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낫질을 했다. 텃밭이라 하기엔 넓고 농사라 하기엔 부끄러운 작은 밭을 일구었다. 어릴 때 습득했던 농사 기술들은 세월에 밀리지 않고 다행히 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트랙터와 이앙기, 콤바인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기계가 들어갈 수 없는 개울 건너에 있는, 종이학 모양처럼 각진 밭이니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농작물을 거두는 모든 과정을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식구들이 먹을 채소들이고 환경을 생각해서라도 농약과 제초제는 되도록 쓰지 말자 했으니 풀을 잡는 게 큰일이었다.
낫은 예초기를 쓸 수 없는 돌과 관목이 많은 비탈면의 풀을 깎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깎은 풀들은 고랑에 깔아 풀이 자라는 것을 막고 썩으면 거름으로 썼다. 이게 바로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 일석삼조, 일석사조라고 지인들에게 자랑을 했지만 풀베기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예리한 날에 손이나 다리를 베일 수 있어 항상 조심하고 긴장해야 했다. 이름 모를 독한 벌레나 벌에 쏘인 적도 많았고 풀독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두꺼운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토시와 장갑을 끼는데도 그랬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 별 쓸모없는 일을 한다는 이웃들의 시선이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겹겹이 짙은 안개 속에 잠긴 여름 새벽, 산과 들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 낫을 들고 밭으로 간다. 착, 착, 착. 비탈에 허리를 굽히고 낫을 뉘여 풀을 베고 있노라면 이렇게 엎드려 평생 낫질을 한 아버지가 어느결에 곁에 가까이 있었다. 고된 노동의 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저벅저벅 시간의 강물을 걸어 내려왔다.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이 땅의 농부들이 내가 쥔 낫을 함께 움켜잡고 있었다. 내가 그들이 되었고 그들이 내 안에 있었다. 어느 왕좌의 홀보다도 귀한 홀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도구는 인류의 기억과 경험의 산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발전시켜 지금의 문명을 이뤄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농경시대의 많은 농기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쓰임새를 잃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들이 있다. 낫이 그 중의 한 예다.
낫은 삽이나 곡괭이처럼 쇠와 자루(손잡이)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지만 그 중 모양새가 가장 날렵하고 유려하다. 이슬에 젖고 풀물에 반짝이는 낫을 허공에 세우면 초저녁 서쪽 산 위에 걸린 초승달이 뜬다.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선과 검은 등 아래 흰 날이 시리고 서럽다. 날이 닳아가면서 낫의 등은 점점 좁아지고 가늘어진다. 오래 쓴 낫은 그것과 세월을 보낸 늙은 농부의 등처럼 굽어 웅크려진다.
어릴 적, 고향집 사랑채 헛간 시렁에는 쓰임새가 각기 다른 낫들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일하러 나가기 전, 아버지는 그 중의 하나를 골라 우물가에 앉아 숫돌에 날을 갈았다. 사악- 사악-. 물로 씻어낸 낫을 들어 날의 앞뒤를 꼼꼼히 살폈고 다시 갈기를 반복했다. 정성이 들어간 신중하고 몰입된 동작이었다. 그렇게 갈려 지게머리에 꽂혀 대문을 나선 낫은 해가 기울어 어둑어둑해질 때 쯤 풀짐이나 나뭇짐에 꽂혀 둥실둥실 떠왔다.
낫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주 먼 원시의 시간이 느껴진다. 아득히 처음 쓰이기 시작한 때와 오늘날의 외관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꾸밈도 장식도 없다. 농사에서는 빠질 수 없는 도구였기에 일상의 속담이나 옛 이야기에도 많이 등장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은 낫이 한글 자음 ‘ㄱ’자처럼 생긴 데에서 유래했다. 인구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때에는 낫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요즘엔 낫을 실제로 보거나 사용해본 이들이 많지 않다. 1970년 전체 인구 3천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1,400만 명이었던 우리나라 농업인구는 점점 줄어 지금은 전체 인구 5천 만 명 중 4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낫에는 크게 나무를 찍거나 자르는 조선낫과 벼나 풀을 베는 왜낫(외낫, 평낫)이 있다. 강하고 투박해 보이는 조선낫은 자루에 박히는 부분인 슴베가 길고 무쇠로 만들어져 무겁고 단단한 반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진 왜낫은 강철로 만들어져 얇고 가늘다. 옛 어른들 중에는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너무 가볍고 힘이 없어 목이 쉽게 부러진다고 왜낫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낫은 칼처럼 베고 자르는 도구지만 칼만큼 위협적이지 않다. 칼은 도마 위에서 파를 썰거나 닭이나 생선을 토막 내거나 전쟁터의 무기가 되거나 크기나 종류는 다르지만 모두 표정이 없는 무사 같다. 곧게 뻗은 날카로움엔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자비도 망설임도 없다. 대상을 베어내고 끊어내는 강인한 결단만이 보인다. 낫은 밖으로 내뻗치는 게 아니라 안으로 둥글게 휘어진 모양새 때문에 절반은 닫히고 절반은 열린 공간을 갖는다. 잡은 듯 놓은 듯, 들어갈 듯 나갈 듯 무한한 여백이 낫에는 있다.
낫은 농민 계급의 상징이었다. 옛 소비에트 연방(구 소련)이나 공산주의권 국가, 공산당을 상징하는 국기나 깃발에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는 망치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 낫이다.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은 오히려 그 이유로 인해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1894년 조선, 사람이 귀하다고, 나라를 바꾸겠다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농민들이 일어섰다. 동학농민전쟁이었다. 그 때 그들 대부분의 손에 들린 무기는 농기구였고 그마저도 없어 대나무를 잘라 만든 죽창을 들었다. 가장 슬픈 전투라 할 공주 우금치 전투. 대포와 화승총을 갖춘 관군과 일본군에게 낫과 곡괭이, 쇠스랑을 들고 달려나가는 농민군들. 2만여 명 중 5백 명만 살아남았다. 없는 자의, 밟힌 자의, 빼앗긴 자의 가장 마지막 무기가 되었던 낫의 저 깊은 곳에는 한스럽게 쓰러져간 남루한 자들의 피와 식어가는 눈이 스며있다.
탈곡기, 써레, 쟁기 등 농업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른 많은 농기구들처럼 낫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다. 몇 년 전, 경북 영주의 한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호미가 세계 최대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에서 원예부문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올라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세계적인 음악 그룹 방탄소년단의 노래에도 ‘호미(homi)’가 등장하고 대통령 영부인이 오스트리아 빈 대학 식물원에 호미를 헌정하기도 하였다. 낫이 호미처럼 옛 농경시대의 명성을 되찾을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그 구조의 단순함과 언제 어디에서도 사용 가능한 편리함으로 한 동안은 시골 집 벽에 걸려 은은한 저녁 햇살을 받고 있을 것이다. 들고양이 어미와 세 마리 새끼가 늘어져 자고 있는 우리 집 창고 선반에서처럼.
착, 착, 착. 풀을 벤다. 심은 사람은 떠난 지 오래인데 뿌리를 내리고 오십 년 지나온 전나무 아홉 그루가 밭둑 안개 속에 거인처럼 서있다. 후두둑, 툭. 느티나무 숲에서 물방울들 떨어지고 깨어나는 새들의 날갯짓 소리 커진다. 착, 착, 착. 낫이 지날 때마다 무릎까지 자란 풀이 눕는다. 장갑에 풀물이 들고 머리에선 풀냄새가 난다. 얼마나 지났을까. 뒷걸음질 치듯 서서히 안개가 물러가고 길과 나무와 산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쨍-. 풀잎들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인다. 벌써부터 부글거리는 한여름 해가 앞산 산등성이 위로 떠오른다. 참나무, 밤나무, 오리나무 이파리들이 물고기가 되어 퍼덕인다. 두어 시간의 노동으로 덤불은 이발을 한 어린아이의 머리처럼 말끔하고 밭고랑은 깔린 풀들로 눈 시리게 푸르다. 장갑을 벗어 낫을 닦는다. 늙고 주름진 아버지들도 이렇게 비탈에 서서 아침 해를 맞으며 젖은 낫을 닦았을 것이다. 무뎌진 날 뭉툭한 끝에 온 몸 곧추세웠던 생(生)들이 어룽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