつ‘라는 글자.
한눈에 봐도 허름하고 쇼와시대보다 훨씬 더 오래된 느낌을 머금고 있는 영업하지 않은 식당이다.
도쿄에 도착한 첫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눈이 가던 곳이었다.
우리 동네 키요세는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동네다.
그만큼 오랫동안 영업해 온 맛집들이 많고, 대를 이어서 운영하는 식당도 존재한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돈카츠집을 방문하는 날을 기대하고는 했다.
영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내가 도착한 뒤 일주일정도가 되어서야 더 이상 문을 여는 식당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워낙 오래된 식당이 많은 일본이기에 알아차리는 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은 기대에 눈이 가려져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그 돈카츠집은 누가 봐도 문을 닫은 식당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뒤로 동네를 오가다가 돈카츠 집주인 할아버지로 보이는 분을 봤다.
어떻게 알아봤냐고 묻는다면, 그 가게에서 나오시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상당히 마른 체구에 백발의 머리, 활처럼 휜 허리까지 장수의 나라 일본에서는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추측으로는 80대에서 90대가 아닐까 싶다.
매번 상상으로 방문하던 나만의 맛집이었는데,
주인 할아버님의 실체까지 보고 나니, 나는 괜스레 더 이상 영업하지 않은 식당의 아쉬운 단골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 동네 키요세에는 이렇게 흔적만 남은 가게들이 많다.
동네 산책을 다니다 보면 센베(전병) 가게, 라멘가게, 소바집, 빵집 등
죄다 오래된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모습만 유지하는 곳들이다.
이중에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자리한 작은 일본식 카페도 포함된다.
이 카페의 모퉁이를 돌면 바로 집이 나오기에 매번 돈카츠집과 비슷한 상상을 하면서 지나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키요세에 머문 지 11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 이 카페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나폴리탄이라는 심플하지만 클래식한 메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도쿄를 떠날 무렵에 이 카페를 방문해서 나폴리탄을 먹었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몇 년 전 문을 닫았다가 지금은 상태도 좋아지시고, 적적하기도 하셔서 점심에만 잠깐 장사를 시작하신다고 한다.
재오픈한 카페는 금세 동네 할머님들의 아지트가 된 듯했다. 모두들 저마다의 이 가게의 주인인 것처럼 말이다.
카페 손님으로 오신 할머님께 돈카츠 식당에 대한 얘기도 짤막하게 들을 수 있었다.
꽤나 맛 좋은 곳이었다고, 주인 할아버지께서 이제는 장사를 할만한 몸이 아니라 문을 닫게 되었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이후에는 문을 닫은 지는 꽤 오래전 일이라는 말씀과 함께 아쉬움과 쓸쓸함을 나에게 전달해주시기도 했다.
다시 문을 열게 된 카페처럼 돈카츠집도 어느 날 웃으며 문이 열려있기를 잠시나마 기대해 본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영업하지 않은 식당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식당.
나에게도 그런 식당들은 분명 존재한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은 식당이 문을 닫으면 그 장소에 다른 가게가 들어선다는 점.
급변하는 한국 사회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추억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 장소들을 생각해 본다.
중학교 여름방학.
나는 방학임에도 매주 한 번씩은 학교에 들러야만 했다.
이유는 ‘상품권’
이 상품권은 학교 근처 식당에서 5천 원 정도 가격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권 개념이었다.
편모가정이었던 나에게 학교는 여름방학 때면 식권을 제공한다.
당시에는 이 식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었다.
주변 친구들은 소수의 인원만 이 식권을 받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중학생이란 나이는 그리 어린 나이만은 아니다.
대부분 이 식권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순수한 마음에서 나에게 꼭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럴싸한 대답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어설픈 웃음을 지었던 것 같다.
사춘기의 강도가 가장 강했던 시기, 이 식권을 쓰지 않으려고 버렸다가 담임 선생님께 걸리는 바람에 엄마에게 연락이 가기도 했다.
식권은 정해진 수량만큼 근처 식당들과 학교 간의 협의가 이루어져 있었기에, 식권을 배부하면서 일련번호와 함께 관리가 되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효율적인 시스템을 알지 못했기에 금세 들킬 짓을 했었다.
그렇게 담임 선생님과 엄마에게 혼이 나고는 이 식권을 사용해야만 했다.
근처 많은 식당들 중에서 가장 골목 안쪽에 자리한 김밥집에 들어섰다. 같은 학급 친구들을 마주 치 않기 위한 선택이다.
나는 이 여름방학 내내 이 김밥집에서 돈가스 김밥 두 줄을 포장해서 집으로 향했다.
5천 원 금액을 정확히 맞춰야 했기에, 당시에 한 줄에 2천 오백 원이나 하던 돈가스 김밥 두 줄을 고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던 기억이 나지만, 당시의 나는 그저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두께의 돈가스 한 장과 단무지, 그리고 달콤한 소스에 버무려진 밥.
이 김밥집 돈가스 김밥은 굉장히 심플하지만 그렇기에 맛이 좋았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 맛일 만큼 말이다.
당시의 김밥집 사장님은 매번 찾아오는 나에게 5천 원이 넘어가도 좋으니 꼭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가난함과 평범하지 못한 모습을 동정받는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빚지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사춘기 소년의 반항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겁쟁이의 소심한 반항은 반드시 돈가스 김밥을 두줄을 사서 돌아가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여름방학의 마지막 주. 한 번만 불편한 김밥집 사장님 얼굴을 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평소와 똑같이 돈가스 김밥 두 줄을 주문했다.
앉아서 기다리라는 사장님의 말을 정중히 거절하고, 나는 매번 당장이라도 나갈 준비를 한채 입구에 서있다.
김밥이 담긴 봉지를 받아 들고 머리를 숙이고 가게 밖을 나섰다.
당분간은 수치스러운 상황은 오지 않겠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그렇게 더운 여름날 김밥이 상하지 않게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김밥이 담긴 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제야 김밥이 두줄이 아닌 세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창피한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해, 평소보다 봉지가 무거운 줄도 그때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사장님이 다른 손님과 주문이 헷갈리신 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겁이 났다. 다시 돌려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그런 모난 마음으로 봉지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김밥과 김밥사이에 끼워진 작은 포스트잇 한 장.
‘참치김밥도 맛있어, 많이 먹어라~’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사장님의 온기.
이 시기의 나는 누군가로부터 매번 신세를 지며 살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감사함보다는 역시나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사장님의 따뜻한 사랑보다 누군가로부터 받는 동정이 지독하리만큼 싫었다.
꽤나 어리석은 마음이지만, 어린 나는 그렇게 불안정한 아이다.
나는 이날 돈가스 김밥 두 줄과 함께 참치김밥까지 남김없이 해치웠다.
그리고 이후로 김밥집을 찾지 않았다.
따뜻한 마음이 꼭 아름다운 끝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 8년 만에 고향땅에 몇 달을 머물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15년가량이 지난 시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김밥집을 찾아갔지만, 역시 다른 가게가 들어서있었다.
사실 이제 와서 김밥집이 자리하고 있었을지언정,
무언가를 다짐하고 발걸음은 옮긴 것은 아니었기에 내가 무엇을 바랐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감사함을 전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나의 후회를 갚고 싶었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 얼룩과도 같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졌을 뿐이다.
한없이 불안해 보이고 안쓰러웠던 어린 저에게,
혹여나 당신의 사랑이 전해지면 깨질까 불안했던 저에게,
정말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사랑을 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못난 저는.
사장님의 인생 또한 누군가로부터 그런 사랑들을 돌려받는 삶이 되시기를 뒤늦게나마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