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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텍사스 부뚜막 Oct 22. 2023

감자와 바꾼 내 엄마

박 감자 여사

미제감자가 좋아


엄마는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에 새로 생긴 일명, 미제집에서 감자를 한 자루씩 사 오셨다.

"감자가 이렇게 길쭉해! 미제라 그런가?"

마트에 갈 때마다 엄마가 사 오시던 투박하고 긴 오리지널 미제 감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보면

“감자튀김을 밥처럼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감자 농사 잘 지었네! 한 입만 먹어봐 응, 응?”하며 소녀처럼 해맑게 웃던 40대의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타임머신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속초로 피서를 갔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피서인파는 일주일 사이에 거의 다 몰려 있었다.  피서길은 영화에서 보던 피난길처럼 장사진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어림잡아 15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언니와 용돈을 모아 산 최신노래 테이프는 긴 여행길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템이었다. 한 시간씩 번갈아 가며 엄마 아빠의 트로트와 나와 언니가 좋아하는 최신곡을 들었는데, 그때는 어른들이 도대체, 왜, 어째서 트로트를 좋아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겐 왠지 공부를 전혀 해놓지 않은 시험 전 날의 느낌처럼 답답하고 불안한 음악이었다.

핸드폰도 게임기도 없었던 시절이라 온 가족이 오롯이 하나가 되어 차 안에서 많은 추억의 게임을 했다. 끝말잇기, 묵찌빠, 우리 가족이 공통적으로 아는 사람 이름 대기… “나는 모르는 사람이야"라는 말이 나오면 게임이 중단되고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졌다.


미국에서 세 아이를 등하교시키며 차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는데 먼저 태운 아이와 함께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어릴 적 하던 놀이를 하곤 했다. 덕분에 세 아이 모두 주변의 아이들과는 비교 불가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어렵사리 도착한 민박집에는 우리보다 먼저 와 묵고 있는 다른 일행이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텃밭에서 재배하셨다며 감자를 삶아주셔서 모두 맛있게 먹었지만 난 감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초딩 입맛의 내게는 별 매력이 없는 먹거리였다.

담이 없었던 민박집 대청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스텐밥공기에 감자를 한알 넣어 수저를 꽂아 들고 오셨다. 소금을 솔솔 뿌려 주시며 으깨 먹으면 훨씬 맛있을 것이라며 내가 그릇을 비울 때까지 옆을 지키고 계셨다.


박 감자 여사께서 감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 냄새


감자만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포실포실 담백한 엄마의 사랑

엄마는 감자를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는 엄마가 8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집에서 초상을 치르는 옛 풍습대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시신을 병풍 뒤에 모셔놓고 장례 준비를 하는데 동네친구들이 몰려와 할머니가 계신 병풍을 열어 보여 달라고 했단다. '8살 엄마'머뭇거리며 우물쭈물하니 삶은 감자를 주며 거래를 했다는 거다.

포실포실한 감자를 받아 한입 베어 물고 병풍을 열어줬다며

"내가 그렇게 어리석었고.. 그렇게도 감자를 좋아했어.."

“다른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엄마가 쪄 주시던 감자 냄새는 왜 그리 생각나는지 모르겠어. "

감자를 너무 좋아해 '박 감자 여사'라고 놀리는 국민학생이었던 내게 감자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슬픈 눈의 엄마.. 엄마는 그날도 감자를 드시고 계셨다


인생의 감칠맛


깍두기를 담그기 위해  감자를 삶았다. 생감자를 갈아서 풀을 쒀야 정석이지만 그냥 삶아서 다른 양념과 함께 버무려도 된다. 감자풀을 넣으면 김치가 텁텁하지 않고 군내가 나지 않을뿐더러 구수한 맛과 감칠맛을 더하고

찹쌀이나 밀가루풀보다 김치를 덜 시게 하는 효과도 있다



미제집에서 감자까지 사다 드시던 엄마를 이제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에게 감자는 절대 잊고 싶지 않은 그리움 아니었을까. 세상의 온갖 감자를 맛봐서라도 오래오래 간직하고픈 엄마와의 기억의 끈...


지난여름 쪽파를 다듬으시며 흥얼거리신던 팔순이 넘은 엄마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혼자 흥얼거려 본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이제 더 이상 '도대체, 왜, 어째서 트로트를 좋아하실까'라는 물음표는 없다.


엄마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삶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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