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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Sep 09. 2023

백 년의 집(1)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집이 무너졌다.

이제 당신을 거두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그 꼿꼿한 기둥과 상량을 부러뜨려야 하니 많이 아플 거라는 경고도 없이,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뿌려지는 거센 물줄기 앞에서 벽돌처럼 딱딱했던 흙들은 기침 한번 하지 못했다. 하늘 높이 들린 굴착기의 쇳덩이 버킷은 페인트가 들뜬 함석지붕을 움켜 걷어내고, 앙상하게 드러난 대들보와 서까래를 찍어 누르고, 벽을 부서뜨렸다. 눈에도 바람에도 태풍에도 꿋꿋했던 집은 묵묵히 내려앉았다. 땅을 다지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사람을 품어 안았던 백 년의 집이 그렇게 떠났다. 



고향집의 집터는 우리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대(代)에서 매매 제안이 오갔는데 성사되지 않았다 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사대(四代)가 그 집에서 살아오는 동안 터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고 바로 전 주인인 산 너머 한 종중에게 터를 사겠다고 제안한 건 우리였다. 종중 대표와 길고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협상자로 새로 나선 이가 있었다. 종중 구성원이라 했다.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는 그는 우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결국 우리는 매입을 포기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름으로 터를 매입한 그는 건축물대장상 소유자인 아버지의 상속인들을 상대로 건물철거소송을 제기했다. 그 땅에 새 집을 짓겠다고도 했고 찜질방을 짓겠다고도 했다. 고향집은 다섯 가구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에 있었다. 진실은 몰랐지만 그의 선택이었고 절차에 따른 소유권을 획득한 그는 법을 앞세워 당당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지와 건물의 소유자가 동일 인물이었을 때 성립하는 관습법상 법정지상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집터가 집안의 소유였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랬다면 터와 집의 소유자가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옛날에는 남의 땅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 해서 많은 이들이 제 땅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토지에 집을 지었다 했다. 만약 증조할아버지가 집을 지었다면 지상권은 성립하지 않는다. 집터의 주인이 집을 지었다면 터와 집이 같은 사람의 소유였으니 지상권은 성립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땅의 소유권이 우리에게 넘어오는 것은 아니니 새로운 땅 주인은 지금보다 훨씬 높은 토지 사용료를 요구할 터였다. 집터를 매입하려 했던 이유가 낡고 불편한 집을 개축하려던 것이었으므로 과도한 지료를 지불하면서까지 터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이 놓아지지 않았다. 스물여섯 살 만삭의 할머니가 젊은 남편을 황망하게 여의고 아들 셋을 키워낸 집이었다. 치매와 중풍에 걸린 그 할머니를 며느리인 엄마가 한겨울 개울물에 시린 손빨래를 해가며 모신 집이었다. 내가 잡았던 문고리는 엄마가, 할머니가 잡았던 문고리였다. 나는 증조할아버지가 쓸었을 마당에서 놀았고 할아버지가 앉았을 대청마루에 엎드려 잤다. 너럭바위 위로 포도나무 그늘이 있는 우물가, 흰 눈이 소복한 장독대,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터주. 한 세기 한 집안의 역사가 담긴 곳이었다. 지붕과 기둥은 기울어지고, 이곳저곳 부러진 창호지 문살엔 검게 세월의 더께가 쌓였지만 옛 것이 간직한 소중함이 있었다. 그곳에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집이 안쓰러웠다. 나지막한 산 아래 터를 잡고 풍경처럼 앉아있는 집. 누군가는 그곳에서 처음 세상을 보았고 누군가는 마지막 숨을 내려놓았다. 보내더라도 정성껏 고이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 나섰다. 집의 시작을, 처음 집을 지은 이들을.  



大韓光武十一年丁未二月十三日(대한광무십일년정미이월십삼일).


상량문에 적힌 글자에서는 여전히 힘이 느껴졌다. 강인하고 단정하고 엄격했다. 집의 안채는 1907년에 지어졌다.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식이 광무 11년 2월 13일에 있었다. ‘광무’는 대한제국이 사용하던 연호였다. 그러나 건축주는 알 수 없었다. 소유권을 증명하는 등기제도가 시행되기 훨씬 전이었다.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이었고 구전되어오던 내막을 알고 있었을지 모를 그 아버지조차 세상을 떠난지 삼십 년이었다. 


190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백 년은 대한제국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쳐 경제개발을 앞세운 독재시대였다. 자료들이 제대로 남아있을 리 없었다. 지배 세력이 바뀔 때마다 행정 구역은 물론 법률과 제도, 측량의 단위 등 사회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다 집이 지어진 1907년을 기준으로 공적 자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국가기록원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에 있는 고문서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하고자 한 시도는 1897년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었다. 대한제국은 1899년 여름부터 전국 토지의 절반 이상을 측량하는 양전 사업을 실시했다. 조세부과가 목적인지라 토지의 면적을 측량한 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여 면적을 다르게 표기했다. 세금을 걷기에는 편리했지만 소유자가 명확하지 않아 오늘날의 땅과 대조할 자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 사업은 집이 지어지기 전인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땅에서 사람으로 방향을 돌려보기로 했다. 


대한제국은 매년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1896년부터 작성된 광무호적에는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호주의 이름, 나이, 직업, 호주의 친 증조부와 외조부의 이름과 신분을 표기했고 가족구성원은 호주와의 관계, 이름과 직업, 나이를 표기하였다. 여기에 이동여부를 알 수 있는 전 거주지와 이동일, 가옥이 초가집인지 기와집인지, 자기의 소유인지 임차인지와 가옥의 크기(칸 수)를 기록하였다. 집에 대한 소유자를 알 수 있어 집터가 있는 고향의 호구조사 자료만 있으면 내가 찾는 답은 쉽게 얻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없었다. 당시에 작성된 호적들 중 유실된 게 많고 일본에 있는 것도 상당해 고향 지역의 호적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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