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 선정작 단편소설 10
현관 앞에서 핸드폰을 보며 비밀번호를 주섬주섬 누르는데 갑자기 옆집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그 여자가 실내복을 입은 채 빼꼼히 고개만 내밀어 안나와 아이를 눈으로 훑었다. 안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눈을 내리깔았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여자에게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안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여자는 안나와 아이를 빤히 쳐다보다 문을 닫았다.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옆집 문이 다시 열렸다.
-여기 사세요?
주어가 없는 말이었다. 안나는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기 사시는 분이냐고요.
-친구네 집에 놀러 왔어요.
안나는 재빨리 집주인의 문자를 생각해냈다. 여자는 잠시 안나를 바라보다 다시 문을 닫았다. 안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는 꺄 소리를 지르며 소파로 뛰어들었다. 안나는 쉿!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는 고분고분 소파에 앉았다. 오리고기와 새우튀김을 좀 덜고 햇반을 데워 밥을 먹였다. 꽤 맛있게 먹는 아이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남편에게 전송했다. 남편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이를 간단히 씻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아이는 가방에서 구슬 상자를 꺼내 꿰기 시작했다. 아이는 구슬 꿰기를 좋아했다. 색색깔의 작은 플라스틱 구슬을 꿰었다 다시 쏟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안나도 몇 번 같이 했지만 늘 아이처럼 길게 꿰지는 못했다. 조금 꿰다 보면 다른 조합이 예뻐 보이고 다른 패턴으로 꿰고 싶었다.
아니 자기가 뭔데. 이렇게 좁은 데 사는 주제에, 안나가 중얼거렸다. 맥주를 한 캔 따서 벌컥벌컥 마시며 아이가 남긴 새우튀김 꼬리를 씹었다. 아이는 여전히 구슬 삼매경이었다. 아이는 취향이 확고했고 무엇이 좋은지 서슴없이 선택했다. 어떻게 아는걸까. 뭘 해야 할지 뭘 하면 좋은지. 어떤 방향이 맞는지.
- 엄마, 지호 오빠랑 이모는 언제 와?
- 곧 올 거야.
안나는 맥주 한 캔을 더 따서 마셨다. 오늘은 와인을 마시려고 했는데, 안나는 붉어진 뺨에 손바닥을 대고 식탁에 엎드렸다. 미색의 원목 식탁은 스크래치로 가득했다. 서랍이 있는 걸 보니 식탁이 아닌 책상인 것 같았다. 안나는 혹시나 하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엔 연필과 사인펜 같은 필기구와 쓰다만 지우개, 컴퍼스, 각도기, 하트 모양 틴케이스가 있었다. 틴케이스를 열어보니 조개껍데기와 유리 구슬이 있었다. 안나는 하늘색 유리 구슬을 꺼내 손바닥으로 굴렸다. 기둥만 남은 작은 소라껍데기도 보였다. 바다에서 주운 걸까. 소라껍데기는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기둥만 남기고.
-엄마, 만화 틀어줘.
안나는 잠깐 고민했다. 지하철에서도 유튜브를 꽤 많이 봤는데. 흠, 기분이다. 안나가 리모컨으로 TV를 켜자 아이가 우와 소리를 질렀다. 안나는 쉿! 하며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시크릿 쥬쥬’가 나왔다. 아이는 곧 빛나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뭐, 오늘은 괜찮겠지, 안나는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아이의 조그만 뒤통수와 어깨를 바라보았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휴, 안나는 창 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불이 들어온 롯데타워는 낮보다 훨씬 입체적이었다. 부감이 있는 롯데타워는 꼬리가 잘린 고등어 같았다. 너는 왜 꼬리가 없어, 안나는 새우튀김 꼬리를 집어 롯데타워 꼭대기 방향으로 갖다 댔다. 맥주 한 캔을 더 땄다.
아이는 화면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쥬쥬 일행은 친구들을 괴롭히는 악당과 싸우는 중이었다. 악당은 편한 옷을 입었지만 쥬쥬 일행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쥬쥬가 편한 옷을 입으면 더 잘 싸우지 않을까? 안나가 물었다.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화면 속 쥬쥬는 마법구를 휘두를 때마다 몸 위로 화려한 장신구가 더 늘어났다.
안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꼭 껴안았다. 우리 선율이 재밌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는 아이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선율이 진짜 재밌어? 스르르 눈이 감겼다. 엄마 무거워, 잠깐만. 안나는 아이의 작은 배를 꼭 껴안았다. 오늘은 정말 피곤했어, 선율아 엄마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이는 옆으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거실 시계는 새벽 2시였다. 폰을 열자 언니의 부재중 전화와 톡이 쌓여 있었다.
-너 왜 전화 안 받아? 나 거기 못 가 아직도 안 끝났어. ㅜㅜ 내일 바로 롯데월드로 갈게.
안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식탁 위 먹지 못한 음식들이 보였다. 짜증 나, 저걸 다 어떡하라고.
TV 속엔 여전히 쥬쥬가 나왔다. 치링치링 치리링! 새벽에도 쥬쥬는 드레스를 입고 악당을 상대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안나는 바닥의 아이를 안아다 방의 침대에 눕혔다.
거실로 나오자 창가의 안마의자가 보였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 안나는 의자에 앉았다.
창밖의 사거리는 새벽에도 차들이 끊이지 않았다. 안나는 신호에 걸린 차들이 줄을 섰다가 사라지고 다시 줄을 섰다가 사라지는 걸 파도를 구경하듯 지켜봤다.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였다. 청회색의 어둠을 뒤로 반짝이는 롯데타워는 발사체 같기도 했고 우뚝 선 탑 같기도 했다. 너는 가라앉는 거니? 떠오르는 거니? 롯데타워가 대답이라도 하듯 반짝이는 비늘을 펄럭였다. 의자는 서 있는 걸까, 앉아있는 걸까. 안나는 안마의자 메뉴를 살피며 다시 혼잣말했다. 닭발은 어떡하지, 와인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핸드폰은 식탁 위에 있었다.
안나는 무중력 스페셜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고 의자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의자는 팔과 다리를 서서히 조이며 안나의 다리를 들어올리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어정쩡한 자세가 불편했다. 이게 무중력인가? 안나는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안나는 눈을 감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