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떨어지게 해 주시네요

주꾸미를 볶는다는 것은-

by 은조

지난 일요일, 용두동 가서 주꾸미 3팩을 포장해 왔다.

2팩은 그날 점심에 미나리 팍팍 넣고 맛있게 먹어서 냉장고엔 1팩이 남아 있었다. 매콤 칼칼하기에 평일에 먹으면 부글부글 배가 끓어 주말에 먹으려고 따로 냉동실에 넣어 놓지 않았던 1팩의 주꾸미.


수요일 저녁 퇴근 후 냉장고에 있는 주꾸미 팩을 뜯어 볶았다 입에 넣자 속에서 뜨겁고 매웠지만 계속해서 먹어댔다.

스트레스를 쫙 받으니 매콤함이 미친 듯이 당겼기에 주말까지 참지 못하고 팩을 뜯은 것이다.


퇴근 직전 한 명의 사람으로 인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음에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앞에서는 퍼붓고 뒤에서는 숨어있었던-


모든 것에 정이 떨어졌다. 오만정이

일하고 싶은 마음도 사람을 상대하는 상황도 그 모든 것이

집에 와서도 달아오른 얼굴이 쉽사리 내려가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보며 감정을 삭여야 했다.


이런 든 저런들 나의 치유제는 아이들인가 보다

아이들과 저녁 시간을 지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솟아 있던 분노와 억울함 , 걱정이 내려갔다. 이젠 작게나마 있던 정이라 고할 것도 없을 정도로 정이 떨어지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것일까?


이번일을 겪고 나서야 내 감정 상태를 알게 되었다.

여러 상황에 많이 질렸구나 많이 치여있었구나-

지금이 딱 쉬어가야 하는 타이밍이었던 것을

지금 쉬어가야 더 많은 길을 나설 수 있을 거었다. 분명히


잠시나마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는 것이 아쉬운 순간이 있었고 조금은 그 끝이 오지 않기도 바라봤고 끝이 와도 조금은 더디게 가주길 바라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천천히 보내줬는데 , 정말 이젠 더 이상 소음 없이 빨리 끝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끝날 고지가 보이니 생기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생겨나는 이상하고 기분 안 좋은 날들이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나름 주말에 또 맛있게 먹으려 남겨 두었던 빨간 주꾸미를 볶으며 내 속이 눈에 보인다면 이런 새 빨간색일까, 아님 그 반대로 새까만 검은색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주꾸미를 볶아 먹은 뒤 속이 뜨겁고 쓰린듯한 건 느낌일까

아님 나의 감정일까 싶은 그런 하루를 보냈다.


분명 아침엔 좋았다. 오히려 좋았던 게 문제였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심지어 나를 보던 아들이 엄마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전날 저녁잠에 들지 못했다. 황남편이 오기 전 잠깐 눈이 감겼던 거 같은데 어느샌가 다시 동그랗게 떠져 있고 한참을 잠들어 보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해보았지만 까만색 너머에 있는 곳까지 가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길어봐야 2시간?!

그것도 질이 낮고 그 와중에 꿈까지 꾼 그런 잠이었음에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지 않았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서 혼자만 느낄 정도의 기분 좋음으로 시작했는데 끝은 그 반대로 마무리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더 이상의 바닥을 보고 싶지 않을 뿐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미련 없이 미리 싸놓았던 쇼핑백을 들고 걸어 나올 그날만을



디데이는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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