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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나나 Oct 10. 2023

편의점 일이 제일 쉽다고요???

#4. 촌년, 강남호텔에 머물다

집안일과 아이들 챙기느라 몇 년간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나는 갑자기 바빠졌다. 편의점을 들락날락 거리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아저씨와 편하게 수다만 떨 수는 없었고 아저씨가 말하는 모든 것에 귀 기울여야 했다. 한 손에는 수첩을, 또 한 손에는 볼펜을 꽉 쥐고 아저씨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적어 내려갔다. 슈퍼를 할 때는 과자, 술, 잡화 등 물건이 들어오면 검수만 제대로 하고 계산만 잘하면 되었는데 뭐가 이리 복잡한지.

아저씨는 본사 매니저를 통해 점주 변경 신청을 했고, 나는 매니저와 면담을 해야 했다.

단정한 외모,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격, 또박또박 경어체를 쓰는 매니저는 마치 여군처럼 멋있는 사람이었다.

매니저는 아저씨가 일러주었던 편의점에 대해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줄줄 이어나갔고 나는 반쯤 알아듣는 척을 하며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내일은 지점장님 면담과 테스트가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매니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무슨... 또 면담을... 그리고 테스트라니...

점주가 되려면 아직도 많은 절차가 남아있다며 매니저는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아... 갈길이 멀구나.

다음날 매니저와 함께 지점장님을 만났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지점장님은 질문을 던졌다.

"편의점이 뭐라 생각해요?"

네? 뭐라니... 편의점은 그냥 편의점이지. 대뜸 던져진 질문이 추상적으로 들려 말문이 막혔다. 그와 동시에 면접이 시작되었구나, 20대에 느꼈었던 긴장감이 몰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는 곳이 편의점이라 생각해요. 편의점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고 사람들이 찾는 상품은 거의 없는 게 없잖아요."

떨리는 목소리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한 나에게 지점장님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본사는 뭘 해주죠?"

"본사는 점주들을 서포트해 주는 곳이라 생각해요. 상품을 배송해 주고 점주들의 의견을 듣고 수용해 주는."

지점장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퓨터 화면에 테스트 문항을 읽고 잘 표시하라는 말과 함께. 몇 백 문항이 넘는 질문지는 컴퓨터 화면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예, 아니요, 를 누르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성실히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가며 표시를 해 나갔다. 중반부터는 애매하게 말만 꼬아놓은 비슷비슷한 질문들이 나왔다. 아까, 나왔던 질문 아니었나? 또 나왔네, 이 질문.

몇십 분째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랄까, 질문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느껴졌다. 어지럽고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내 돈 내고 내가 사업하겠다는 데 이걸 꼭 해야 되는 건가?

점주가 되기 전에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지만 테스트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며 겁을 준 아저씨의 말이 떠올라 꾸역꾸역 테스트를 마쳤다.




매니저와 거의 매일 만나 수많은 서류에 도장이 닳도록 찍어댔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저씨의 보충설명을 들으며. 서류는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사에서 승인이 떨어져야 했고 팽이처럼 바쁘게 돌았던 생활이 잠시 멈추어졌다. 이제는 마지막 절차인 본사 교육만 남겨져 있었다.

인원이 어느 정도 되어야 교육을 시작하는 시스템이라 나는 마냥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나에게 떨어진 날짜는 한참 뒤에 있을 편의점 재오픈날 열흘 전. 즉, 나는 일주일의 교육을 마치자마자 편의점에 출근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음 같아서는 후딱 갔다 와서 편의점을 재정비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받아들여야 했다.

드디어 강남에 있는 본사로 가게 되는 날.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본사는 호텔을 제공해 주었다. 오호, 좋구먼. 촌년, 서울구경 간다~

일주일치의 짐을 꽉꽉 눌러 담은 캐리어를 끌고 본사에 도착했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강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무 명 정도의 예비 점주들과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줄 몇 명의 본사 직원들이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나는 맨 앞줄에 이름표를 발견하고 자리에 앉아 짝꿍이 될 옆자리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담한 체격에 단아하고 예쁜 외모를 가진 그녀는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였다. 성격이 너무 좋은 언니덕에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교육을 받는 중에도 마치 여고생 시절로 돌아간 듯 속닥속닥 수다를 떨며 시시덕거렸고 옆에 앉은 사람이 호텔도 같은 방으로 배치된다는 말에 언니와 나는 동시에 좋아라 소리를 질렀다. 스무 명 정도의 인원 중 호텔에 머무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었다. 여자 네 명에 남자 두 명. 일주일 동안 우리는 함께 움직였다. 수업이 끝나면 밥도 같이 먹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친목을 다졌다. 우리 여섯 명이야말로 진정한 동기라면서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편의점을 하더라도 정기적으로 만나자며 약속을 다졌다. 광주, 전주, 순천 등 각지에서 만난 우리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허물이 없었고 짧은 기간을 맘껏 즐겼다. 각자 돌아가면 한 개의 사업체를 가지게 될 예비 점주들은 어린애 마냥 들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첫날부터 본사 건물 앞에서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소리 높여 외쳐대는 데모의 현장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세계의 기대심에 잔뜩 부풀어 있는 우리의 마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때는 몰랐다. 데모를 하는 사람들이 매일 본사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이유를. 그리고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드높였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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