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두운 옷을 입고 줄줄이 공동묘지를 오르는 우리가 개미 떼처럼 보일 것 같았다. 볕이 강한 것도 아닌데 금세 땀이 났다. 검은 옷이 무겁게 몸에 들러붙고 있었다. 앞에 가던 막내 고모의 등 위로 소금쩍이 올라올 즈음에야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돌아봤다. 눈 닿는 어디에나 무덤이 펼쳐졌다. 우리가 죽은 자들의 집에 함부로 찾아온 외지인 같았다.
묘비 없는 무덤이 수두룩했다. 할아버지도 묘비가 없다고 했다. 어른들은 여기 어디쯤일 거라면서도 할아버지 산소를 못 찾았다.
이게 아빠인 것 같은데.
막내 고모가 어떤 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묘가 너무 작다, 막내야.
아버지였다.
아니다 오빠야, 무덤도 크기가 준당께 그라네.
그러고도 한참을 헤맸다. 어른들은 소나무 아래였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내곤 어떤 무덤 앞에 섰다. 허름한 가게에서 사 왔던 소주와 오징어를 앞에 놓고 어른들부터 절을 했다. 바닥이 가파르게 깎아지르고 있어 위태위태해 보였다. 어른들이 물러나고 언니와 나는 사촌들과 함께 절했다. 나중에 나도 부모의 무덤을 헷갈리게 될까. 가까이 닿은 잡초에서 너무 싱그러운 풀 비린내가 났다. 나는 조금 빨리 일어섰다.
그때까지 절도 하지 않고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보고 있던 작은고모가 입을 열었다.
즈그 우리 아부지 아니다. 니들 남으 조상에 좋은 일 했으야.
그러곤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다 좀 더 잡초가 우거진 묘 하나를 짚었다. 서너 단 위에 있는, 다른 소나무에서 약간 떨어진 무덤이었다. 역시 묘비가 없었다. 그제야 어른들은 맞네, 저기네, 하면서 부산스럽게 올라갔다.
맛나게 잡수셨소? 하늘에서 우리 아부지하고 재밌게 노쇼.
큰고모는 낯모를 사람한테 놨던 소주와 오징어를 챙기며 슬쩍 웃었다.
공동묘지에서 내려온 뒤에 친척들은 흩어지기로 했다. 큰고모는 자신이 먼저 병원으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런 얼굴로 우두커니 있지 말고 고향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아버지 등을 떠밀었다. 혹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놓지만 말라며.
우리 가족은 아주 오랜만에 온 목포를 둘러봤다. 삼촌의 죽음이 다가와 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평범한 가족여행처럼 보일 법했다. 언제 올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릴 적엔 없었다는 다리 위를 차창을 모두 열고 달렸다. 몰아치는 짙은 바닷냄새가 시원했다. 아무리 속력을 내도 바다는 계속 이어지고 물비늘은 부지런히 빛났다. 영원할 것처럼 부딪치는 물결과 햇살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저 아래에서 햇빛을 올려다본다면 얼마나 찬란할까.
어릴 때 하도 고생해서 고향이 조금도 애틋하지 않다던 아버지도 고향 바다를 오래 바라봤다. 나와 언니는 아버지의 표정이 어두워질 기미가 보일 때마다 계속 말을 건넸다. 다녔던 초등학교에 들르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유년 시절의 운동장에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이 운동장에서 자랐다. 어린 삼촌도 여기에서 뛰어놀고, 어쩌면 저 현관 아래에서 소나기를 피했을 거다. 나는 아버지가 지금 어떤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유년의 공간에 아주 뒤늦게 찾아온 그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서, 조용히 사진을 찍었다.
곧 해가 지기 시작할 것 같았다. 우리는 삼촌이 살고 있던 집에 잠시 들렀다. 그리고 다시 차에 올라 병원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아직 정이 들지 않는 목포 시내가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막내 고모와 작은고모를 만나서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막내 고모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낯설어진 건지 내가 눈치채기도 전이었다.
옆에 학생은 어디 갔어요?
옆 침상에 있던 아이가 없었다. 잠시 말이 없던 간호사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호전돼서 일반 병실 가셨어요.
우리 애들보다 어리드만……
막내 고모는 간호사에게 들리지 않을 소리로 말했다.
안도감이 섞인 말이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 아이는 죽음에 가까워졌던 날들을 나중에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가까스로 회복한 삶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 아이는 지금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삼촌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 때문에 나의 아버지는 슬픔이 침범해오는 순간들을 버텨야 할 것이다. 내가 아이에게 느끼는 건 어쩌면 질투심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버지는 막내 고모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삼촌을 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일상을 정지시킨 채로 목포에 있을 수는 없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우리 가족은 일단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기로, 큰고모네가 목포에 더 남기로 했다.
목포에서의 마지막 날, 나와 언니는 한낮의 햇살을 피해 좁은 그늘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로 출발하기 전에 원무과에 들르는 중이었다. 언니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유리문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이 검고 무거운 옷을 벗고 편하게 씻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귓가에 배어 나오는 땀을 닦다가, 나는 어제 마주쳤던 여자를 봤다. 옆자리 그 아이의 엄마이거나 이모일 여자는 주차된 차들 사이를 지나 병원 장례식장 입구로 내려갔다. 여자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잠깐만.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쪽으로 갔다.
장례식장이 있는 지하에 다다르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차분한 공기 사이로 말소리가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정면에는 고인들의 이름이 적힌 화면이 있었다. 손유민. 거기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봤다. 그러자 어떤 수치심이 올라왔다. 누군가 알아볼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검은 옷을 입었지만 어떤 죽음도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방적인 호기심으로만 그 아이를 줄곧 바라봤고, 그 때문에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사실까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그 길로 목포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그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목포에 있는 동안 미뤄뒀던 일을 수습하느라 다시 바빠졌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가끔 멍하거나 무기력해졌다.
그러는 동안 사실 삼촌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친척들이 교대로 목포에 머무르며 간호하고 있었고, 그렇게 며칠을 하다 보니 삼촌이 의식을 찾았고, 나중에는 사람도 알아보고 서서히 미음도 먹게 되었다. 앞으론 간호하기 편하게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해올 수 있게 되리라고도 했다. 이제는 일반 병실이었다. 삼촌은 한동안 서울에 있는 병원에 더 머물다 퇴원했다. 결국엔 살아나서, 죽음 대신 삶으로 건너오게 된 사람은 그 아이가 아니라 삼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