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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유 Sep 09. 2023

백 년의 집(2)

202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수필)

세월이 긴 만큼 길은 좁고 희미하고 자주 끊겼다. 종이 위에서 땅들은 갈라지고 나눠지고 쪼개졌다. 땅은 언제나 있던 그 자리에 있는데 서류의 주인은 자주 바뀌었다. 과연 땅의 주인이 인간일까. 북아메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인들은 달려간 거리만큼을 자기 땅이라고 외쳤지만 그곳에 터 잡고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새와 곤충과 물고기, 짐승과 인간 모두의 것이었다. 



결국 일제 강점기로 넘어왔고 집이 지어진 때와 가장 근접한 시기 집터를 소유하고 있던 이를 찾을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작성한 ‘토지조사부’에서였다. 토지조사부가 작성된 1911년은 집의 상량식이 있던 1907년보다 4년이 늦지만 이제까지 살펴본 기록 중에서 지번(땅의 번지)이 현재와 가장 근접했다. 집터의 주인 ‘손성만’은 당시 마을 일대의 토지 11만 평을 소유한 거부(巨富)였다. 그러나 그는 마을에 살던 이가 아니었다. 그의 주소는 ‘경성부 북부 견평방 전동’,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1906년 광무호적 상 ‘한성부 중서 견평방 전동’이었다. 과연 집을 지은 사람은 손성만일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손성만의 호적을 보아야 했다. 다행히 ‘견평방 전동’의 광무호적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국사편찬위원회에 있었다. 동그란 원 속 작은 롤필름 안에 백년 전 종로 거리가 펼쳐졌다. 딸칵, 딸칵, 화면이 바뀔 때마다 시간을 뚫고 종이 위에서 걷고 웃고 무리지어 움직이는 사람들. 농부와 관리와 상인이 있었다. 한 칸짜리 초가집에 사는 사람과 열 칸이 넘는 기와집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집은 가족이 많아 북적거렸고 어떤 집은 혼자, 혹은 부부가 단출하게 살았다. 그들의 후손도 만나보지 못했을 그들을 나는 흰 종이 위 검은 먹 글자로 만나고 있었다. 어떤 영상보다도 따뜻하고 정겨웠다. 첫 날은 찾는 이가 없었다. 다음 날, 네 시간 동안 필름을 돌렸다. 손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마다 한 자 한 자 온 가족의 이름을 살폈다. 그러다 “아-.” 나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있었다! ‘동거친속(同居親屬)’란에 세로로 쓰인 다섯 글자.


子成萬年七(자성만년칠), 아들 성만 칠 세. 


호주의 이름은 ‘손도순’.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가 작은 네모 칸에 앉아 빠끔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팔을 뻗으면 작고 보드라운 손을 마주잡을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 손도순은 60세, 어머니 ‘파평 윤씨’는 52세. 그런데 1903년 호적에 손성만은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손도순의 친자였다면 네 살이 되는 1903년 호적에 기록되었을 텐데, 윤 씨의 출산 나이도 높아 입양 가능성이 높았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1906년 생존해 있던 손도순은 65세가 되는 1911년 토지조사부에는 올라있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그의 아들 손성만이 모든 토지의 소유자가 되어있었다.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손도순이 사망하고 상속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였다. 집의 시원(始原)은 그렇게 비밀을 간직한 채 침묵을 지켰다. 



길은 끝났다. 집을 지은 이는 끝내 찾지 못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지었는지, 가진 것에 비해 작고 소박한 집에 살고 있던 손도순이 산촌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지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지었는지 영영 알 길이 없어졌다. 그러나 마음은 편했다. 고향집의 시원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곳에서 시작된 나의 뿌리를 돌아보고, 그 집을 지은 사람들과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백 년의 집을 위로하는 소박한 의식이고 의례였다. 이제 누가 집을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쓸고 닦고 아끼며 그 집을 소중히 여겼던 이들이 있었다. 자연에 스며있던 집과 그 집에 스며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한 세기를 보냈다. 쓰러질 것 같은 집도 사람이 살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했다. 집을 마지막까지 버티게 하는 건 숨, 사람의 숨. 나는 문서들의 사본과 알아낸 사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와 삶을 정리해서 백여 쪽에 달하는 서면을 법원에 제출했다. 먼저 떠난 이들과 이제 떠날 집, 세월에 헐거워진 이 땅의 모든 흙집들에 바치는 조사(弔辭)였다. 



봄이 왔다. 하늘 곳곳에서 날아온 풀씨들이 빈터에 틈새 없이 빼곡하게 싹을 틔웠다. 풀들은 하루하루 키를 높이고 무성해졌다. 달맞이꽃, 망초꽃, 들국화, 바랭이, 쑥부쟁이가 우거지고 버드나무, 가죽나무, 벚나무와 개복숭아 나무가 자랐다. 햇살이 환했고 달과 별이 오래 머물렀다. 풀벌레 울음소리 밤하늘에 가득했다. 인간과 인간의 집이 있던 곳은 풀과 나무와 새와 고라니의 집이 되었다. 머무는 모든 것의 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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