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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30, 반격反擊1951

by 윤해 Feb 10. 2025



전시나 평시나 질서 있는 퇴진退陣은 매우 중요하다. 질서 있는 퇴진退陣과 뿔뿔이 흩어져 패주敗走하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로 다르다. 질서 있는 퇴진은 다음의 반격을 기약할 수 있으나 뿔뿔이 흩어지는 패주는 반격은커녕 궤멸로 곧장 달려간다.

막강한 해 공군력을 가지고 흥남에서 질서 있는 퇴진을 한 유엔군은 그와 동시에 서부전선에서도 중공군에 밀렸지만 공군력의 엄호를 받으며 병력과 장비를 38선 이남으로 옮기는  질서 있는 퇴진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후퇴로 어수선 하던 1950년 12월 23일 낙동강 방어선의 영웅 1889년생 월턴 워커장군이 단장의 미아리고개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숨지고 그 후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에서 참전한 장군 릿지웨이가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선으로 날아왔다. 릿지웨이는 제8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자마자 강인한 카리스마와 뛰어나고 과감한 전략, 전술을 통해 그 직전까지만 해도 유엔군의 패색이 짙던 전세를 1951년 봄부터 다시 역전시켜 버렸다. 유엔군이 38선을 내어주고 오산 삼척라인까지 밀렸을 때 미군 합참본부는 한반도에서 철군하기로 의견을 이미 모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공군에게도 약점이 있음을 설득하여 합참의 철군 의견에 대해 38선을 넘어온 중공군의 정월, 춘계공세를 압도적 화력으로 제압함으로써  중공군의 진격을 끝내 저지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미 8군 사령관 워커장군에 이어 궁지에 몰린 유엔군을 일으켜 세워 반격의 서막을 열었으며 적전 분열된 미 합참과 극동군 사령부를 정상화시킨 릿지웨이 장군은 워크장군과 함께 6.25 전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서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한 한반도의 적화통일 저지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장군이었다.

릿지웨이의 반격에 힘입어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과 병참선의 손실을 입고 38선 이북으로 물러가면서  그들의 전쟁, 순망치한을 이유로 참전한 항미원조 전쟁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전쟁을 확전 할 이유도 의지도 없어졌다.

릿지웨이장군의 반격으로 1951년 3월 초 재수복된 서울은 6.25 전쟁 이후 4번째 주인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고향에서 들었던 1908년 1월생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산하만큼이나 서울의 기구한 운명에 안타까워했다.

그 치열했던 한반도 여름의 열전 낙동강 전선도 혹한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겨울의 냉전 장진호 전투도 애꿎은 수많은 젊은 피만 강토에 뿌려지고 산하에 갈아 넣었지만 젊은 넋의 숭고한 희생도 무위가 되어 전선은 서로 간의 힘의 균형만 확인한 체 38선 부근, 6.25 전쟁 전의 상황으로 정확히 원상 복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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